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나만의 절대영역 (3)
아주 오랫동안.
나는 푸르가토리움에 입소한 죄수 중에서 나만큼 억울한 죄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뚠 아티르라는 죄수를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
7번 방의 앙증맞은 두더지 토인.
마왕의 옥좌 밑에서 잠을 자다가 소환빔을 맞기 직전 마왕은 자연사하고, 그 밑에서 땅굴을 파 자고 있던 바람에 대신 잡혀 들어왔다는 어이없는 사연.
‘그게 진실의 전부였을까?’
지금의 나는 안다.
여지껏 게임캐릭터의 누명을 쓰고 이 감옥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인간 박상식은 이미 죽을 운명이었던 육체의 수명을 연장하면서 운명의 여신을 모욕했다.
타천의 강물의 마셔 영혼에 새겨진 기억조차 잃어버려 내가 크나큰 죄를 지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교도관장은 전지전능의 존재.
자신의 말대로 실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중대한 의문이 생긴다.
뚠 아티르.
어쩌면 그 녀석도 억울하게 붙잡혀 온 게 아닐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무해하기 짝이 없는 두더지가 대체 무슨 죄목으로 그토록 긴 형량을 받은 것일까.
언젠가 뚠에게 물은 적이 있다.
채석장으로 가는 길에 녀석이 자꾸 철푸덕 엎어져 졸고 있길래 뒷덜미를 강하게 붙잡고 끌어올리며 이렇게 물었다.
‘흠냐. 흠냐. 다시 침대로 가즈아. 제발.’
‘넌 도대체 왜 그렇게 잠만 처자는 거냐. 억울하지 않아?’
‘잠을 좋아하는데 왜 억울해?’
‘평생의 절반 이상 동안 잠들어 있는 거잖아. 네 동족도 사회생활도 하고, 어? 짝짓기도 하고, 어? 그러려면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바삐 누굴 만나고 할 텐데 말이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종족 중에서 잠이 적은 편이야. 전설 속의 시조께서는 10년 동안 단 세 번 깨어나셨다는 이야기도 있어. 이건 그분의 88번째 부인이 남긴 기록에도 있는 이야기라고.’
‘……그딴 시조 밑에서 어떻게 종족이 번창한 거야? 그렇게 가끔 깨어나는데 무슨 수로 88명이나 되는 부인을 거느린 거지?’
‘정확히는 12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어. 역사에 남지 않은 부인들도 있을 테니까.’
이쯤에서 비르카 리케우톤이 끼어들었던가.
‘켈켈켈.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거냐, 뚠? 단 세 번 깨어났을 때 열심히 싸돌아다닌 모양이지? 아니면 눈 한 번 마주치는 것만으로 암컷을 꼬실 수 있는 대단한 미남 수컷이었다던가?’
‘우리 시조님을 모욕하지 마. 그분은 자손이 많아서가 아니라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셨기 때문에 위대하신 거라고.’
미지의 영역이라는 말에 디멜 무바크가 관심을 보였었고.
‘잠깐, 뚠. 그 미지의 영역이란 게 뭐냐? 너희 종족의 시조가 마법사이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니. 마법은 아니야. 대신에 우리는 공유몽(共有夢)을 꿔. 그리고 아주 어려서부터 그 꿈을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능력을 키워나가고 있지. 시조께서는 바로 그 능력을 발현하신 가고.’
‘공유몽? 그건 우리 마법계에선 진작에 배척된 유사 학문일 텐데. 특별한 마법 없이 독립된 개체의 의식이 병렬로 연결되는 건 불가능해.’
그러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올쿠레 켄타가 적당한 타이밍을 찾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라네.’
‘그래요, 어르신?’
‘일전에 말했듯이 나는 켄타족과 우로스족의 개체가 만나서 비로소 성체가 되는 켄타우로스. 한 개체가 되고 나면 상반신을 맡은 켄타족이 완전히 생경한 꿈을 꾸는 일이 빈번해. 합체한 우로스의 기억에 영향을 받는 거야. 다른 종족도 할 수 있는 공유몽을 동족끼리 못할 법 있나.’
