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몽현의 신 (4)
맹독을 품은 눈보라.
부패의 권능으로 타오르는 불꽃.
황금 포탄을 토해내는 포격.
우주의 자연법칙과 견고한 상식들이 이 강가 위에서 모조리 ‘타천’하고 있었다.
“죽어라, 니오프론!”
“협공을 하십시다. 아무리 층장이라 하더라도 이 많은 숫자와 전면전을 펼칠 수는 없소이다!”
니오프론이 자신에게 대항하는 신탁파 죄수의 머리를 날려버리자 곧바로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눈앞에서 동료가 참살당해도 신격 죄수들은 일말의 미동도 없이 힘을 끌어올렸다. 약속이나 한 듯 일사불란한 동작이었다.
“그래서야 제 옷자락 하나 건드리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좀 더 품격있는 발악을 해주실 수는 없나요.”
만약 내게 날아온다면 과연 무사히 막아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파멸의 절기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니오프론은 춤을 추듯 신들의 포위 공격을 피해냈다. 손에는 여전히 악기를 품은 채.
‘저런 압도적 회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해?’
무공의 보법이라 하기엔 사전 동작이 없다.
마법이라 일컫기엔 마나의 흐름이 요동치지 않는다.
니오프론은 마치 ‘우주의 시작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당연하게 모든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맹독을 품은 눈보라는 한 방울도 니오프론의 옷자락에 닿지 못했다.
부패의 권능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그의 발걸음에 질식했다.
황금 포탄을 토해내는 포격은 절묘하게 빗나갔다.
무적의 방어와 회피를 자랑하던 골제 바르한이 떠올랐다.
골제의 시간 조정술이 자신이 공격당하는 시간 위에 다른 시간을 덧칠하는 방식이었다면, 니오프론은 이 배 위에 모든 현상이 그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도록 조정하는 듯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싸움의 여파도 만만치 않았다.
용체화를 꺼낸 제르비어스와 여우화를 마친 캉이가 육탄전으로 그것을 때우고 있었다.
배후에서 쉴드를 쳐주는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낭패를 봤을 것이다.
토니아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달아난다면 지금 아니야, 슈바인?”
“아니. 어디로도 달아나지 않아. 이 배를 탈출하는 데 힘을 낭비하는 건 무의미해. 차라리 똑바로 이곳에 서서 저 녀석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지켜보는 게 나아.”
“층장이 패배할지도 모르잖아. 숫자에서 저렇게나 차이가 나는걸?”
페어리 퀸의 물음에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과연 그럴까.”
“크로톤도 그랬어. 자신의 성을 지키는 거인들을 언제나 견제했지. 숫자가 과하게 넘치거나 너무 강한 거인들이 입소하면 위협을 느끼고 제거했거든.”
“그거야 크로톤은 분명 무시무시할 만큼 강한 녀석이었지만 신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강한 무인이나 무사라 하더라도 동급의 적 두 자릿수를 상대해야 한다면 승산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
하지만 ‘신들의 힘겨루기’엔 그 당연한 이치가 통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 숫자가 더 많으냐는 상관이 없어. 결국에는 자신의 법칙을 상대에게 강요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되거든.”
“네 말대로라면 아무도 니오프론의 법칙을 깨트릴 수 없다는 거야?”
“이건 층장 니오프론이 문제를 제출하는 퍼즐 싸움이야. 단 한 명과 싸우든, 만 명을 상대하든 본질은 같아. 그 퍼즐을 풀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
만약 신탁파의 죄수 중 단 한 명이라도 그 퍼즐을 풀어내는 것에 실마리를 발견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들에게 희망은 없어 보였다.
니오프론은 유희를 즐기듯 가까이 접근하는 죄수를 다양한 방식으로 살해했다.
개중엔 자기 발에 꼬여 넘어진 뒤 동료가 들고 있던 무기에 꿰뚫려 죽는 죄수도 있었다.
