#280. 나만의 절대영역 (4)
“전부 해치웠나?”
“응! 이제 나와도 괜찮아, 방장!”
열대 밀림 속에서 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레 그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만약을 생각해 기원검 네메시스를 들고 있긴 했으나 휘두르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이번엔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거야?”
“미안. 날개가 없는 드래곤은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움직이나 신기했거든.”
“걔네 드래곤이 아니니까.”
“아니야? 그럼 환상 속의 동물인가?”
“공룡이라고 하는 녀석들이야. 까마득히 오래전에 내가 살던 세계를 지배하던 종족이라고 생각하면 돼. 인간이 등장하기 한참 전에 멸종했지.”
뚠 아티르는 어떤 언덕 위에 앉아 있었는데, 사실 그것은 언덕이 아니었다.
몸길이 13미터에 체중은 8톤에 육박하는 티라노 사우르스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앞발이 너무 짧잖아. 그래서 멸종했나 보구나.”
진짜 공룡이 들었다면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두더지 토인인 뚠의 앞발이야말로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짧았으니까.
“다음은 어디로 가면 돼?”
뚠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게로 날아왔다.
잘못 말한 게 아니다.
뚠은 정말로 수직으로 선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비행하고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리는 것도 아니고, 마법진도 그리지 않았으며, 하다못해 흔한 주문 외우기도 없이 그것을 그냥 해냈다.
꿈속 세계에서 뚠 아티르에게 불가능은 없어 보였다.
“너 좀 낯설다, 뚠.”
“우리 종족은 꿈속에서 오히려 오감이 살아나. 지금까지 방장과 다른 친구들이 봐온 모습은 내 진면목이 아니라는 말씀!”
일단 눈빛부터가 달랐다.
언제나 졸려 죽겠다는 듯한 눈썹에 흐리멍덩한 동공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핏 푸르가토리움의 3층 대수림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지만 공기의 밀도나 색채가 달랐다.
여기는 ⟨레이지 오브 사우르스⟩라는 슈팅 게임 속 세계였다.
타임머신의 오류로 6,600만 년 전의 과거에 표류하고 만 특수부대가 공룡의 포식을 피해 살아남는 내용이었다.
“저기 구름을 내뿜는 화산으로 가야 해. 이 게임의 보스는 거기에 진을 치고 있어.”
“좋아. 화산을 향해 올라간다니, 옛날 생각이 나는걸. 물론 마그마 볼은 없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뚠은 내 머리 위에 모자처럼 엎드렸다. 영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본체가 내 머리에 올라탔다 해도 힘들거나 하진 않았을 거다.
“꼭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 거야, 뚠?”
“그냥. 돈독해 보이고 좋잖아. 인간들의 어깨동무 같은 거라고 생각해 둬.”
“우린 아직 니오프른을 추격하는 중이야. 아주 위험한 녀석을 잡으러 가는 거라고. 긴장감을 유지해야 해.”
“비르카가 방장을 만나고 돌아와서 얼마나 자랑질을 한 줄 알아? 그리고 언젠가 더 높은 층에서 또 자기를 불러줄 거라며 으스댔지.”
“……무슨 얘기를 들었더라도 그게 전부 사실이라고 믿지는 마.”
“어? 그러면 작별의 순간에 방장이 비르카와 찐한 입맞춤을 나눴다는 것도…….”
“으아아아악! 그럴 리가 없잖아! 해골에는 입술이 없는데 무슨 수로 키스를 하냐!”
“아무튼 그때 나는 생각했어. 만약에 방장이 혹여라도 나를 부른다면 꼭 붙어 다니기로. 물론 내 예상과는 달랐지만.”
“어떻게 예상했는데?”
“꿈속 세계로 나를 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뚠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네 스킬 ‘달콤한 잠꼬대’ 말이야. 지금까지의 나는 마음먹기만 하면 친구의 스킬 중 어떤 것이라도 빌려올 수 있었어. 원리를 이해 못 하는 중력 마법도, 종족이 다른 구미호의 입에서 뿜는 불길도 재현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왜 이 스킬은 발동이 안 되는 거지?”