공유몽.
뚠이 신나서 설명한 세계는 앨리스의 동화 나라를 연상케 했다. 두더지 토인들은 꿈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땅속에 갇혀 사는 현실과 달리 달의 조각을 돛단배 삼아 하늘도 날 수 있고, 상어의 등에 업혀 바다를 모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너희 부족이 잠꾸러기인 거구나. 꿈을 통해서 번영하고 발전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잠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슈바인. 꿈속에 있는 걸 좋아하는 거지.’
그렇게나 잠을 사랑했던 뚠 아티르의 불운은 이 화룡도에 끌려와 형량이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 노역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꾸만 잠에 빠져드는 종족의 특성 때문에 가장 게으른 죄수가 되어버렸다. 형량은 자꾸만 불어났고.
본래 토인족의 수명은 200년.
하지만 뚠은 이 감옥에서 300년을 넘게 썩었다
그리고 녀석의 수면 패턴을 계산해보건대 감옥에서 잠을 자고 있던 시간을 합치면 이미 본래 수명보다 긴 시간 꿈을 꿔왔을 것이다.
즉, 뚠 아티르는 이 감옥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잠들어 본 경험이 있는 존재.
가장 오랜 시간 꿈을 꿔온 ‘꿈꾸기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남들이 보면 대책 없는 게으름뱅이에 잠꾸러기이겠지만 나에게는 다르다.
나는 뚠을 믿고 녀석의 이름을 불러냈다.
“내 친구 뚠을 이 타천의 강가로 소환하겠다.”
[권능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가 발휘됩니다. 당신의 친구 뚠 아티르의 영체가 소환됩니다. 유효시간은 48시간이며 종료 시 영체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시전자는 언제든 원할 때 소환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
“으엥? 그래서 온통 쇳덩어리밖에 없는 세계로 나를 불러낸 거야?”
“겁먹지 말고 진정해, 뚠. 너무 큰 소리를 내면 적들이 몰려올 거라고.”
“적? 저어어억?”
‘적’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버둥거리는 두더지 토인의 모습은 볼썽사나웠다.
하지만 녀석의 토실토실한 궁둥이를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말이지.
“걱정하지 마. 비르카에게 듣지 않았어? 영체로 소환되었을 때 너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아. 그냥 나와 대화할 수 있을 뿐이야.”
“히잉. 그래도 무섭단 말이야. 우리 종족은 땅을 파고 들어갈 수 없는 지형지물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껴.”
너무 작달막해서 있는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뚠의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대로라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는 창밖으로 봐둔 적당한 장소로 뚠을 데려갔다.
로봇 선수들이 과격한 야구 경기를 치르는 대형 스타디움의 마운드 위로.
“어때? 마음에 들어?”
“으음. 다행히 여기는 땅을 파고 들어갈 수 있구나. 아주 안락해.”
“들어봐. 나는 지금 8층장 니오프론이라는 녀석과 싸우고 있어.”
“끄엑. 8층장이라고? 그러면 이 푸르가토리움의 모든 죄수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뜻이잖아. 왜 그런 무시무시한 죄수랑 싸울 때 하필 나를 부른 거야.”
“당연히 너 말고는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싸움이니까.”
뚠의 수염이 쫑긋 움직였다.
도저히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수인병단의 올쿠레 아저씨나 얼음 마도병인 디멜이 아니고 나를? 왜에?”
“여기는 꿈의 신이 만들어낸 꿈속 세계거든.”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뚠의 불안감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확실히 구현력이 엄청 뛰어나서 처음엔 몰랐는데…… 분명히 꿈속 세계가 맞아.”
“그래서 네 도움이 절실해, 뚠. 네가 가진 스킬 중에서 ‘달콤한 잠꼬대’라는 스킬이 있는데 대체 이걸 어떻게 사용하는지 감이 오질…….”
우지끄으은!
느닷없이 관중석의 벤치들이 전자레인지 속의 팝콘처럼 솟구쳐 올랐다.
