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몽현의 신 (1)
“잘 있었느냐, 딸아.”
“마음 같아선 칠주야 동안 회포를 풀고 싶으나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하는구나.”
천마와 마녀가 아스티나에게 다가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것이 오랜 그리움 때문인지, 아니면 아드레날린의 분비로 모른 척하고 있던 전투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정말 아빠랑 엄마야?”
위태로울 정도로 눌러 담고 있던 애틋한 그리움이 수문을 개방한 댐처럼 마음속에서 출렁였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 녀석이 부른 거죠?”
이 대결을 지켜보고 있는 슈바인 스트링거가 가진 파천황의 권능. 그 중에선 다른 층에서 사귄 친구들을 영체로 소환하는 힘이 포함돼 있었다.
본래 한 명만 가능했으나 마지막 층간 구역에서 그 제한마저 사라졌다.
천마가 싱긋 웃었다.
“그래. 처음엔 느닷없이 육체로부터 빠져나와 이곳에 불려와서 깜짝 놀랐느니라. 전조도 없는 우화등선인 줄 알고 놀랐지 뭐냐.”
“하지만 이건…….”
마녀가 아스티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물론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홀로그램처럼 투사된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스티나는 어머니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네 신념은 들었다, 아스티나. 아끼는 친구들을 휘말리게 하지 않으려고 혼자서 복수의 길을 걷는 것은 고결한 일이지.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이 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남편과 내 본체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거야.”
천마가 반대쪽 어깨를 짚고 섰다.
“게다가 이 복수는 엄밀히 말하면 이 아비의 것이었느니라. 참관할 자격으로 부족하진 않을 터. 설공의 무학에 대해서 이 아비는 감옥 전체를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집착을 하고 있으니.”
“공격에 대비해라, 아스티나. 마법사로서 네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똑똑히 지켜보겠다.”
과하게 차분한 태도 때문일까, 아스티나의 흥분 또한 잦아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영체는 이 전투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나뭇가지 하나 부러트릴 수 없기 때문에.
반면 설공이 천마나 마녀에게 해를 끼칠 방법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곁에 있긴 하지만 둘은 링 밖에서 권투 선수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세컨드로 소환된 것이다.
설공의 전신에서 다시금 맹호와 같은 기파가 솟구쳐 올랐다.
“아해야. 그것이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던 비장의 한 수인가. 소환 술법의 일종인 것 같다만……. 본좌가 보기엔 그저 허깨비에 불과하지 않은가.”
설공이 오르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록 100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으나 상대의 경지를 생각하면 지척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비장의 한 수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철커덕.
아스티나의 투구와 갑옷이 접혀 들어가며 작은 방패 형태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피에 젖은 회색 무복이 겨울바람에 펄럭였다.
마녀의 걱정이 이어졌다.
“그건 보구에 가까운 갑옷이지 않니. 맨몸으로 싸우는 건 위험해.”
“아니오, 여보. 훌륭한 선택이오. 어차피 설공의 공격을 전부 막아낼 수 있는 갑옷이란 존재하지 않소. 차라리 운신의 폭을 넓히고 기동력을 높이는 게 명안이오.”
일말의 망설임은 사라졌다.
아스티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한 정신으로 상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달라진 기세를 설공이 모를 리 없었다. 그의 검 끝 역시 흔들림 없이 아스티나의 신형을 겨누고 있었다.
꽈아아앙!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스티나의 신형이 질주했다.
연속 워핑으로 중간 지점을 사뿐하게 도약하면서 가속에 더욱 불이 붙었다.
싸움이 벌어진 이래 선공을 펼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갑옷을 벗었을 때의 속도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채애애앵!
아스티나와 설공이 십자 모양으로 검을 맞대자 일대의 지반이 주저앉고 초목들이 썰려 나갔다.
붉은 실선이 아스티나의 볼에 그려졌다. 그러더니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설공의 이마에서 또한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주 잠깐이나마 아스티나는 설공에게 동일한 영역에서의 싸움을 강제했던 것이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겠다는 각오에 찬사를 보내지.”
설공의 손가락이 절묘하게 움직였다. 칼자루를 놓지 않은 채 마치 팔목 아랫부분만 춤을 추듯 유연해졌다.
