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초원의 이름으로 (3)
우투릴리가 캉이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너,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다 알고서 인정한 거구나.”
“응.”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우투릴리는 이 게임에 언제나 몇 겹의 함정을 깔아놓는다.
일단 생면부지의 여신이 하는 말을 전부 신용한다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부분을 걸고넘어지면 흥분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이번엔 인정할 경우 감옥에 끌려와야 하는 무서운 함정까지 배치돼 있었다.
그것을 이 구미호 소년은 무심하게 돌파해버린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러니 감옥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없어. 내가 받아야 할 벌이 있다면 받아야 하겠지.”
“……그것이 기억하지 못하는 죄라 해도?”
“응. 그렇다고 해도.”
어쩌면 목숨이 아홉 개인 구미호라서 생명에 대한 위기감이 없는 걸까?
우투릴리는 잠깐 생각했으나 곧 아니라는 대답에 이르렀다.
‘이 꼬마는 요정을 구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빨리 움직였지. 목숨이 귀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토록 순수한 인정이라니.
단 한 번도 가능할 거라 상상한 적 없었다.
그 어떤 죄수라도 삶을 뒤져내 천적처럼 약점을 집어낼 자신이 있었던 우투릴리였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에게도 천적처럼 나타날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오늘일 줄이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제르비어스가 묻자 우투릴리는 의자에 편히 기대앉으며 칭얼거렸다.
“어떻게 되긴. 너희가 이긴 거야. 약속은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여신의 머리 위에서 황금 망치가 또 한 번 빙그르르 회전했다.
제르비어스들은 흠칫하며 한 발짝 물러났으나 망치의 머리가 향하는 곳은 자신들이 서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바로 그 주인의 머리 위였다.
“나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자 황금 망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투릴리를 덮쳤다.
아름다운 드레스가 부욱하고 찢어졌다.
목 아래를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분이 날아가 버린 우투릴리가 마지막으로 제르비어스에게 윙크했다.
“이게 너희 필멸자들이 거짓을 말하는 짜릿함이구나. 언젠가 한 번은 겪어보고 싶었어. 고맙다.”
우투릴리의 머리가 잿더미로 화해 사라지고, 주인을 잃은 황금망치 역시 온데간데없이 증발해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마왕에게 토니아가 설명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게임을 했던 거야. 스스로 내건 조건을 상대가 격파할 경우 패배하게 되는 거지.”
“마지막에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사실은 인정하고 있었던 거지. 그러나 거짓을 말함으로써 약속을 지킨 거고. 신격 존재 나름의 존엄을 따른 거라고 생각해.”
마지막까지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독특한 상대였다.
제르비어스는 목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전멸할 뻔했어.”
원탁에 앉아 있던 순간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신격 죄수의 절대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압박감을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대단한 녀석도 니오프론의 밑에서 심부름하는 존재였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8층장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녀석일까.”
그때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캉이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그리고 누나. 부탁이 있어.”
“응?”
“이 게임에서 일어난 일은 비밀로 묻어뒀으면 좋겠어.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거야.”
그 말인즉슨 슈바인과 아스티나에겐 밝히지 말자는 부탁이었다.
토니아가 캉이의 어깨 위로 날아올랐다.
“괜찮겠니?”
“응. 만약 내가 다시 이 감옥으로 돌아와야 하는 운명이란 걸 알게 되면 형아랑 누나가 흔들릴지도 모르잖아.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그 둘이 없었다면 엄마를 만나지도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제발. 그렇게 해줬으면 해.”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다면 반박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캉이는 의연한 태도로 대의를 위해 자신의 안위를 신경 쓰지 말자고 말했다.
마왕과 요정은 구미호 소년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캉이가 마지막 순간에 그토록 단호하게 인정하지 않았다면 저 망치에 짓이겨진 것은 여신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고마워. 둘 다.”
*
십만대산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수만 년 동안 자연의 퇴적과 융기로 인해 다듬어진 광막한 산세가 상식을 비웃는 파괴력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었다.
싸아아아악!
태산을 가를 수 있는 거인의 곡도가 또 하나의 봉우리를 잘라냈다.
믿을 수 없게 빠른 참격이었으나 검은 점은 그 참격에 휘말리지 않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세 개의 얼굴과 여덟 개의 팔을 지닌 악귀왕 아수라가 등성이를 짓밟고 추격해왔다.
이 검은 점의 주인공은 설공.
그가 공중에서 수인을 맺자 역시 바닥에서 동일한 크기의 아수라가 튀어 올랐다.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초월식(超越式)]
[아수라대멸겁(阿修羅大滅劫)]
이윽고 두 악귀왕이 투견판에 선 두 마리의 맹견처럼 서로를 물어뜯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승부는 일방적이었다.
상대 아수라의 팔을 전부 뜯어낼 때까지 설공의 아수라가 잃어버린 팔은 두 개에 불과했다.
설공은 언덕 위에서 숨을 헐떡이는 아스티나를 향해 말했다.
“용 앞에서 비늘 대결을 하려 들지 마라. 이런 건 단순한 시간벌기밖에 되지 않는 법. 계속 본좌를 상대로 잡기에 의존하려 든다면 말로가 좋지 않을 것이다.”
