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나만의 절대영역 (1)
우르르르르릉!
장엄하기 그지없는 왕성의 천장과 벽면이 잘려 나간 볏단처럼 허물어졌다.
기원검은 다행히도 내 의지에 맞춰 검기를 방출해낼 수 있었다.
아직 완전체가 아님에도 용사전용검인 아론다이트를 훨씬 웃도는 위력이었다.
“어떻게 한 거지요?”
처음으로 니오프론의 가짜 웃음이 옅어졌다.
그림에 자부심이 있는 화가가 자신의 캔버스에 떨어진 얼룩진 물방울 하나에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은 분명 인간일 텐데?”
어떻게 몽현의 신인 자신의 꿈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느냐는 질문.
나는 니오프론이 악기의 현을 과장스럽게 튕기는 것이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흉내 내 요란하게 기원검을 휘두른 다음 바닥에 꽂았다.
“물론 나는 신이 아니지. 그러니까 너의 절대영역을 정면으로 박살 낼 방법은 없어. 하지만 ‘뒤트는 건’ 가능해.”
검기를 쓸 수 있다는 건 확인했다.
그렇다면 아론다이트로 할 수 있는 걸 기원검으로 못하리란 법이 없다.
나는 자세를 낮춘 후 전심전력으로 기원검을 집어던졌다.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서 있는 니오프론을 향해.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오식 비천신검(飛天神劍)]
성검이 아니라 신의 검의 비행.
그러니 비천신검.
한층 더 강력해진 스킬은 궤적에 있는 모든 지형지물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며 공간을 찢어내었다.
‘젠장. 놓쳤다.’
여러 번 이 스킬을 사용하면서 내게는 일종의 ‘손맛’이라는 감각이 생겼는데, 바로 목표물에 적중했을 때 생기는 미묘한 파동을 읽어낼 수 있는 육감 같은 거였다.
그것이 이번에 오질 않았다.
“어디지?”
“여기입니다.”
니오프론은 멀찍이 떨어진 스테인드글라스 창틀에 앉아 있었다.
마치 내 공격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죄송하지만 아무리 거창한 기술 이름을 만들어내셔도 제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째서 인간들은 시답잖은 호칭을 자신의 몸동작에 덧붙이는 걸까요.”
“계속해 봐.”
“그냥 싸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꼭 요란하게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도 마찬가지지요. 흐음. 아마 그런 식으로 운율을 붙여야 기술을 기억해낼 수 있을 만큼 아둔한 두뇌를 갖고 있어서일까요?”
“하하하하.”
“……뭐가 우습죠? 슈바인 스트링거.”
“너는 피했어. 조금 전 신탁파의 죄수들이 협공을 펼쳤을 때는 우직하게 두들겨 맞아줬으면서 방금의 내 공격은 피했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 많아진 거 아니냐?”
“저는 원래 말이 많습니다만.”
“나한테는 하나의 가설이 있었거든. 너의 반응이 방금 그걸 완벽하게 입증해줬다. 고마울 지경이야.”
내가 갖고 있었던 어떤 의문.
그것은 미래를 완벽하게 내다보는 여신 달리아를 만나고 나서 생긴 것이었다.
달리아는 감옥에서 알게 된 톱니바퀴의 여신 벨리오나를 끔찍하게 아꼈다.
타천의 강가에 자신을 던지려던 것을 막아 세워준 친구이자, 그 누구도 가까이 오지 않던 인간 시절을 보상해줄 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벨리오나의 죽음을 막지 않았어.’
물론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예언이 절대 빗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벨리오나가 설공의 손에 죽을 거라는 것도 그저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 생각해본다면 달리아 자신이 니오프론에게 신탁을 내린 대가로 죽어야만, 그리고 벨리오나가 그 복수를 하겠다며 기원검에 집착을 가져야만 자신이 본 미래가 완성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미래란 무엇일까.
