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몽현의 신 (3)
“우리 셋을 다 죽이겠다고 말했지?”
“그렇습니다. 달리아는 영악한 친구였군요. 그런 식으로 저를 기만할 수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어요. 예언에 관한 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제약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판단을 그르쳤습니다.”
오랫동안 굳게 믿어온 진실이 거짓으로 판명된 순간 인간이라면 좌절하고 무너지게 돼 있다.
하지만 니오프론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격변도 읽어낼 수 없었다.
분노가 드러나지 않도록 갈무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과장 섞인 표정 연기로 덧칠하고 있을 뿐 애초에 드러낼 만한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예상보다 태평해 보이네. 작은 울분이라도 터트릴 줄 알았거든.”
“흐음, 달리아를 탓해서야 아무런 득이 없겠지요.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니까요. 제가 직접 손을 쓴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제 손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고.”
캉이가 여우화를 시전해 꼬리로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니오프론이 ‘정황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를 말하는 시점에서 환수의 예민한 감각이 살기를 느꼈다는 소리다.
한 걸음 더 내딛는 니오프론.
“혹여 이 배 위에서 달아날 생각이라면 접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강가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더는 회유책 따위 쓰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아스티나가 내게 속삭였다.
“느꼈어?”
“응. 지금 막. 뭔가 결계 같은 것을 쳐둔 건가.”
“7층에서 맞닥뜨린 뇌룡 간다르바를 기억해? 그 용이 펼친 결계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나. 내 힘으론 엄두도 못 내겠어.”
“골제의 힘을 다 쓰지 않았더라면?”
“그걸 포함해서 계산한 거야.”
이미 상대가 편 올무에 단단히 걸렸다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문제가 단순해진 거다.
“도망칠 생각은 없다, 니오프론. 널 죽이고 층장의 열쇠를 강탈할 거니까.”
“자신만만하시군요. 제 절대영역 안에서 그렇게 오만을 부린 자는 없었습니다. 설공조차 말이지요.”
“설공이 누구더라? 아하, 방금 아스티나가 목을 잘라내 버린 녀석의 이름이 그런 거였지?”
“아픈 곳을 찌르는군요.”
“싸우기 전에 한 가지만 묻자. 너는 8층에서 탈옥을 위해 뭉친 세 부류 중 신탁파의 우두머리잖아. 그걸 위해서 푸르가토나투스를 손에 넣으려 했던 걸로 아는데. 아니었어?”
니오프론이 자기 악기를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렸다.
아마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는 듯했다.
“뭐, 말해줘도 상관없겠지요. 당연히 제가 바라는 건 탈옥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탈옥이 아니라면 왜…….?”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요. 저는 푸르가토리움에서 단 한 명의 죄수도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물론 저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지요.”
“어째서?”
도로로롱.
악기의 현 위에서 니오프론의 섬세한 손가락이 춤을 추었다.
그러자 갑판 위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후드드득.
고풍스러운 목재로 만들어진 마스트와 난간에서 나무줄기가 뻗어 올랐다. 고작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는 짧은 시간에 울창한 삼림이 소환된 것이다.
끝 간 데 없이 뻗던 가지에선 하얀색 꽃잎이 수려하게 피어났다.
“꿈의 신으로 태어난다는 건 말이지요. 그렇게 추천해 드릴만한 운명은 아닙니다, 슈바인 스트링거.”
니오프론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엔 하얀 꽃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예언에 속박되어 평생을 기구하게 살았던 달리아나 저나 마찬가지였지요. 그야말로 닮은 꼴입니다.”
“이 감옥에 붙잡혀오기 전에 무슨 일을 벌였지?”
“보시다시피 저는 그저 의지를 품는 것만으로 한 세계를 구축할 수도, 붕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있던 행성의 선민종족의 꿈에 기대어 살아왔지요.”
어떤 신격은 민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타 집단을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지성체들은 반드시 수면 중에 꿈이란 것을 꾸게 되어 있다.
욕망과 지성.
