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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69화 (269/300)

#269. 초원의 이름으로 (1)

“그렇게 노려볼 것 없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니오프론은 내게 등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어떻게 안 거지? 최대한 기척을 죽였는데.”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는 좋은 설명이 있지 않습니까.”

“너는 무인 체질로 보이진 않아. 적어도 내가 아는 수단을 쓴 것 같진 않은데.”

“하하, 맞습니다. 이렇게 지척까지 다가왔는데도 칼을 뽑지 않으시는군요. 저를 적대할 의사가 없다고 해석해도 될까요?”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는다.

저렇게 허허실실로 나오는 상대를 나는 이 감옥에서 처음 만나봤다.

그래서 떠보는 것은 그만하고 층장 니오프론의 옆 좌석에 앉았다.

“베려 해도 베여주지 않을 것 같아서.”

“호오. 하지만 실험해보기 전엔 모르는 것 아닌가요? 탐색을 위해서라도.”

“널 떠보려다가 내 패를 먼저 보여주는 건 사양하고 싶거든. 무엇보다 이 공간 자체가 석연치 않아. 나는 분명 배의 밑바닥에서 계단 한 층만 올라왔을 뿐이거든? 근데 정신을 차려보니 눈 덮인 설산이 내려다보이는 탑의 꼭대기에 와있더란 말이지.”

바깥에서 목격한 이 배의 크기를 생각해봤을 때 지금의 현상은 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공간전이나 좌표왜곡 같은 이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절대영역 안으로 발을 들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쨌든 현명한 판단입니다, 슈바인 스트링거. 여기서 당신이 신경 써야 할 건 제가 아니라 저 밑에서 싸우고 있는 두 분 아니겠어요?”

니오프론이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가니 유려한 눈보라가 설산 위를 희롱하고 있었다.

맹룡과강.

사나운 용이 강을 건넌다는 뜻의 기초적인 무공 초식이다.

하지만 저 아래서 펼쳐지는 광경은 결코 ‘기초’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비상식적이었다.

눈보라를 절단하며 나타난 마법진 위에서 익숙한 얼굴을 한 여인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스티나.”

작은 점처럼 보이는 아스티나가 내 중얼거림을 들을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가까이 있었더라도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날아오는 공격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쐐애애액!

거친 파공음과 함께 주인 없는 묵검이 아스티나를 노리고 덤벼들었다.

시전자의 내공을 무자비하게 빨아들이는 어검술.

무한대의 잠재력을 가진 단전의 소유자만이 저런 식으로 상대를 몰아붙일 수 있다.

묵검은 세상의 그 어떤 투사체도 해낼 수 없는 각도로 궤적을 틀면서 공간을 잘라먹었다.

정면으로 날아오던 검이 직각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직접 당하면 어떨까 생각하면 아찔해졌다.

아스티나는 나름의 대응책을 세워둔 듯 보였다. 스무 개가 넘는 그래비티 볼을 탄막처럼 뿌려 방어했다.

묵검은 여유롭게 중력구 사이를 뚫고 비행하려 했으나 눈에 띄게 속도가 느려졌다.

그래서 결국 아스티나의 거리에 들어왔을 땐 보통의 화살보다 훨씬 느린 물체가 되고 말았다.

‘신묘한 방어법이다.’

저것은 그래비티 볼의 크기는 모두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각기 다른 중력을 심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볼과 볼의 사이를 뚫고 비행하는 모든 물체에 영향을 끼치는 전법이었다.

우주를 여행하는 혜성이 강한 중력을 가진 행성에 이끌리는 원리.

말이 쉽지, 저 짧은 시간에 모든 그래비티 볼의 설정값을 천차만별로 세팅한다는 것은 감히 천재적인 영역이었다.

‘대단하구나, 아스티나.’

티잉!

아스티나의 청룡패웅검이 묵검을 쳐내자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설공이 허공에서 그것을 잡아챘다.

여전히 눈발보다도 차갑고 싸늘한 얼굴이었다.

“그대는 본좌와의 싸움을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온 모양이군. 그것도 그림자 상태의 내가 아니라 전력을 다하는 본좌의 모습을 예상하면서 말이야.”

“당연하지. 깨어있는 시간 동안엔 언제나 너를 생각하면서 지내왔으니까.”

