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몽현의 신 (5)
지금까지 이 감옥에서 숱한 강자와 대면했다.
몇몇은 등반을 함께 하는 동료가 되었고 몇몇은 패배를 인정하도록 만들었으며, 몇몇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과 검을 맞댔던 시점에서 나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특히 거인 크로톤이나 용왕 게브라둠을 떠올리면 여전히 등골이 오싹하다.
지금 시점에서 다시 붙는다 해도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단 한 번도 꺾어야 하는 상대보다 물리적으로 강했던 적이 없다.
지금 마주 선 니오프론을 제외하면 말이다.
“정말로 혼자서 덤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다른 친구들은 나설 필요 없어. 너는 내 손으로 끝장내줄 테니까.”
다시 한번 니오프론의 상태창을 살펴본다.
[이름: 니오프론]
[종족: 인간], [클래스: 반신(半神)]
[HP: 20], [MP: 0], [근력: 10], [민첩: 5]
저 스탯을 직면했을 때 예상했어야 했다.
게임 캐릭터의 몸으로 푸르가토리움에 처음 잡혀들어와 스탯을 몽땅 빼앗겼을 때의 나보다도 형편없이 약한 몸.
아마 칼질 한 방만 제대로 먹인다면 그대로 승부가 끝날 거다. 문제는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에 있다.
‘게임으로 치면 기믹형 보스다.’
숨겨진 공략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형태의 보스.
특정 아이템으로 때려야만 피해를 줄 수 있다거나, 스테이지에 존재하는 퍼즐을 먼저 해제해야 실체를 드러낼 수 있다거나 하는 유형.
“저는 당신과 같은 자들이 때론 부럽습니다.”
“나와 같은 자들이라니?”
“뇌신 지드, 무사 설공. 그리고 슈바인 스트링거. 강자와 싸워 이김으로써 자신을 단련시키려는 자들 말입니다. 기술을 연마하고 깨달음으로 벽을 돌파하려는 욕망이 가득한 자들.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호승심.”
말을 이어나가는 니오프론의 눈동자가 점점 색채를 잃어갔다.
“애초에 저에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사나 싸움꾼이 아닌 학자의 성정에 가까우니까요. 제가 지금의 힘을 얻게 된 이래로 덤벼오는 자들을 맞부딪히며 쾌감을 느꼈던 적은 없습니다.”
“나도 그다지 전투광은 아니야. 필요하니까 싸우고 강해져야 하니까 훈련할 뿐이야. 강한 적과 맞붙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유형은 아니거든.”
그것은 게임 속 알파 테스터로 살았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의 시스템을 통찰하는 안목과 타고난 피지컬로 어째서 프로게이머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여러 게임의 테스터로 활동하는 게 아니라 단 한 게임의 마스터가 되어 상금을 쓸어모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난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장애를 가진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게임을 했던 이유가 즐거움이나 향상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말을 오해하고 계시군요, 슈바인 스트링거. 당신은 두들겨 맞거나 상대에게 칼을 쑤셔 넣을 때 쾌락을 느끼는 유형은 분명 아니지요. 하지만 지금처럼 강해짐으로써 동료들을 더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 것에 위안을 느끼지 않나요?”
“……그건 부인하기 어렵군.”
“제 관점에선 그것 또한 즐거움에 속한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기실 생존 본능을 가진 절대다수의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너에겐 생존 본능이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모릅니다.”
“뭐?”
“없다기보다는 모른다고 해야지요. 한 번도 생존에 대한 위협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가 이 푸르가토리움에 입소한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다쳐본 적도, 질병에 걸려본 적도 없습니다.”
“언제나 꿈속에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도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요. 당신은 혹시 0층 대기실의 교도관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나태에 짓눌린 쥐.”
세상만사 모든 것이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던 녀석이었다. 억울하게 붙잡혀 왔다는 내 항의를 대할 때도 ‘귀찮으니 소멸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또라이.
“그 녀석 이야기는 갑자기 왜?”
“그 교도관은 저를 처음 보는 순간 미약한 호기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처음으로 죄수가 난동을 피웠을 때 자신이 그를 제압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궁금증이 생긴 제가 물었습니다. 만약 대기실에서 난동을 피우면 어쩌겠느냐고요.”
분하지만 그 쥐새끼 녀석의 대답이 궁금했다.
대체 뭐라고 했을까.
그래서 니오프론이 바라는 걸 알았지만 질문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녀석이 뭐랬는데?”
“교도관의 책무고 뭐고 도망칠 거라고 하시더군요. 확실하게 꺾을 자신이 없는 적과 싸우는 건 귀찮다고요.”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만성피로에 휩싸여 있는 그 교도관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 순간에 저는 줄곧 저를 괴롭히던 의문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어쩌면 그 어떤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아닐까 싶어 살짝 낙담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너보다 더욱 의욕이 없는 놈을 보고 기운을 차린 건가?”
“정확히 말씀드리면 제가 그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요. 만약 제가 교도관이었다면 같은 상황에서 분명 도망치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이 장악하는 공간에서 도주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 그때 제 안에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깨달았지요.”
“지배욕이군.”
“그렇습니다.”
“이제 슬슬 궁금해지려고 하는데. 싸움 자체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면서 왜 나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누려는 거지? 죽이려는 상대를 눈앞에 두고 인생 고백이라도 하려는 거야?”
“하하하. 재미있는 지적이군요. 확실히 당신은 무력 싸움에서 쾌락을 느끼는 편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말싸움에선 설공 못지않은 전투광일 거라 확신합니다.”
자꾸 아픈 곳을 찌르는군.