이 두 가지만 있다면 니오프론의 소환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불멸하지 않았다.
“인간을 비롯한 선민종족들은 꿈을 꾸는 동안 온갖 것을 갈망합니다. 제 신격은 그것을 먹고 자라났지요. 그러나 그들이 꿈에서 깨어나 버리는 순간 이후에는 제 통제를 벗어나 버리지요.”
그 어떤 꿈도 영원히 이어지진 않는다.
아무리 강렬한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깨고 나면 아스라히 휘발되어 버린다.
“그래서 저는 방문자들을 제 절대영역 속에 가둬버렸습니다. 출입문은 거대하게 만들고 탈출구는 없애버린 거지요.”
나무에서 떨어진 꽃잎들이 갑자기 소용돌이를 만나 하늘을 향해 휘몰아쳤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저마다 하나로 뭉쳐 어떤 형상을 만들어냈다.
날개가 달린 수백 마리의 유니콘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꿈에서 깨지 못했겠지. 모든 생명체는 먹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쾌한 일이 벌어졌을 수밖에.”
꿈을 꾸는 모든 존재의 식물인간화.
지성이 있는 선민종족들의 유래없는 멸종.
그것이 니오프론이 본래 있던 세계에서 저지른 악행이었다.
“하나만 정정해드리자면 멸종을 시킨 건 아니랍니다. 물론, 시간만 더 있었다면 가능했을 거예요. 하나뿐인 가족이, 사랑하는 연인이, 전투를 함께 한 병사가 잠이 든 뒤 깨어나지 않는 일이 반복되자 인간들은 악착같이 버텼겠지요.”
키득거리는 웃음이 니오프론의 입가에 걸렸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때 아이들이 참지 못하고 터트리는 웃음.
그러자 수백 마리 유니콘의 뿔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끔찍하고도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시시각각 다음 순간 벌어질 일을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기적의 연속에 우리는 모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잠은 죽음의 가장 가까운 형제이며 동전의 양면이지요. 깨어날 수 없는 잠은 곧 죽음과 동의어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 오게 되었답니다.”
니오프론이 자신의 양손을 들어 보이며 수갑을 애석하게 노려보았다.
수갑 위에 떨어지는 붉은 빗방울.
혈우(血雨).
그것이 하늘을 가득 채우며 느린 속도로 떨어졌다.
“타천의 강가에 거하는 많은 신격 죄수들이 박탈당한 자유에 몸부림쳐 왔습니다. 그 어떤 강고한 존재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저는 아니었습니다. 불멸의 감옥을 만들려다 붙잡혀 온 죄수에게는 자신의 왕국과도 같은 곳에 당도한 셈이니까요.”
감옥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죄수의 운신을 제약하고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유에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저 불멸만을 꿈꾸는 자가 존재한다면?
감옥이 감옥이 아니게 될 테지.
“푸르가토리움은 제게 천혜의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죄수들은 모두 달아날 곳 없는 방문자들. 그 어떤 저주에도 아랑곳없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꿈의 장소.”
아스티나가 쉴드를 펼쳐 빗방울을 막아내고 있었다.
혹시나 생길 불상사를 대비하면서.
그러나 니오프론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일장연설에 취해 있었다.
“네, 꿈의 신이 드디어 꿈꾸던 곳을 만나게 된 겁니다.”
비단과도 같은 재질의 옷을 입고 있던 니오프론의 머리카락과 의복이 혈우에 물들어갔다.
피의 비가 바닥에서 뭉쳐 하나의 강줄기를 이루었다.
그것은 니오프론을 향해 의지가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나아갔다.
응축되며 모여든 붉은 액체들은 곧 니오프론의 악기에 빨려 들어가 낯익은 문양이 되었다.
똬리를 튼 붉은 뱀.
아주 많은 문명권에서 원죄를 상징하는 짐승.
“제가 탈옥해 무엇하겠습니까. 기껏해야 저를 존속시키는 지성체들이 꿈을 꾸는 동안만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절망을 반복할 텐데요.”
“그래서 이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썩겠다고?”