“…….”
“아직도 아껴두려는가.”
아스티나와 설공의 대결은 막바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실제 설공급의 고수들이 목숨을 걸고 생사결을 펼치면 의외로 초단기전으로 끝나게 된다.
가장 자신 있는 수를 꺼내어 일 합에 승부가 갈리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싸움이 길어진 이면엔 아스티나의 발악이 숨어 있었다.
정면충돌을 최대한 피하며 설공의 빈틈을 노리려는 작전 덕분에 아직 버텨내는 중이라 해야 할까.
설공 쪽에서도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없어도 상대의 표정과 기세, 공기의 흐름을 통해 ‘무언가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사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공은 아스티나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압박의 강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왔다.
때문에 아스티나의 육체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오른쪽 견갑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흑갑옷의 틈새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설공의 공격엔 치명타와 평타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스치기만 해도 내상을 입히는 무지막지한 검격이 아스티나를 깎아내려 갔다.
어쩌면 갑옷을 벗는 순간 제대로 서 있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역시, 저질러야 하나.’
아스티나가 아무 생각 없이 설공을 죽이겠다고 덤벼든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실력, 전쟁을 거듭하면서 노련해진 술식을 믿었다.
그리고 8층에 올라와 생각지도 못했던 힘까지 얻었다.
톱니바퀴의 여신 벨리오나가 자신에게 넘겨준 신력의 잔재가 그것이었다.
성공적인 예행연습도 마쳤다.
친구들의 눈앞에서 처음으로 ‘시간 정지술’을 펼쳤을 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뇌신 지드 마저도 자신이 보트를 떠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설공에게도 먹힐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이 힘을 건넨 장본인인 여신 벨리오나마저 설공을 막아서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무극파천공은 공간장악력으로 주변을 뒤튼다. 상성이 좋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두 번 시도할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일말의 망설임이 아스티나의 발목을 계속 붙잡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해. 이대로 기력이 다해서 죽는 것만큼 최악도 없으니까.’
각오를 마친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쥐고 일어섰다.
설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가 드디어 건곤일척의 승부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십만대산 일대는 순식간에 적막으로 가득 찼다.
돌멩이 하나가 구르는 것도 두 남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공간에 가득 찬 긴장감.
아스티나는 아주 오랜만에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복수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고 했던 류운학.
기억에도 없는 딸을 꼭 안아주었던 일레인.
이게 마지막으로 내뱉는 숨이 될지 모른다는 절박함이, 마치 그 둘이 실제로 아스티나의 등 뒤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가져다주었다.
“진각이 흐트러졌다, 딸아. 그러다간 우하지에 역습을 당하고 말아. 쯧쯔, 네 엄마 말만 믿고 평소에 보법을 게을리하니 그리되는 게 아니냐!”
류운학의 음성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오른쪽 다리의 위치가 어정쩡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보았더라면 정말 딱 저렇게 말했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마력 회로에 남은 마나를 신경 쓰지 말거라. 단전에 응집된 내공과 달리 마나는 술자가 집중력만 유지한다면 응답해 주게 되어 있어. 너는 역대 최강의 마녀인 내 딸이니 타고난 회로의 힘을 믿으렴.”
이번에는 일레인의 목소리였다.
실제로 아스티나는 남아 있는 연료를 걱정해 달리지 못하는 자동차처럼 불안한 상태였다.
그것을 다잡아주는 어머니의 음성.
놀랍게도 그 순간부터 아스티나는 마력 회로에 대한 잡념을 모두 비울 수 있었다.
“고마워요, 두 분 다.”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집중력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둘의 모습을 자신의 무의식에서 끄집어냈을 것이다.
“……잠깐. 그런데 목소리가 이 정도로 생생하다고?”
이상한 점은 하나가 더 있다.
언덕 아래서 대치 중인 설공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선 것이다.
마치 아스티나의 등 뒤에 누군가가 서 있는 걸 보기라도 한 듯이.
아스티나가 등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설공처럼 고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빈틈을 보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었다. 지금의 설공이 자신에게 기습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그러나 거기엔 눈 덮인 숲의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아스티나의 안목은 날카로웠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고조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주 미세한 기척이었으나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아빠?”
잠시 후 한 나무 뒤에서 귀혼 산장의 주인, 무극천마 류운학이 걸어 나왔다. 뒤통수를 무안하게 긁적이면서.
“허허.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거늘. 우리 딸이 이렇게나 경지가 높아질 줄 몰랐구려.”
“…….”
“여보. 들켰소. 어서 나오시오.”
“……. 당신이나 들켰지, 나는 아니었단 말예요!”
이번에는 땅 밑에서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솟아올랐다.
어느새 배는 임산부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스티나가 여기까지 모험을 하는 동안 과거의 자신을 무사히 출산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아빠? …… 엄마?”
환상이 아니었다.
2층 삼월초원에 있어야 할 아스티나의 두 부모가 기억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눈앞에 서 있었다.
류운학과 일레인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왔다, 딸아.”
“초원의 이름으로 설공을 끝장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