희한하게도 뚠의 고유 스킬인 ‘달콤한 잠꼬대 Lv. 1’을 실행하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고 있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우리 종족은 숨 쉬듯이 꿈속을 거닐 수 있어. 원하는 대로 자신의 형태를 바꿀 수도 있고, 주변 환경을 조정할 수도 있지. 누가 옆에서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야. 방장은 자기 심장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할 수 있어? 그걸 스스로 멈추게 할 수 있어?”
“아니. 불가능하겠지. 네가 꿈을 다루는 게 불수의근처럼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거라고 해석하면 되나?”
“응.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가설이 있긴 해. 그걸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
“그 수인의 말은 틀렸습니다, 슈바인 스트링거. 그는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어요.”
스르릉!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기원검을 겨누었다.
원시림의 나무 둥치에 니오프론이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나타났지만 반갑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니오프론. 드디어 납셨구나.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칠 때는 언제고.”
“겁을 먹다니요.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다만 당신을 골탕 먹여줄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을 뿐이지요.”
악기를 쓰다듬는 니오프론의 얼굴에는 다시 일전의 여유가 맴돌고 있었다.
정수리 위에서 뚠이 속삭였다.
“저 사람이야?”
“그래. 저 녀석이다. 몽현의 신.”
“신치고는…… 너무 예쁘장하게 생긴 거 아니야? 나는 괴물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긴 죄수를 상상했는데.”
“겉모습에 속지 마. 저건 전부 위장일 테니까.”
나는 긴장감을 놓지 않은 채 니오프론과 조금 거리를 벌렸다.
반면에 니오프론은 자신의 매끈한 얼굴을 더듬더니 자조의 웃음을 내보였다.
“위장이라는 표현은 정확하다고 할 순 없겠네요, 슈바인 스트링거. 그건 본체의 모습이 존재하는 인간이나 쓰는 말 아니겠어요? 저에게는 애초에 ‘진짜 모습’이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그저 많은 이들이 신의 형태라고 납득할 수 있는 외양을 조합했을 뿐.”
“……시답잖은 네 신상 명세 따위 궁금하지 않아. 내 관심사는 너에게서 열쇠를 빼앗는 것뿐이다.”
“이런이런. 당신을 조금 놀려준 것 때문에 삐쳐 있는 겁니까?”
“조금 놀려줬다고? 내가 클리어한 게임들의 세계로 집어 던졌을 뿐이잖아. 날 향수병에 걸리게 만들어서 이길 생각이었다면 무대를 잘못 골랐다고 말해주고 싶군. 네가 만든 모든 세계는 전부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었으니까. 이런 곳으로 끌어들여봤자…….”
대꾸한 것은 니오프론이 아니었다.
“아니야, 방장. 저 신은 방장을 끌어들인 게 아니라 거꾸로 밀어내고 있는 거야.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방장의 기억 속에 있는 장소들로만 배경을 채워 넣은 거고.”
“호오. 그래?”
니오프론의 입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뚠의 지적이 정곡을 제대로 짚어낸 모양이다.
“곤란하군요, 등반죄수의 친구분. 그런 식으로 힌트를 알려주면 게임의 재미가 팍 식어버리지 않겠어요?”
“뭐 어때. 슈바인은 이러려고 나를 불렀는걸.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신이라고 해도 나는 1층 화룡도에 있어. 그, 그러니 날 해칠 순 없을걸?”
말의 내용과 달리 뚠의 수염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영체로 소환되었을 때는 아무런 해도 입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해 뒀었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거기엔 니오프론의 얼굴이 점점 사나워지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이대로 계속 방해당할 수는 없지요. 파천황의 권능이라고 해도 제 절대영역 안에서라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당신이 원래 있던 화룡도로 돌려보내 드리지요.”
“엇? 조심해, 뚠!”
