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나만의 절대영역 (2)
마왕성의 문을 잘라냈을 때,
나를 환영해준 것은 그곳에 있어선 안 될 어떤 ‘문명’이었다.
[비켜서십시오, 보행자여. 운행에 방해가 됩니다.]
바퀴 없이 비행하는 에어카가 나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우와앗!”
당황하긴 했으나 에어카의 속도가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경공술을 펼쳐 에어카의 차체를 여유롭게 뛰어넘었다.
착지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니 온갖 네온사인으로 떡칠이 된 초고층 빌딩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홀로그램 전광판들 사이로 수백 대의 에어카가 활보 중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이?”
몰락한 중세 배경의 마왕성을 나오자 사이버펑크 테마의 미래도시가 튀어나왔다.
이토록 폭력적인 이질감이라니.
최대한 침착해보려 애쓰는 와중에 길가에 운집한 푸드트럭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서 핫도그를 굽고 있던 소녀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거기 멋지게 생긴 오빠!”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소녀는 왼쪽 팔을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였다. 어쩌면 안드로이드일지도 모른다.
잠깐. 안드로이드라고?
“인공육 핫도그가 단돈 400만 원이야, 오빠! 한번 맛보면 헤어 나올 수 없을걸?”
사이보그 소녀가 내게 핫도그를 내밀었다.
홀린 듯이 그것을 받아 들자 지금껏 보아온 상태창과는 색상과 폰트가 전혀 다른 상태창이 떠올랐다.
[섭취 시 3분 동안 이동속도가 20% 오릅니다.]
[SMG의 발사 속도가 10% 저하됩니다.]
SMG라면 서브머신건의 약어일 텐데 가진 거라곤 냉병기인 검밖에 없는 내게 왜 이런 메시지가 뜨는 걸까?
“오빠. 설마 가진 돈 없어? 무전취식 하면 곤란해.”
“아, 미안해. 핫도그는 돌려줄게. 대신에 뭘 좀 물어봐도 될까.”
“뭔데?”
“니오프론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
“흐음. 금시초문인데. 새로 데뷔한 밴드 이름인가? 그렇다면 내가 못 들어봤을 리는 없는데.”
이 세계는 여전히 니오프론이 만들어낸 꿈속일 터였다.
그런데도 사이보그 소녀는 이 이름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 도시는 이름이 뭐지?”
“네오 서울이잖아. 오빠, 설마 약쟁이야? 그럼 빨리 사라져줘. 여긴 약쟁이들 노리고 잠복한 바운티 헌터들이 돌아다니는 구역이니까.”
“네오 서울? 바운티 헌터?”
그제야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증거는 차고도 넘쳤다. 다만, 디아보로스가 봉인돼 있던 마왕성과 너무 갭이 커서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스틸 앤드 소울(Steel And Soul)⟩이구나.”
알파테스터로 클리어했던 게임 중에서 명징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레트로 사이버펑크 풍의 슈팅액션 게임이었다.
플레이어는 부패한 거대기업이 장악한 미래도시를 배경으로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 인간들의 의뢰를 해결해주는 바운티 헌터였다.
“니오프론. 이 자식 아주 고약한 무대를 깔아놓았네.”
[블러디크라운]의 최종보스는 디아보로스라는 대마왕이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스틸 앤드 소울⟩에서 플레이어가 물리쳐야 하는 끝판왕은…….
“꺄악! 쌍룡테크의 로봇군단이다!”
“모두 도망쳐! 바이러스에 걸린 녀석들이야. 걸리면 죽는다!”
……분명 저런 이름을 갖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푸드트럭의 지붕들을 짓밟으며 아머드슈트에 탑승한 안드로이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무려 서른 기가 넘었다.
붉은 용이 그려진 살육 로봇 군단. 본래 이 게임을 만들어낸 디자이너들이 최종 개조를 끝낸 대전차포로만 없앨 수 있는 적대 NPC들이었다.
[일급 수배 대상 발견. 대응 방식은 발견 즉시 사살.]
로봇들의 타원형 머리에 부착된 외눈박이 렌즈가 불길한 적색으로 빛났다.
[집행합니다.]
로봇의 어깨와 복부에서 장갑판이 열리더니 무식하게 큰 포신이 불꽃을 내뿜었다.
타타타타타타타!
“젠장!”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원거리 공격에 대응할 때 가장 안전한 방식을 택한 것이 실수였다.
