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몽현의 신 (2)
십만대산이 허물어졌다.
오래전 그곳을 호령했던 경천동지할 무인의 죽음과 함께. 나는 눈을 재차 비빈 다음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확인했다.
분명 설공의 목은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이겼다아아아!”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니오프론이 악기를 튕겼다.
어느새 설산의 풍경과 시체들, 녹이 슨 병장기들을 완전히 사라지고 거대한 원형 갑판과 투기장만이 남았다.
아스티나는 그 중앙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스티나.”
“꿈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친구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어서 가 보십시오.”
“……뭔가 이상한 수를 쓰는 건 아니겠지?”
“저는 꿈의 신이지, 사기꾼의 신이 아닙니다. 이렇게 절 경계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스티나 류는 죽어갈 텐데요.”
니오프론은 정말로 날 막아설 생각 따위 없어 보였다. 순순히 나를 보내줄 심산인 것이다.
난간을 박살 내며 튀어 나갔다.
흙 위에 쓰러진 아스티나를 향해. 그런데 희끄덩한 무언가가 내 앞을 막아섰다.
파아아아앙!
푹신하고도 하얀 벽에 튕겨 나갔다. 내가 그것을 치워버리지 않은 것은 방해자가 내게 아주 익숙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캉이?”
“토니아 누나가 형아 좀 진정하래. 그렇게 튀어오면 안정에 좋지 않다고.”
“언제 올라온 거야, 아무 일 없었어?”
“……응. 우린 괜찮아.”
캉이의 어조에서 일말의 망설임이 느껴졌지만 캐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의와 진리의 여신이라는 우투릴리라는 죄수는 강력해 보였는데, 모두 무사히 도착한 걸 보니 어찌어찌 격파한 모양이었다.
캉이가 꼬리를 내리니 천마와 마녀, 그리고 제르비어스가 아스티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스티나의 가슴이 빛나고 있는 걸 봐선 토니아가 요정술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설공의 묵검이 아스티나의 좌측 복부에 깊이 박혀 있었고, 토니아가 그 위에서 진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상처가 진행되는 건 막았어. 하지만 전혀 회복되질 않아.”
그것에 답한 것은 마녀 일레인 쿠디슈.
“정령의 가호가 여기까지 닿지 못해서일 거다. 이 공간의 지배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제자야. 내 딸을 살릴 방법이 있느냐?”
“네, 걱정 마세요.”
나는 일순간의 고민도 없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엘릭서를 꺼내어 뚜껑을 딴 순간, 아스티나의 창백한 손이 올라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거 몇 개나 남았어? 함부로 썼다간…….”
“걱정하지 마. 넘칠 정도로 많이 남았으니깐.”
고작 두 개가 남은 엘릭서 중 하나를 꺼낸 것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간 아스티나가 무슨 고집을 부릴지 알 수 없었다.
제르비어스가 설공의 묵검을 단단히 붙잡았다.
“보지 않아도 이게 마검인 건 알겠다. 내가 당길 테니 상처에 들이부어. 그게 복용보다 효과가 빠르지 않겠나.”
“알았어. 캉이야. 이걸 아스티나의 입에 물려줘.”
“응.”
캉이가 청룡패웅검의 칼자루를 아스티나의 입에 재갈처럼 물리자마자 제르비어스가 재빠르게 설공의 검을 제거했다.
“으으으읍!”
엘릭서를 들이부으니 다행히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뱉고는 잠시 가쁜 숨을 내뱉었다. 엘릭서의 효과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며 고통 또한 순식간에 잠재운다.
그러니 저 반응은 심리적인 것일 터였다.
천마가 아스티나의 곁에 무릎을 꿇고 흐뭇하게 내려다봤다.
“장하다, 딸아. 이 아비가 결국에 못다 한 한을 네가 풀어주었구나.”
“아빠.”
반면 마녀가 다가온 것은 딸이 아니라 내 쪽이었다.
“좀 전엔 경황이 없어서 네가 말하는 대로 일단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일단락된 것 같으니 설명해주지 않으련?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마녀는 어째서 함께 붙어있어야 할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는지, 아스티나가 홀로 적진에 쳐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니 마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가 널 속이고 고집을 부린 거구나. 하여간 그놈의 결자해지. 못된 건 지 아비를 쏙 빼닮았지.”
“무슨 소리요, 여보. 고집을 꺾지 않는 성미는 나보다는 당신 쪽을…….”
“시끄러워요.”
“네.”
영체로 소환된 두 부부가 가볍게 서로의 탓을 하는 동안 둘 사이에서 나온 딸은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부러 나와 시선을 섞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아스티나.”
“…….”
“고개 들어봐. 혼자 뛰쳐나간 거 이해해. 내가 너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겠지만, 친구끼리 꼭 같은 사고방식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겠어?”
“나는 일방적으로 네게 절교 선언을 했잖아. 그런데도 아직 날 친구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내가 돌아갈 곳은 너야’라고 말했던 게 누구였더라?”
“……시끄러워.”
입을 쑥 빼고 중얼거리는 아스티나의 목소리가 어머니의 그것을 쏙 빼닮은 것에 모두가 파안대소했다.
[아스티나 류가 다시 용사의 친구목록에 합류했습니다.]
[아스티나 류의 스킬 무극파천공과 중력 마법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귓속말과 순간이동의 권능 또한 해금됩니다.]
제르비어스가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용사야. 설마 저 8층장과 약속한 대로 아스티나를 여기 두고 올라가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야 없지. 나는 그 약속에 동의한 기억이 없어. 아스티나를 억지로 끌고서라도 9층까지 올라갈 거다.”