아마 본래 가진 능력이었다면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실수.
그것은 니오프론의 손아귀에 의해 조율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보통의 장수는 아군 전체를 지휘한다.
집단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데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장수는 뛰어난 장군의 자질이 있다.
하지만 니오프론은 아군을 넘어선 적군, 더 나아가서는 전장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와 공기의 흐름까지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장수보다는 지휘자에 가깝다.
무척 까다로운 악보를 강요하는 지휘자.
“절반쯤 당했군. 이제야 알겠어. 저 죄수들은 니오프론과 싸우면 이런 식의 결과가 나온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왜 무모한 저항을 하기로 한 거지?”
“니오프론이 자신이 살아 있는 한 그 누구도 다음 층에 올려보내지 않겠다는 선언했으니까.”
지금까지 기나긴 세월을 니오프론이 꺼내든 예언만 믿고 모여든 죄수들이다.
그것이 사실 거짓 속임수였다는 걸 깨닫자 행동에 나선 거다.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면 바로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설공과 우투릴리가 같은 날 퇴장했다. 그 일말의 빈틈을 노린 거겠지만 니오프론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어쩌면 애초에 설공이나 우투릴리 또한 니오프론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자 한 명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
“싱겁군요. 어쩌다 이리도 약해졌습니까. 신탁파라는 허명에 속아 헛된 꿈만 꾸었던 게 아닌가요?”
니오프론은 마지막까지 저항한 죄수의 가슴팍을 짓밟고 있었다.
신화 속의 제우스를 연상시키는 육중한 덩치에 조각 같은 근육을 가진 죄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지가 잘려 나간 채 꿈틀거리는 굴욕을 당하고 있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요. 이 감옥에서 제가 꿈꾸는 천년 왕국에 여러분의 자리는 없을 겁니다.”
“사, 살려다오. 차라리 타천의 강물에 나를 던져서…….”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 되어 연명하겠다는 겁니까? 그럴 수야 없지요. 당신들의 목숨 하나하나가 저에겐 이 감옥에서 제가 살아나갈 수 있는 소중한 입장권인걸요.”
도로롱.
니오프론이 거침없이 현을 튕기자 검은 끈들이 마지막 남은 죄수의 육체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식사를 마친 뱀처럼 니오프론이 혀를 날름거렸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 끝에는 방어진을 치고 있던 나와 친구들이 있었다.
“아십니까? 방금 일어난 작은 소란 덕분에 제 형량은 무려 2만 7천 년이 늘어났습니다.”
형량이 까마득하게 늘어난 것에 기뻐하는 죄수. 그것 자체로 기괴하기 그지없는 성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형량이 전부 끝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대?”
“당연히 그 전에 이런 ‘포식’을 거행해야겠지요. 이 감옥에는 언제나 새로운 죄수들이 입소합니다.”
“신격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게 그렇게 숫자가 많지는 않을 텐데. 한 세계당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르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지.”
“오호. 제법 그럴듯한 지적이군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지 뭡니까.”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니오프론의 능글거리는 웃음을 보아하니 ‘생각지도 못했을’ 리가 없다. 분명 그 상황에 대해서도 계획을 짜둔 거다.
“……이 8층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군.”
“슈바인 스트링거. 사실은 당신이 제게 어떤 영감을 주었거든요.”
“내가?”
“6층과 7층 사이에 있었던 공층전 말입니다. 저도 교도관을 통해 자초지종을 들었거든요. 층의 경계를 돌파해서 자라나는 세계수라니.”
니오프론의 손가락이 내 가슴을 가리켰다.
위그드라실에게서 피어난 꽃 베르단디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니오프론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직감한 거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꽃 말입니다. 그것을 재료로 삼는다면 세계수를 이 8층에 다시 피워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예요. 다행히 모든 생명과 문명은 강가에서 발원되지요. 이 타천의 강가도 예외는 아닙니다.”