중력 마법인 그래비티 쉴드를 펼쳐 총알을 튕겨내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중세 판타지 배경이었다면 먹혔을 방식이 미래도시의 세계관에선 무시당했던 것이다.
피육!
“끄윽!”
총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파천황의 스킬인 [만전불패의 체술]이 아니었다면 두개골이 깨져 핫도그를 굽는 불판에 내 뇌수가 쏟아졌을 것이다.
“이건 정당방위다, 미친 로봇들아.”
선두에 있던 로봇에 달려들어 기원검을 박아넣었다.
콰지지직!
묵직하고 날카로운 타격감이 손끝에 전달되었다. 지금의 난 단순한 물리력으로도 로봇 군단을 고철덩이로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네놈들한테라도 화풀이해야겠다.”
기원검에 검기를 불어넣자 로봇 군단들은 수수깡 인형처럼 무참하게 썰려 나갔다.
서른 기 전부를 행동 불능으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20여 초에 불과했다.
이 게임을 클리어했을 때만 해도 이 녀석들은 약점인 관절 사이의 케이블을 관통시켜야 했기에 지극히 까다로웠던 걸 생각하면 박수를 받을 만한 성적이다.
하지만 박수를 쳐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이보그 소녀 또한 진작에 달아난 뒤였다.
“어디 있냐, 니오프론!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내가 빽하고 고함을 지르자 응답이 돌아왔다.
대신에 내가 기대했던 방식의 응답은 아니었다.
온갖 마천루의 꼭대기에서 서치라이트가 발사되어 나를 비춘 것이다.
[도시에 심각한 위협 포착!]
[데프콘 3 발령됩니다.]
고층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며 육중한 전투기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목표물이 무엇인지는 두말하면 잔소리.
“일단 여기는 장소가 좋지 않아.”
탁 트인 광장에서 초전자포를 내뿜는 전투기들을 상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일단 시야에 닿는 고가도로와 홀로그램 전광판들을 뛰어넘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즈우우우우우웅!
나를 추격해오는 전투기들이 초고열의 맹공을 퍼부으며 뒤를 쫓았다. 초전자포의 궤적에 있던 에어카들이 썰려 나가며 그 안에 탑승하고 있던 안드로이드 승객들을 마구 바닥에 떨구어냈다.
와장창창!
일단 다급한 대로 가까운 빌딩의 창문을 부수며 내부에 진입했다.
“디아보로스는 마왕성 바깥까지 나를 쫓아오진 않았어.”
그 법칙이 맞다면 전투기들이 스테이지가 아닌 건물 내부까지 들어오진 않을 거란 계산이 있었다.
“여긴 또 뭐 이리 넓어?”
사무실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안드로이드들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짓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려 수백을 넘어서는 로봇의 눈.
녀석들 전부가 똑같은 생김새에 동일한 유니폼을 입고 있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느낌을 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너희들도 주어진 대사가 있냐?”
별 기대 없이 물어본 것이지만 예상을 깨부수는 답변이 돌아왔다.
[데프콘 3 발동을 인식합니다. 도시의 침입자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젠장.
잊고 있었다. ⟨스틸 앤드 소울⟩의 파이널 스테이지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그것은 악당 세력인 쌍룡테크라는 대기업이 도시 전체를 살인 바이러스로 점령해 등장하는 모든 NPC들이 플레이어에게 덤벼들도록 만드는 악랄한 스테이지였다.
그리고 NPC 안드로이드들은 자폭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자폭장치 가동.]
[3.2.1.]
사무실에 앉아 있는 모든 안드로이드의 흉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꽈아아아아아앙!
나는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어 아론다이트와 디아볼릭, 그리고 한동안 쓰지 않았던 현무패웅검까지 꺼내어 정면에 세웠다.
압도적인 폭열로부터 간신히 나를 지켜낼 수 있었으나 불길한 진동이 건물 전체에 이어졌다.
건물의 1층에 이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면 결코 멀쩡할 수 없다.
물론 이 세계가 정말 게임 속이었다면 그런 물리적인 현상쯤이야 무시하고 넘어갔겠지만, 니오프론의 꿈속 세계는 이런 면에선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옛날부터 사이버펑크가 싫었다고!”
그렇게 건물 몇 채를 더 부수면서 나는 자연스레 그 어떤 로봇도 머무르지 않는 공간을 찾아 헤맸다.