기원검의 정당한 소유자로 인정받은 한 죄수가 마지막 조각을 가지고 있는 층장 니오프론의 절대영역 속에 뛰어드는 ‘지금’인 것이다.
“궁금하겠지? 신도 아니고 평범한 인간인 내가 어째서 네 절대영역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지. 그건 이 기원검이 완전체가 되려는 과정을 네가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야.”
기원검 네메시스는 뒤틀린 신이 다른 아홉 신을 징벌하기 위해 빚어낸 신물.
그 일부를 가진 자들을 상대로 시험을 내리기도 한다.
처음 그것을 확인했던 것은 5층장 크로톤의 체내에 숨어들어 갔을 때였다.
거신병 제트카이저로 거인 크로톤의 육체를 봉쇄하고 크로톤의 본체를 향해 징그러운 몸속 탐험을 하던 중 녀석은 우리를 막아서기 위해 영혼들을 잔뜩 소환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기원검의 조각들이 서로를 찾기 시작했고 영혼들은 물러났다.
‘비록 그때는 정확한 작동방식을 몰랐다만.’
아마도 그것이 뒤틀린 신이 펼쳐낸 절대영역이었을 것이다.
크로톤이 아무리 강고한 영혼들을 흡수해 비대해진 강적이었다고는 하나 뒤틀린 신의 신력 행사를 방해할 순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니오프론에게도 유효했다.
“진퇴양난이 되었군요. 흐음.”
니오프론이 품에서 기원검의 마지막 조각을 꺼내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사실 저에게는 그다지 필요도 없는 잡동사니이거늘.”
“그럼 돌려주지 그래?”
미약한 기대를 품고 물어보았으나 니오프론은 다시 조각을 갈무리해 넣을 뿐이었다.
그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물론 이걸 당신께 넘겨드리면 제 꿈에 훼방을 놓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달리아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제가 푸르가토나투스를 죽여 누구도 탈옥할 수 없는 ‘미래’를 스스로 쟁취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변하지 않는 행동양식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니오프론과 나는 닮은 구석이 있다. 정해진 미래 따위 없다며 전력으로 거부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니오프론은 꿈으로서 그것을 덮으려 하고 나는 검으로 잘라내려 한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럼 내 검에 닿지 않도록 어디 한 번 도망 다녀 보시지.”
단 한 번의 발돋움으로 나는 음속 돌파를 이뤄냈다.
기원검으로 니오프론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쾅! 콰아아앙!
검이 닿는 곳마다 무참한 파괴가 일어났다. 하지만 니오프론은 언제나 한발 먼저 사라졌다.
그저 움직이겠다 마음먹는 것만으로 순간이동이나 다름없는 회피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무식한 술래잡기가 계속될 수는 없다.
니오프론과 달리 내 쪽에는 체력과 마력의 한계라는 것이 있으니까.
녀석이 공격을 인식하기 전에 뭔가 속임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쯤,
니오프론이 백기를 들었다.
“일단 이렇게는 안 되겠군요. 잠깐 쉬겠습니다.”
나는 급격하게 돌진을 멈췄다.
녀석이 하는 말의 진의를 잠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싸움을 멈추자고?”
“아, 제 말을 오해하셨군요. 당신 말고 저만 쉬겠다는 겁니다. 그 꺼림직한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는 동안 제 꿈에서 마음껏 허우적대 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니오프론은 현을 튕겼고 이내 깔끔하게 사라졌다.
근방에서 녀석의 기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대신에 이전에는 없었던 강력한 기운이 불타는 옥좌로부터 솟아나기 시작했다.
“설마? 농담하는 거야?”
갑옷 사이로 흘러나오는 홍염.
상대를 박살 내는 철검. 저주받은 마법 방패.
대마왕 디아보로스가 나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한 최종보스의 모습 그대로.
“어리석은 용사여. 무저갱에 거하던 마왕의 안식을 방해한 대가는…….”
까아아앙!
디아보로스의 머리가 투구째로 찌그러지며 회랑 구석에 처박혔다.