“타천의 강물을 자양분 삼아서…… 세계수를 만들겠다? 그걸로 뭘 하려는지는 뻔하겠네.”
“눈치가 빨라서 좋군요. 당신이 푸르가토나투스만 아니었더라면 설공 대신에 제 심부름꾼으로 무척 탐났을 거예요.”
“네 심부름꾼 따위, 당연히 거절한다.”
“그런가요. 쓸쓸하군요. 혼자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청소도 직접 해야 하잖아요. 이렇게.”
주변 풍광이 원래대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 감옥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죄수들이 사활을 걸고 만들어낸 전장의 흔적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릴 지켜보던 신탁파의 죄수들이 무대에서 퇴장했다는 것뿐이다.
“너는 아래층으로 내려갈 것도 염두에 두는 거로군.”
“말했다시피 저는 꿈의 신입니다. 많은 이들이 꿈을 꾸는 데는 에너지가 들지 않는다고 오해하지만, 사실이 아니지요. 겨울잠을 자는 곰이라고 해서 숨을 쉬지 않는 건 아니니까.”
아스티나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흠칫 놀랐다.
그녀가 자신이 이해한 바가 맞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참담하게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맞아. 저 녀석은 형량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푸르가토리움의 모든 층을 뒤져서라도 죄수들을 ‘살해’할 거야.”
죄수 살해죄의 존재.
감옥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을 최소한의 법칙이 이런 탐식의 괴물을 만들고야 만 것이다.
“슈바인 스트링거. 저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1층에서부터 올라온 당신 같은 등반죄수가 아니었더라면 제 계획은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니까요. 당신은 제 심부름꾼 따위 거절한다고 했지만…… 이미 완벽하게 심부름해주셨지 않습니까. 푸르가토나투스도, 세계수의 씨앗을 품은 꽃도 가져다 주었으니까.”
“마음껏 착각해라. 어디 내 눈앞에 쓰러진 다음 층장의 열쇠를 잃어버리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하하하. 저는 당신 같은 등반죄수들의 용기가 언제나 좋다니까요. 질리지 않아.”
아스티나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넌 여기에서 죽을 거다! 절대로 삼월초원까지 네 놈을 내려보낼 수는 없으니까.”
“저야 좋지요. 그럼 아스티나 류. 당신부터 덤비는 건가요? 물론 한꺼번에 싸우셔도 상관없지만, 여러분을 전멸시키고 나면 한동안 오락거리가 없을 테니 그건 피해달라고 당부드리고 싶군요.”
나는 발끈하려는 아스티나의 앞을 막아섰다.
“기다려, 아스티나. 흥분할 필요 없어. 저 녀석과 맞서는 건 나 혼자가 될 거니까.”
“뭐? 방금 신격 죄수들이 맥도 못 추고 전멸하는 거 못 본 거야?”
“그러니까 더더욱 숫자로 밀어붙이는 건 의미가 없지.”
“지금 복수하는 거지? 너희를 놔두고 나 혼자 설공과 싸우러 왔다고 이러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그런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내가 니오프론에게 도전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누군가를 지켜줄 자신이 없어서 그래. 그러니 협공은 좋은 생각이 아니야. 나 혼자 싸울게.”
아스티나보다 조금 더 나와 오래 함께 한 제르비어스가 뭔가를 눈치챘다.
“음흉한 용사 놈아. 계획이 있는 거냐? 아무리 너라고 해도 저런 괴물을 사냥할 방법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저 녀석은 모든 걸 꿈으로 만드는 몽현의 신이야.”
계획이라.
솔직히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계획이라고 거창하게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꿈속에서 자꾸 깨어나려고 하니 지는 거라고 생각해.”
상식을 주무르는 신의 앞에서 상식처럼 싸워서야 되겠는가.
나는 아론다이트를 꺼내 갑판에 부딪히며 말했다.
“나는 꿈속에서 꿈을 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