“본좌의 무극파천공이 십이성을 해방했을 때를 상상했다면 그대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도 알았을 터.”

“나는 마법사야. 희박한 승산을 절반까지 끌어올리는 게 마법사가 하는 일이고.”

아스티나와 설공의 대화는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실감 나게 들려왔다.

내가 옆자리의 니오프론을 빤히 쳐다보니 그는 재주를 부리는 마술사처럼 윙크했다.

“간단한 재주입니다. 실감 나는 관전을 위해서 이 정도는 제공해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아스티나는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싸우고 있어. 그걸 여흥 거리처럼 취급하지 마라.”

“아,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오해입니다. 저는 세상만사 모든 것을 여흥으로 취급하니까요. 특별히 아스티나나 당신을 조롱하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뭐?”

“게다가 제 태도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녀를 상대하는 설공이 진심으로 본래의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저도 설공과 긴 시간 함께 해왔지만 저 정도로 진지한 모습은 상당히 오랜만이라고요.”

니오프론의 말은 사실이었다.

설공이 기수식을 취하자 산등성이 전체가 진동하며 한 무인이 내뿜는 기파에 비명을 내질렀다.

“본좌가 상상만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걸 알려주도록 하지.”

“그렇게 오만하게 굴 거라는 것도 내가 상상한 그대로인걸.”

청룡패웅검의 월장석이 오색창연한 빛을 내뿜었다.

니오프론이 흥분된 어조로 소감을 말했다.

“설공이 검을 쥔 채 싸운다는 건 상대에 대한 파악을 마쳤다는 뜻이지요. 무섭지 않나요? 아주 미약한 변수도 만들지 않겠다는 저 태도가. 신격 죄수들이 즐비한 이 타천의 강가에서 손에 꼽히는 무위를 자랑하는 건 바로 저런 신중함에 있지요.”

흑기사의 갑옷을 착용한 아스티나와 흑색 무복을 입은 설공의 모습은 새하얀 화선지 위에 붓으로 찍힌 두 개의 점처럼 보였다.

잠시 후 두 검은 점은 날카로운 선이 되어 도화지를 찢어버릴 듯 충돌했다.

채앵! 챙!

네 번째의 검격에서 균형이 뒤틀렸다. 아스티나의 왼쪽 어깨에서 선혈이 피어오른 것이다.

그래비티 쉴드와 갑옷의 단단한 경도마저 뚫고 설공은 일격을 먹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멀리서 지켜보니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아스티나는 확실히 설공에 대해 많은 걸 파악하고 대비해 왔다. 본인이 밝힌 대로 셀 수 없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하면서.

하지만 그것이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

지금 설공이 보여주고 있는 속도가 아스티나의 예상과 계산을 웃돌고 있다는 게 빤히 보였다.

그렇다면 아스티나는 지금 눈앞의 설공과 싸우면서 동시에 어긋난 계산을 머릿속에서 바로잡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두 명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아스티나가 거리를 벌리면서 그래비티 슬래시를 내쏘았다.

접근전에선 패색이 짙다고 판단해 원거리 전법을 택한 것인데, 설공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중력참의 파도를 정면돌파로 뚫고 나갔다.

거기에서 아스티나는 또 한 번의 신묘한 술수를 선보였다.

설공이 그래비티 슬래시를 잘라내는 순간 그 충격파를 이용해 워핑으로 전환한 것이다.

순간이동에 폭발을 이용한다는 건 나로선 상상조차 못 해본 시도다.

상대의 내공은 깎아 먹으면서 자신의 마력은 최소한으로 보존하는 영리한 전법이다.

말이야 쉽지, 까딱 잘못했다가는 자신이 거꾸로 피해를 볼 수 있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슈바인. 괜찮으신가요? 손에서 피가 나는데요.”

나도 모르게 주먹을 너무 꽉 쥐어서인지 손바닥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젠장.”

“아스티나가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그렇다면 직접 내려가서 도와주시는 건 어때요?”

나는 잠시 니오프론의 진의를 읽기 위해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진심이야? 내가 아스티나를 도와줘도 방해하지 않겠다고?”

“저는 저 둘에게 상대와 만나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지요. 하지만 그 약속에 훼방꾼을 막아주겠다는 것은 없었답니다.”

“좋아. 그렇다면…….”