다행히 도시의 외곽에 버려진 폐건물들이 있었다.
총격전으로 불타버린 내벽을 보아하니 이곳 역시 플레이어가 거쳐 간 스테이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몇 분간 쫓아오는 녀석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비로소 현재의 상태를 점검할 여유가 생겼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다.
*
- 슈바인 스트링거: 얘들아. 들려?
- 제르비어스 폰타인: 뭐야, 살아 있는 거냐? 니오프론을 물리쳤구나!
- 아스티나 류: 아닌 것 같은데? 기감이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걸.
- 슈바인 스트링거: 그 자식이 나를 꿈속 세계에 방치해둔 채 사라졌어. 너희가 보는 바깥 상황이 어떤지 좀 알려줘.
- 토니아: 니오프론이 마지막으로 악기를 튕긴 뒤에 정육면체의 불투명한 결계가 세워졌어. 아마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게 만든 것 같아.
- 캉이: 형아 냄새가 아직 안에서 나고 있어. 그리고 그 층장 아저씨의 냄새도 마찬가지야.
- 제르비어스 폰타인: 냄새가 난다고? 내 폭렬마법으로도 내부를 들여다볼 수가 없는데? 정녕 너의 코는 불가사의하…….
- 아스티나 류: 그만! 지금 상황에 집중해. 슈바인. 그 안에서 시간의 흐름은 동일하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 슈바인 스트링거: 내가 녀석과 갇힌지 대략 두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 기분이야. 맞아?
- 아스티나 류: 얼추 비슷해. 그동안 우리는 바깥에서 이 정육면체를 뚫어보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어.
- 토니아: 그리고 이 배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해. 그건 니오프론이 이 배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야. 분명히 네가 있는 꿈속 세계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 캉이: 형아. 혼자서 괜찮아? 우리도 다 같이 들여보내 주면 안 돼? 같이 싸우면 방법이 생길 수도 있잖아.
- 슈바인 스트링거: 그건 너무 위험부담이 커. 광룡 메르킨에게 내가 당해서 그 용이 만들어낸 가짜세계에서 오랫동안 헤매면서 느낀 거야. 이런 류의 함정은 혼자가 편해.
- 아스티나 류: 그렇다고 우리더러 천년만년 멍하니 기다리라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걸.
- 슈바인 스트링거: 으음. 그 점은 미안해. 여유가 생길 때마다 이렇게 텔레파시를 할 테니까 항상 귀를 열어 둬. 혹시 모르니까 결계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진 말고. 나는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볼게.
- 제르비어스 폰타인: 뭔가 비책이 있는 거냐? 네 놈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믿는 구석이 있는 느낌인데.
- 슈바인 스트링거: 하여간 눈치 빠른 녀석. 맞아. 이 배에 뛰어들 때부터 생각해둔 카드가 하나 있어.
- 제르비어스 폰타인: 그게 뭐냐? 그걸 알려줘야 우리도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 슈바인 스트링거: 니오프론은 몽현의 신이야.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꿈에 관해서 대단한 경지와 성취를 이룩한 존재로 대응해야겠지. 다행히 나를 도와줄 죄수가 한 명 있어.
- 제르비어스 폰타인: 이해가 안 되는데, 용사야. 다른 친구들은 몰라도 나만큼은 너와 1층 화룡도에서부터 함께 올라온 몸. 네가 지금껏 감옥에서 사귄 친구들은 전부 나도 알고 있잖냐. 하지만 그중에서 꿈에 관한 초능력을 갖고 있는 죄수는 없었는데.
- 슈바인 스트링거: 마왕. 꿈은 언제 꾸는 거야?
- 제르비어스 폰타인: 나를 바보로 아는 거냐. 당연히 잠에 빠져들 때…… 어라?
- 슈바인 스트링거: 그래. 꿈을 꾸려면 일단 잠을 자야지.
- 아스티나 류: 왜 말을 하다 말고 멈춰. 뭔데 그래?
- 캉이: 맞아! 왜 형아들끼리 웃는 건데?
- 슈바인 스트링거: 제르비어스는 방금 내 비장의 카드가 누구인지 떠올린 거야. 나는 잠에 관해서라면 전 우주에서 내로라할만한 녀석을 친구로 두고 있거든. 어느 정도냐면 잠을 처자다가 소환빔을 맞고 이 감옥에 끌려올 정도로 대책 없는 녀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