니오프론은 십만대산에 내가 영체로 소환했던 천마 류운학과 마녀 일레인을 아주 간단하게 돌려보낸 전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내게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죄수 뚠 아티르. 언젠가 제가 1층까지 정복하게 된다면 당신을 가장 먼저 죽여드리지요. 그때까지 확정된 죽음을 곱씹으면서 공포에 떨기를 바랍니다.”
도로롱.
악기의 현 위에서 니오프론의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달리 우리가 무슨 방법을 쓸 새도 없었다.
“으음?”
그런데 뚠은 어디에도 가지 않고 여전히 내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새근새근한 숨소리 또한 그대로였다.
“왜? 날 못 없애겠나 보지?”
“……어떻게? 제 꿈속에 난입할 수가 있는 거지요?”
“왜기는.”
뚠은 마치 다이빙 선수처럼 도약한 뒤 닌자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착지했다.
마치 내 앞을 막아서는 것처럼.
언젠가 마그마 볼에서 내게 보여줬던 등을 나는 또 한 번 보고 있었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즉, 뚠이 원하지 않을 경우 아무리 니오프론이라고 해도 자신의 꿈에서 강제로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뚠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새삼 놀라운 부분이었다.
“인상적이군요.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니오프론은 신이 확실했다.
만약 저 입장에 선 게 나였다면 뚠을 내쫓아보기 위해서 여러 번 현을 튕겨보았을 것이다. 이를 악문 소리를 내면서.
하지만 니오프론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권능에 실수가 있을 수 없음을, 만약 그것이 막혔다면 두 번 시도할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련이라는 것에 휘청이는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선택이다.
“설마 제 권능에 이 정도로 저항할 수 있는 죄수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교도관조차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영원히 제 꿈속에 난입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안 그런가요, 슈바인 스트링거?”
젠장.
전세가 바로 역전됐다.
뚠을 영체로 소환하는 것에는 이틀의 시간제한이 있다. 48시간이 끝나면 비르카가 그랬던 것처럼 본래의 층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니오프론에겐 그리 긴 시간도 아닐 거다.
“그 뒤에 다시 오지요. 어디 마음껏 발버둥 쳐 보십시오.”
“어딜 또 도망가려고!”
냅다 던진 기원검이 원시목을 뚫고 몇 그루의 나무를 쓰러트렸다.
하지만 이미 검이 내 손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니오프론은 사라져 있었다.
“휴우. 일단 물러갔네. 무서웠다, 진짜. 확실히 신은 신이구나.”
나는 허공섭물로 기원검을 회수한 뒤 진땀을 닦고 있는 뚠에게 다가갔다.
“아직 나한테 설명 안 한 게 있어, 뚠.”
“어? 응?”
“니오프론이 그랬잖아. 너는 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녀석은 반대로 네가 시간을 끌고 있다고 했어.”
“……미안. 사실 한 가지 시도해볼 만한 게 떠오른 건 사실이야.”
“그런데 왜 바로 말해주지 않았어? 이게 장난인 것 같아?”
“장난이 아니니까! 누가 그걸 모르겠어?”
“그럼 왜 시간을 끌었는데?”
“방장과……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거든.”
뚠은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도저히 뭐라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벌써 8층까지 올라왔다면서. 아마 이번 시련이 방장이 겪는 마지막 시련이 될 테지? 이제 더는 우리 화룡도 7번 방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할 일도 없을 테고.”
7번 방의 죄수들은 내 소중한 친구들이다.
하지만 등반을 함께하는 동료들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 평화를 사랑하는 친구들이었다.
무지막지한 적들과 필사의 전투를 치르기엔 연약한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암묵적인 약속을 했어. 또 한 번 방장이 우리 중 누군가를 부른다면…… 그때는 다른 친구들의 몫까지 함께 있어 주자고. 그동안 우리 방장이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그게 누가 되었든지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짜 스테이지 위에서,
영체로 소환된 내 첫 번째 친구가 자신의 속내를 고백하고 있었다.
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