순간 아스티나의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며 상대의 간격으로 빨려 들어가게 됐다.
아스티나의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든 건 두 영체의 외침이었다.
“구음백골조다(九陰白骨爪)! 당하면 전신에 구멍이 뚫리고 말아.”
“상대의 리듬에 장단을 맞춰라, 아스티나. 흥분하지만 않는다면 워핑은 모든 공격을 흘릴 수 있어.”
벼락처럼 튀어나온 설공의 다섯 손가락이 아스티나의 흉부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것에 대응하는 아스티나의 점멸 회피는 완벽했다. 지켜보는 천마와 마녀가 순간 호흡하는 것을 잊을 만큼.
게다가 아스티나의 점멸은 회피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거리를 벌리는 순간 설공의 앞에 정교한 중력 균열을 일으켰던 것이다.
“……!”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설공은 출수를 거두고 날아올랐다.
하지만 상공에는 이미 거대한 마법진이 완성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유성우와 같은 그래비티 스피어가 쏟아져 내렸다.
접근전인 것처럼 속여 시선을 빼앗고,
적으로 하여금 준비해 둔 함정으로 스스로 뛰어들게 만든 것이다.
콰과과과과광!
설공은 전방위 중력 폭발에 휩싸여 잠시 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기특하다, 아스티나. 정말 뛰어난 마법사가 되었구나. 나조차 그 정도의 마법진은 만들기 힘든데.”
“무슨 소리요. 저게 다 보법과 내가심법이라는 기초에서 다져진 거 아니요. 마법진은 거들 뿐이었지.”
“두 분, 경고예요. 여기에서 싸우실 거면 입 다물고 계세요.”
아스티나의 주변에 둥둥 떠 있던 천마와 마녀는 무안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어차피 오래가지 못했다.
쩌저적!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검기에 잘려 나가며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박살 났다.
이번엔 설공이 반격할 차례였다.
“온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기 위해 아스티나는 가진 모든 수를 쏟아부었다.
설공의 움직임에는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었다. 검로의 극의를 달성한 자 특유의 완벽함. 하지만 그 완벽함 덕분에 천마 류운학의 안목이 빛을 발했다.
“혈마쇄혼지는 받아치지 말고 피해라. 다음은 천마회선풍이야. 다리가 아닌 허리를 보거라!”
수비를 천마가 맡았다면,
“이 싸움터 전체를 장기판처럼 생각하렴, 아스티나. 빗나간 그래비티 슬래시의 궤적을 떠올려. 바로 저 지점에 아직 마나의 울혈이 잔류해 있다. 설공을 거기로 유인해. 그럼 빈틈이 생길 거다.”
역습의 조언은 마녀의 몫이었다.
두 뛰어난 조력자 덕분에 아스티나는 대등한 상태에서 공방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대치 상황이 오래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심호흡을 하며 몸을 빼자 천마와 마녀 또한 동의의 몸짓을 했다.
“이해했느냐, 딸아. 어차피 일 합에 끝내야 한다.”
“저 미련한 남편처럼 동귀어진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거라. 네가 여기서 설공에게 죽으면 엄마가 백묘탑 전체를 이끌고 올라갈 테니까.”
말은 무시무시한 협박이었으나 아스티나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심호흡한 아스티나는 비로소 결단을 내렸다.
월장석에 붙어 있던 바르한의 마력석이 모든 힘을 해방되며 무형의 파문을 일으켰다.
두우우우웅.
설공의 표정 또한 한층 가라앉았다.
더 이상 상대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없었다. 거기엔 오직 전심전력으로 상대를 베어내겠다는 무사가 있을 뿐이었다.
단 한 번.
검을 휘두르면 골제의 마력석은 박살 날 것이며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벨리오나의 권능 또한 흩어진다.
아스티나는 그제야 한 번도 설공에게 진짜 묻고 싶었던 걸 물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의 고강함이 벽처럼 느껴지는 전투가 계속된 지금에서야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당신이 보고 있는 뭐야? 나를 쓰러트리는 대가로 층장에게 무엇을 약속받았지? 탈옥 행에 데려가 준다던가?”
“본좌는 탈옥에 흥미가 없다.”
“……뭐?”