“어엇, 잠깐만요. 설마 창문을 박살 내고 날아가겠다는 무식한 방법을 쓰려는 건 아니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도로롱.

니오프론이 자기 악기를 쓸어내리는 순간,

나는 아스티나와 설공이 동시에 내려다보이는 상공에 떠 있었다.

공간전이였다.

현재 설공은 아스티나를 추격하느라 나를 보지 못하는 상황.

삼월초원에서도 비슷한 구도에서 설공을 내려다본 적 있었다. 처음 저자와 검을 맞댔을 때는 황소 앞의 생쥐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생쥐가 아닌 호랑이에 가까워졌다.

이리저리 잴 때가 아니다.

현재 아스티나와 친구 맺기가 끊어져 스킬이 제한된 상황, 그래서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중에서 가장 화력이 높은 수단을 택했다.

[마왕군 폭렬마법]

[4급 오의 오메가 플레어(Omega Flare)]

제르비어스의 최강 스킬인 오메가 플레어가 벼락처럼 설공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놀랍게도 그는 충돌 직전에 습격자의 존재를 깨닫고 위를 올려다봤다.

설공이 검을 회수하고 반격하려는 순간이었다.

티이이이이잉!

오메가 플레어를 무력화시킨 것은 설공의 검이 아니라 중력 마법 자이언트 쉴드였다.

“아스티나?”

나는 멍한 얼굴로 설원 위에 내려섰다.

눈앞에는 마법진으로 설공을 감싼 아스티나가 분기탱천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따라온 거야. 쫓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 그렇다고…… 어떻게 설공을 감쌀 수 있어?”

“저자를 죽일 때 아무런 변명도 하게 해주고 싶지 않으니까.”

“네 마력 회로를 돌아봐. 지금 마나가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잖아. 하지만 설공은 탈마지경의 고수야. 단전이 바닥날 일이 없는 괴물이라고. 둘이 힘을 합쳐서 한쪽이 빈틈을 노려야…….”

그때 설공이 우리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알겠어. 익숙한 얼굴이라 했더니 본좌가 그림자로 2층에 내려갔을 때 본좌의 목을 벤 청년이로군.”

“…….그렇다.”

“그대가 본좌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기다리라고 했던가. 본좌를 복사본이라고 비웃으며 말이야.”

설공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하룻강아지의 오만함이라고 생각했거늘, 전혀 다른 수준이 되어 나타났군. 환골탈태를 여러 번 거친 모양이야. 본좌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어떤 영약도 그대의 경우처럼 극적인 변화를 끌어낼 순 없을지 언대.”

“맞아. 지금의 나는 당신과 싸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 어디 시험해 볼 테야?”

“본좌는 그대들 둘이 동시에 덤벼도 상관없다. 어차피 결말은 같을…….”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아스티나가 설공과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투구 아래로 흘러내리는 은발이 내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스티나의 등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지금처럼 무정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스티나. 지금은 고집부릴 때가 아니야. 혼자서 복수를 달성하겠다는 네 진심은 알겠지만…….”

“너도 이게 복수처럼 보여?”

아스티나가 투구를 해제한 뒤 나를 돌아봤다.

핏발 서린 눈동자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복수가 아니면? 왜 그렇게 설공에게 집착하는 건데.”

“슈바인. 너나 다른 친구들은 모두 같은 목표를 꿈꾸며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아. 탈옥. 이 감옥을 벗어나는 거겠지.”

아스티나의 입가에 서린 김이 덧없이 흩어졌다.

“너에겐 지구라는, 돌아갈 세계가 있잖아. 제르비어스에게도, 토니아에게도 마찬가지고. 그거 알아? 나는 언제나 그 점이 부러웠어. 내가 돌아갈 곳은 삼만 개의 세계선에서 모두 짓밟혔으니까. 저 설공이란 남자의 손에.”

“하지만……..”

“나도 너희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어. 같은 시간 위에 발을 딛고 꿈을 나누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이 악몽과 작별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어디에도 갈 수 없어.”

누가 그랬던가.

알에서 깨어나는 건 하나의 세계를 박살 내는 거라고.

“그러니 이건 복수가 아니야. 악몽에서 깨어나는 일이지.”

다시 투구를 쓴 아스티나가 설공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돌아갈 세계는 너야, 슈바인 스트링거. 그러니까 믿고 기다려줘. 이기고 돌아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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