만약 이 디아보로스라는 녀석이 내가 플레이했던 [블러디크라운]의 설정에 충실한 녀석이라면 대사를 다 들어준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서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디아보로스의 마지막 대사는 아마도 ‘절망에 발버둥 치며 죽어가라!’는 것이었다.
발버둥이었는지 몸부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요한 건 대사가 아니고 그다음에 실행되는 패턴이다.
이 녀석은 즉사기를 쓴다.
그것도 쿨타임이 없는 즉사기를 극히 짧은 시전 동작만으로 난사한단 말이다.
“미안한데, 지금 난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반칙을 써서 미안.”
알파 테스터로 VR 머신을 착용했을 땐 진짜 죽을 일이 없으니 침착하게 놈의 패턴을 농락할 수 있었으나 지금이라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수야 없다.
그런데,
“어리석은 용사여. 무저갱에 거하던…….”
다시 한번 옥좌에서 디아보로스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마치 기계처럼 정해진 대사를 읊으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검기를 끌어올린 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삼식 살신참(殺神斬)]
대마왕과 옥좌를 한꺼번에 쳐부숴 버렸다.
리젠 스팟을 완전히 없애버렸으니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겠지, 빌어먹을.
하지만 내 오산이었다.
“마왕의 안식을 방해한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아니하니. 윤허 받지 않은 옥좌를 탐한 자여. 절망에…….”
“뭐야? 어디야?”
이번엔 저 멀리 부서진 돌무더기 밑에서 디아보로스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게 무슨 두더지 게임이냐?”
나는 황급히 녀석을 향해 돌진했지만, 녀석이 돌무더기에서 몸을 일으키느라 반응이 늦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대사를 듣고야 말았다.
“……몸부림치며 죽어가라!”
젠장.
발버둥 아니고 몸부림이 맞았구나,
따위의 잡생각을 하며 나는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즈어어어어어엉!
그저 평범한 수평 베기의 동작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닿고 지나가는 모든 것을 소멸시켜버리는 참격이 뒤통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니오프론, 이 비겁한 새끼!”
설마 신격에 오른 죄수가,
그것도 자신이 구축한 완벽한 홈그라운드에서,
꽁무니를 뺀 채 달아날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층장이란 놈이 도망을 시전해?”
지금까지 내가 상대한 적들은 자신의 강력한 힘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후퇴를 곧 굴욕이라 생각하는 멋이 있었다.
“다시 보니 그놈들이 선녀였어.”
설마 골제나 용왕 같은 악당들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단은 눈앞의 적을 해치워야 한다.
하지만…….
즈어어어어엉!
미친 듯이 날아오는 즉사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혹시나 싶어 자이언트 쉴드로 막아보려 했으나 즉사기는 그것마저도 뚫고 들어왔다.
방어 불가라는 게임 속 기믹과 정확히 일치했다.
갑자기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나라고 도망 못 칠 것 같냐?”
니오프론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으니 내 쪽에서도 그렇게 해줄 의리 따윈 없는 거다.
설마 8층까지 올라와서 이 스킬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만.
[친구 캉이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땅굴파기 Lv. 3]
나는 회랑의 지면을 뚫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디아보로스는 어디까지나 마왕성 꼭대기에 기거한 보스 몬스터다.
플레이어가 대마왕의 칼에 죽거나 게임 종료로 달아나면 잠자코 다시 도전할 때까지 그 장소에서 기다린다.
예상대로였다.
대도서관의 바닥에 떨어지자 더는 디아보로스의 중얼거림이 들려오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즉사기 또한 쫓아오는 일이 없었다.
“술래잡기를 해보자 이거지?”
나는 지체 없이 마왕성의 복도를 달려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블러디크라운]의 진행 순서를 거꾸로 짚어 내려가듯이.
“잡히면 너는 진짜 뒈졌다.”
그리고 마왕성의 문을 기원검으로 깔끔하게 잘라냈을 때,
니오프론이 준비한 진짜 함정과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