“본좌가 있던 세계에서 본좌는 이미 한계를 보았다. 무림에는 무수한 고수들이 있었으나 그중 누구도 본좌에게 답을 주지 못했으니까. 본좌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 오직 그것을 탐구하기 위해 등반을 했을 뿐.”
“그게 니오프론과 무슨 상관인데?”
“그자는 오래 전 본좌에게 약속했다. 자신을 도와주면 본좌의 숙원을 이뤄준다고 하였지. 바로 나와 동일한 능력을 갖춘 분신을 빚어내 죽을 때까지 생사결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아스티나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설공이 약속받은 것은 탈옥이 아니었다.
다만 벽을 넘어서기 위해, 갈구하는 해답을 얻기 위해 걸맞는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니오프론은 가장 완벽한 상대라 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설공’을 만들어주겠다 한 것이고.
실소가 새어 나왔다.
“고작 그따위 것 때문에…… 지독하게 이기적인 네 야망 때문에 너는 내 가족을 짓밟았어.”
“본좌는 타인의 이해를 바란 적 없다. 그러니 유감도 없다.”
“목이 잘리면 유감이 생길 거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일거에 모든 힘을 해방한 아스티나가 설공에게 달려들었다.
설공 또한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며 상대의 가속도가 정점에 다다랐을 순간을 예상해 영격했다.
청룡패웅검의 검신에 이질적인 스파크가 일었다. 시간을 멈추는 벨리오나의 권능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을 휘두른 순간,
설공의 육체가 정지했다.
마치 거미줄에 붙잡힌 거미처럼.
남은 것은 무방비한 상태의 가슴에 청룡패웅검을 꽂아 넣기만 하면 된다.
그때 벼락처럼 천마가 노호성을 질렀다.
“접근하지 마라! 심즉살(心卽殺)이다.”
마음먹는 것만으로 살기를 뿜어내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심즉살. 물론 아스티나 또한 뛰어난 강적이니만큼 의지만으로 숨통을 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아스티나가 심즉살의 영향을 받아 술식이 파훼 될 것이고, 거꾸로 설공의 검에 몸이 잘릴 것이다.
‘벨리오나가 이것에 당했구나.’
시간이 멈춰진 뒤에도 흩어지지 않는 살기라니. 설공이라는 무사가 얼마나 일생을 들여 자신을 병장기처럼 닦아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스티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골제의 마력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신력의 완전 해방을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때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입을 열었다.
“반대로 생각해라, 아스티나. 감속이 아니라 가속이다.”
“속도를 더 높이라고요?”
“그래. 저자가 말하지 않았니.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이 숙원이라고. 그것을 들어주자꾸나.”
아스티나는 어머니를 닮아 영리했다.
그래서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도 이 말에 담긴 진의를 온전히 이해했다.
“알겠어요.”
마력석이 터져나가며 시간정지가 풀려났다.
시간정지술로 설공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가속시킨다.
안 그래도 섬전처럼 빠른 설공의 움직임을 한층 더 빠르게 만들었다.
아스티나가 한 것은 복부를 열어준 것뿐이었다.
피이이잇!
설공의 묵검이 아스티나의 등 뒤에 갑자기 솟아난 것처럼 나타났다.
끔찍한 광경이었으나 영체인 천마와 마녀는 침묵만을 유지한 채 다음 순간 벌어질 일을 기다렸다.
스르륵.
설공의 동공에 의문의 빛이 머금어졌다. 적의 육체에 결정적인 상처를 입혔음에도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목덜미다.
“본좌에게 무슨 수를 쓴 거지?”
“미안한데 설명해줄 시간이 없어. 그걸 다 듣기 전까지 네가 살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쿨럭.”
아스티나의 입가에서 핏덩이가 흘러나왔다.
은발의 마검사가 눈밭에 힘없이 쓰러졌다. 천마와 마녀가 그것을 받아주려 했으나 물리력이 없는 존재들이라 불가능했다.
반면에 설공은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가. 최후의 순간에 오히려 본좌의 경지를 증폭시킴으로써 ‘간격’을 죽인 건가. 본좌가 스스로 자신의 검을 통과하도록 만들어서.”
마치 얼음과 얼음이 미끄러지듯 설공의 목이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
그래서 설공의 마지막 중얼거림은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