“젠장. 뭐지? 포크레인?”
텅빈 경기장이라 생각하고 이곳까지 대피해 온 것이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던 모양이다.
거대한 집게를 양팔에 단 포크레인 로봇이 캐터필러를 굴리면서 우리를 향해 돌진해 왔다.
체구만을 놓고 봤을 땐 5층에서 소환했던 변신로봇 제트카이저를 뛰어넘을 만큼 박력이 넘쳤다.
“이블버스터란 이름이었던가?”
내 기억에 의하면 저 녀석은 ⟨스틸 앤드 소울⟩의 히든 보스였다.
말도 안 되는 체력과 방어력, 그리고 까다로운 패턴을 가진 녀석이다.
나를 포착한 이상 완전히 박살 나기 전엔 결코 추적을 멈추지 않을 거다.
“물러서 있어, 뚠.”
소모전으로 가게 되면 내 쪽의 손해다.
단 한 번의 맹공으로 치명타를 입혀서 궤멸시켜야…….
“내가 한번 해보면 안 될까?”
그때였다.
뚠이 마운드 위에 굴러다니던 평범한 야구공 하나를 집어 들더니 물었다.
조금 전까지 왜 자길 끌고 왔느냐며 벌벌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네가? 쟤를?”
“응.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 번 맡겨 봐.”
너무 위풍당당한 말투에 그만 나도 모르게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이블버스터는 관중석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후 펜스를 넘어오고 있었다.
3루 앞에서 마운드를 향해 돌진하는 살육로봇이 점점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나는 뚠의 동작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은 야구를 모른다.
그래서 야구공을 들고 투수처럼 집어던지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뚠은 작은 앞발 두 개로 야구공을 들어 올린 후에 입김을 한 번 불어넣었을 뿐이었다.
“후우우욱. 가서 싸워. 그리고 이겨.”
곧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곧 이블버스터에 가깝게 거대해진 야구공이 경기장 전체에 지진을 일으키며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해진 건가? 아니야. 한순간에 그냥 커졌어.’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뚠의 손에서 벗어난 순간 야구공은 엄청난 질량을 가진 포탄으로 변해 뛰쳐나간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앙!
갑자기 뿅하고 나타난 거대 야구공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이블버스터가 두 개의 기계팔을 내밀며 버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야구공의 표면이 울룩불룩해지더니 네 개의 말단을 뽑아냈다. 그 형상은 누가 보더라도 초거대형 ‘두더지토인’이었다.
강철도 우그러뜨릴 수 있는 위협적인 집게가 거대 두더지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하지만 두더지는 짤막한 앞발로 당수를 내리쳐 단박에 기계팔을 분쇄해 버렸다.
“뭐어? 저게 얼마나 단단한 녀석인데 저렇게?”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이블버스터가 아무리 용을 써도 거대 두더지는 신화 속의 맹수처럼 가뿐하게 녀석을 작신작신 밟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우.
살육로봇의 신체 파열음이 마치 죽어가는 짐승의 단말마처럼 들려서 안쓰러워질 지경이었다.
“어때?”
뚠 아티르가 마운드 위에서 두 손바닥, 아니 두 앞발을 탁탁 털었다.
마치 까다로운 4번 타자를 기가 막힌 삼진으로 잡아내 버린 투수처럼.
“어떻게 한 거야, 뚠?”
“뭘 했기는. 가서, 이기라고 말했지.”
“그저 그것만으로 저런 기적을 발휘했단 말이야?”
이 사이버펑크 배경의 세계는 내 중력마법조차 무위로 만들 만큼 강력한 법칙에 지배되고 있었다.
즉, 강력한 용사인 나조차도 고생할 수밖에 없는 난이도의 세계인데.
잠꾸러기 두더지 토인은 입김 한 방으로 전세를 확 바꿔버린 것이다.
“슈바인. 그 8층장이 이 세계 어딘가에 숨어있다고 했지?”
“으, 으응.”
“잡으러 가자. 땅속을 뒤져서 사냥감을 찾는 건 두더지를 따라올 자가 없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