니오프론이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제가 있는 8층의 교도관인 숭배를 강탈하는 십자가, 그 분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모든 교도관이 당신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르팔타커스 시온을 잇는 수왕 후보이기 때문이라지요.”
“그렇다고들 하더군.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사이좋은 교도관들이 그닥 많지 않아서 유감이야.”
“그래서 저는 교도관에게 물었습니다. 그 등반죄수를 이기면 제가 수왕이 되는 것이냐고. 어이없게도 아니라더군요. 저는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든 층장을 굴복시키고 올라와야만 죄수들의 왕이 될 수 있다니 말이지요.”
“그래서 내가 올라온 길을 거꾸로 밟아서 내려가겠다는 거냐?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그런 이유라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존재가 느끼는 즐거움을 많이 빼앗겼으니, 그 정도는 누려도 괜찮겠지요.”
“안타깝지만 너는 수왕이 되지 못할 거다. 지금 여기서 죽을 테니까.”
니오프론이 차분하게 현을 튕겼다.
“지금, 여기라니.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시는 게 어떨까요.”
세계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
아스티나와 설공의 싸움에 십만대산을 소환했던 것처럼,
니오프론은 나를 위한 무대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내게 있어 아주 익숙한 곳.
단 한 번 스쳐 지나갔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무대.
“어떻게 여길?”
천장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 솟아 있는 찬란한 고성의 회랑.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미 멸망에 다다른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눈앞에는 불타는 옥좌가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어때요. 마음에 드십니까?”
감옥에서 스쳐 지나온 장소는 아니었다. 그 어떤 층에서도 이런 광경은 볼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인간으로 살아온 무대의 지구에서 존재하는 장소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가상 세계에 가깝다.
내가 클리어한 마지막 게임인 ⟨블러디 크라운⟩의 파이널 스테이지였다.
이곳에서 나는 마왕 디아보로스를 노 대미지로 클리어했고 그날 밤에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 오게 된다.
“보통 제가 무대로 끌어오는 곳은 죄수가 가장 마지막으로 싸웠던 전쟁터지요. 그래서 설공에게는 십만대산의 설원이었던 거고. 당신은 아마 이곳에서 강적을 쓰러트린 모양입니다. 승리의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겠지요?”
“그래. 내가 승리한 장소에서 거꾸로 패배시킴으로써 즐거움을 찾겠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자, 준비가 되셨다면 언제든…….”
콰아아아아아앙!
니오프론의 다음 말은 까랑까랑한 폭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니오프론이 있던 지반에 거대한 구멍이 났다. 불타는 옥좌가 그 구멍 밑으로 참담하게 떨어져 내렸다.
천마회풍일섬.
신속함과 파괴력을 갖춘 절기였다.
잠시 후 니오프론은 전혀 해를 입지 않은 모습으로 구멍에서 떠올랐다.
“젠장. 역시 멀쩡하네.”
“지금껏 제가 말하는 도중 기습하는 죄수가 단 한 명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미리 방비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요. 그냥 안 먹힌 겁니다. 여기는 제가 꾸는 꿈속이니까요. 방금 그게 최강의 수였습니까? 비장의 수가 몇 개는 더 있을 것 같은데요.”
“맞아. 그냥 준비동작이 가장 적으니까 기습용으로 꺼낸 카드였을 뿐이지.”
파괴력이 담긴 절기라면 아수라대멸겁, 살신참, 비천성검 같은 스킬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미련 없이 아론다이트를 인벤토리에 도로 집어넣었다.
“허어?”
그것은 예상치 못했는지 니오프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어떻게 나오려는지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설마 단 한 번의 일격으로 포기한 건 아닐 테고. 무슨 생각입니까?”
“가장 빠른 공격도 안 먹힌다면 다른 걸 써먹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네 허약한 체력을 생각하면 강공을 퍼붓는 건 의미가 없겠더군.”
인벤토리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전투용으로 사용해본 적이 없는 검을 꺼내 들었다.
끄트머리가 조각나 있는 검을.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애병이군요.”
양손으로 붙잡은 기원검 네메시스를 보자 니오프론의 눈초리가 조금 가늘어졌다.
“하지만 완성되지도 않은 그 검으로 제대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완성되지 않았지. 마지막 한 조각을 네가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 선택이 실수였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니오프론.”
기원검의 검신이 강렬한 빛을 내뿜어 회랑 전체를 밝게 비추었다.
그리고 그 빛은 니오프론의 품속에서도 마찬가지로 터져 나왔다.
녀석이 설공을 통해 여신 벨리오나에게서 빼앗은 기원검의 파편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뒤틀린 신이 약동하기 시작합니다. 기원검 네메시스가 최후의 파편을 발견하고 의식을 거행하려 합니다.]
[네메시스가 파편을 강제로 흡수하려 합니다.]
[기원검의 파편 소유자의 격이 정식으로 소유권한을 가진 슈바인 스트링거의 그것을 훨씬 웃돌고 있습니다.]
[강제 흡수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파편을 가진 자가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기원검은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격을 가진 니오프론에게 그것은 먹히지 않았다.
“제게서 기원검을 빼앗은 뒤 무기로 삼을 생각이셨나요.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하셨습니까, 슈바인 스트링거?”
“누가 뜻대로 되지 않았대? 전부 내 계획대로다.”
기원검 네메시스가 완전체가 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 목적은 네메시스를 일깨우는 것 자체에 있었다.
“진짜 승부를 시작해보자고, 몽현의 신.”
내가 기원검을 휘두르자,
왕성이 한순간에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