우리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참월의 마녀였다.
“제자야. 들어보거라. 결국 저 니오프론이라는 고강한 죄수에 맞서 열쇠를 쟁취하겠다는 것 아니니?”
“맞아요, 스승님.”
“그렇다면 부디 조심하거라. 내 딸과 설공이 싸웠던 장소와 지금 이 배 위는 서로 중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니오프론은 아주 간단한 손짓만으로 입자의 구성물질을 전부 바꿔버렸어. 그건 결계도 아니고 눈속임도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아니, 아직 너는 모르고 있다. 그렇게 공간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자라면 아스티나의 상처 또한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었을 거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녀의 말은 분명 생각지 못했던 지점이었다. 하지만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니오프론은 일부러 아스티나가 설공의 검에 피 흘리도록 방치한 것이다.
충분히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되돌릴 힘이 있음에도.
“그러니 저자를 믿을 수 없는 거다. 내 딸을 곁에 두려고 한다고 해서 그게 뭔가를 보장한다는 의미는…….”
진지한 당부를 늘어놓던 마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엔 점멸 마법인 워핑을 쓴 것인가 착각했으나 아니었다. 탐지할 수 있는 반경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천마 류운학의 모습도 마찬가지.
내가 파천황의 권능으로 소환한 두 영체가 마치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없어진 것이다.
[권능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가 수신방해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수신방해라.
여지껏 단 한 번도 파천황의 권능이 행사되는 동안 다른 누군가의 알력이 끼어들었던 적은 없었다.
고강한 죄수인 설공이나 크로톤마저도 파천황의 권능을 봉쇄하거나 격파하진 못했다.
“조금 소란스러워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이 층에 있어야 할 자격이 없는 분들은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잘 모셨습니다.”
그것을 처음으로 이룩한 죄수가 검투장에 내려섰다.
8층장 니오프론.
그가 싱긋 웃으며 우릴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자, 모두가 바라던 대로의 결과를 얻은 것 아닙니까? 그토록 바라던 9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경쾌하고 산뜻한 말투.
연극적인 몸짓과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침묵이 우리를 감싸고 돌았다.
아스티나 마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다시 청룡패웅검을 붙잡을 정도였다.
“슈바인.”
“안 들을 거야. 너는 지금 발언권이 없어.”
“그래도. 이길 수 있겠어? 차라리 원하는 걸 들어주고…….”
“너를 넘겨주면? 저 자식이 무릉도원을 차려주고 거기서 백년해로라도 해줄 것 같아? 너와 설공의 싸움을 보면서 든 의혹이 지금 확신으로 바뀌었어. 저 녀석은 단순히 널 붙잡아두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아스티나가 설공을 가까스로 격파하는데 성공했지만, 기적에 가까운 대역전극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는 몇 번이나 아스티나가 설공의 검에 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그런데도 저 녀석은 싱글벙글 웃기만 했어. 마치 둘 중에 어느 누가 죽더라도 자기는 별 상관이 없다는 듯이.”
나는 아론다이트를 들어 다가오는 니오프론을 향해 겨누었다.
“워후, 저런. 9층으로 가는 열쇠가 필요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래. 미안하지만 아스티나는 나와 함께 이 감옥을 벗어날 거다. 너에게 넘겨주진 않겠어.”
“제게는 벨리오나가 갖고 있던 기원검의 마지막 조각도 있습니다만. 그것까지 당신에게 드린다면?”
“처음 말했던 대로 내 신조는 변하지 않아. 어떤 대가를 얹어 주더라도 그런 타협은 없어.”
“흐흠. 그거 유감스러운 일이로군요. 굳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결말을 걷어차는 건 필멸자들의 유구한 특성인가요?”
나는 니오프론의 능글거리는 입가를 짓뭉개주고 싶었다.
다행히 말 몇 마디만으로도 그건 실행할 수 있었다.
“사과의 의미로 네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데.”
“그게 뭐지요?”
“나는 탄식의 폭포에서 여신 달리아를 만났어. 그녀는 네게 푸르가토나투스를 곁에 둔 자가 탈옥을 할 수 있다고 예언했지. 하지만 거기엔 속임수가 있었어.”
니오프론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입가의 미소 또한 사라져있었다.
“계속해 보시죠.”
“푸르가토나투스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야. 한 명이 아니라는 거지. 여기에 있는 나와 캉이를 포함한 세 명을 가리키는 말이었어. 너는 거기에 속아서 아스티나만을 노렸던 거고.”
“…….”
“어때? 네가 왜 푸르가토나투스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을 달성하려면 아스티나 혼자만 데리고 있어선 신통치 않을걸. 그런데도 나를 다음 층으로 순순히 보내줄 수 있겠어?”
니오프론이 천천히 악기의 헤드 부분을 쓸어내렸다.
내 말이 단순한 도발인지, 아니면 신빙성이 있는 말인지 따져보는 듯했다.
교도관에게 무슨 언질이라도 들은 것인지,
아니면 절대영역 안에 있는 존재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니오프론은 곧 내 말을 수긍했다.
“그렇군요. 푸르가토나투스는 세 명이었군요.”
용사의 육체가 본능적인 경고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배후에서 암기가 날아오거나 위험한 맹수와 직면했을 때 느끼는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하지만 암기도, 맹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니오프론의 태도가 조금 바뀐 것에 불과했다.
“한 명만 죽이면 될 줄 알았는데. 결국 셋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거군요.”
단순히 인간이 내뿜는 살기에 비교할 게 아니었다.
이 절대영역 전체가 내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누군가는 슬픈 결말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