“그 말엔 어폐가 있군요. 신격은 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봉마연옥 또한 무너질 일은 없습니다. 저는 언제까지고 푸르가토리움의 최고층을 통치하는 황제로 남는 겁니다.”
불멸의 왕국을 통치하는 영생자.
그것이 니오프론이 추구하는 바였다.
“그래서 탈옥자를 막는 건가?”
“저는 이 타천의 강가를 사랑합니다. 그러니 아무도 이 위로 올려보낼 수 없지요. 푸르가토리움의 최고층은 이 8층이 되어야 합니다.”
“열쇠를 넘겨준다는 건 애초에 거짓말이었군.”
“음? 그건 아닙니다. 제가 왜 당신을 속이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데요.”
“……열쇠를 넘기자마자 날 죽일 셈이었구나.”
“하핫! 정답입니다.”
그때였다.
유독 니오프론의 마술과도 같은 장악력에 불안해하고 있던 토니아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들?”
“지금까지 지켜만 보고 있던 다른 죄수들 말이야.”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하지만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니오프론과 우리의 사이에 강력한 기운을 내뿜는 죄수들이 나타났다.
아스티나와 설공의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에도 요지부동으로 관중석을 지키던 신격 죄수들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한 발짝 물러났다.
지금까지 그들의 존재감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은 온전히 상대 쪽에서 힘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용사야. 분위기가 이상한데?”
“뭐가?”
“쟤네. 우리가 아니라 층장을 노려보고 있잖아.”
제르비어스의 말은 옳았다.
갑판 위에 갑자기 난입한 수십 명의 죄수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안중에도 없다는 듯.
“층장이시여. 방금 꺼내신 말을 진담으로 들어도 되겠소이까?”
근육질의 몸에 독수리의 얼굴을 한 죄수가 성큼성큼 니오프론의 정면까지 걸어갔다.
“물론이지요.”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닐 거라 믿소이다. 그토록 기나긴 시간 동안 우리 전부를 속이고 있었다는 거 아니오!”
활화산 같은 분노가 죄수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채채채챙!
죄수들의 손에 무지막지한 병장기가 소환되었다.
하나하나가 아론다이트 못지않은 신화급 무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니오프론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쿠데타라도 꿈꾸시는 건가요?”
“당신은 우리와의 약속을 어겼소!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죄라는 걸 모르시겠소이까?”
“절 죽일 순 있고요?”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가 미간을 찡그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격 죄수들이 내뿜는 살기가 갑판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층장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호위무사 설공은 방금 전투 중에 사망했소이다. 게다가 삼인자였던 우투릴리마저 기척이 사라졌지.”
“너는 양 팔이 잘려 나간 거다!”
“이 빌어먹을 놈. 언제까지 그렇게 기고만장해 있을 텐가!”
격노한 죄수들이 니오프론의 주변을 몇 겹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무기라고도 할 수 없는 비파형 악기를 든 니오프론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니오프론의 생존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겠지만…….
이상하게도 동정이 가는 쪽은 포위진을 펼친 죄수들 측이었다.
“설공이 제 오른팔이라고요? 우투릴리가 이 배의 삼인자라고요? 대체 누가 그런답니까.”
따랑!
단 한 번이었다.
손가락으로 조금 강하게 현을 튕긴 니오프론의 돌발 행동에 선두에 서 있던 죄수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졌다.
퍼어어엉!
아니, 폭죽처럼이 아니다.
독수리의 형태를 하고 있던 머리의 두개골이 박살 나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요란한 색종이였다.
병장기를 든 죄수들이 흠칫 놀라며 저마다의 간격으로 물러섰다.
형형색색의 색종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가운데 니오프론이 그중 하나를 잡아챘다.
“명심하십시오. 이 배에 이인자가 삼인자 따위는 원래 없었답니다.”
그러자 색종이는 촛불에 닿은 것처럼 화르륵 타오르더니 이내 사라졌다.
“저를 제외한 모두가 버러지일 뿐.”
몽현의 신은 그렇게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