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십만 개의 칼날 (4)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스티나 류.”
아스티나가 니오프론의 배에 도착했을 때 8층장 니오프론은 갑판 위에서 이미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전부 마친 뒤였다.
널찍한 갑판의 형태는 마치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장을 연상케 했다. 무대가 있어야 할 공간에는 단단한 토양의 검투장이 마련돼 있었다.
‘원래 이런 형태였을까? 아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스스로 적의 소굴로 들어왔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마법 결계에 관한 한 아스티나의 눈을 속일 수 없다.
아주 미세한 공간의 결조차 읽어낼 수 있는 중력 마법사니까.
이 무대는 오늘을 위해 마련된 거다.
“제 예상과 달리 혼자 왔군요. 그렇게나 서로 떨어지지 못해 안달이었던 것과 달리 무슨 사정이 있었나 보지요? 싸우기라도 했나요.”
원형 객석의 반대편.
니오프론은 화려한 연단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강력해 보이는 신격 죄수들이 도열해 있다.
아스티나는 재빠르게 그들의 얼굴을 훑었으나 그중에서 찾는 사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약속 지켜. 내가 이 층에 남으면 층장 열쇠는 슈바인에게 넘기는 거야.”
“물론이지요.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편이랍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푸르가토나투스인 당신뿐. 다른 등반죄수들에게 볼 일은 없지요.”
아스티나는 니오프론의 오른쪽 좌석에 놓여 있는 물건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비파와 비슷한 형태의 발현악기.
타천의 강가에서 아스티나가 직접 박살 냈던 그것이 지금은 온전한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
공간을 왜곡시켜 마치 망원경으로 보듯 그 악기를 샅샅이 훑었다.
사소한 흠집마저도 완전히 동일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니오프론은 그래비티 잽에 산산이 조각난 악기를 원상복구 시켜 놓은 것이다.
‘어쩌면 파손을 없던 일로 만들었던 걸 수도 있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강가에서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뇌신 지드의 훼방을 탓할 수가 없었다.
아스티나는 단 두 번의 도약만으로 검투장에 내려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청룡패웅검을 뽑았다.
“설공을 불러와. 그게 내 조건이다.”
“불러올 필요 없습니다, 아스티나 류. 설공은 한참 전부터 그 무대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뭐라고?”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아스티나의 전신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느껴졌다.
혈관을 압착시키는 것 같은 압박감. 굶주린 맹금류 수천 마리 앞에 알몸으로 던져진 기분.
철컹.
검투장의 바닥에서 무대장치가 작동되는 소리였다.
느닷없이 생겨난 작은 구멍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장본인.
칠흑같이 검은 무복. 날렵한 체구.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
무엇보다 공허한 우주를 담고 있는 눈.
“설공.”
실제로 만나면 고래고래 악을 쓸 것 같았지만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아스티나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소리를 지르는 데 사용하는 힘조차 무의식적으로 아끼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로 아스티나는 완전히 집중했다.
하지만 설공은 그녀를 보지 않고, 니오프론에게 말을 걸었다.
“본좌와의 맹약을 지켜라, 층장. 지금껏 그대가 말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었으니.”
“하하. 오늘따라 제 신용을 의심하는 분들이 많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공. 그 대결이 끝나면 당신은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이건 교도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맺어진 맹약…….”
“나를 봐!”
분노에 찬 아스티나가 순식간에 설공과 거리를 좁히며 덤벼들었다.
청명한 검기가 실린 청룡패웅검이 설공의 등을 노리고 찔러 들었다.
채앵!
설공은 돌아서지 않았으나 그의 검이 홀로 움직여 아스티나의 공격을 튕겨냈다.
단 일합에 불과했으나 아스티나는 삼십 미터나 날아가야만 했다.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검술을 사용할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전에 몇 번이나 본 솜씨니까.
하지만 발동궤적과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습격자를 막아낸 뒤 둥실 떠 있는 검을 천마 설공이 천천히 손에 쥐었다.
“예언의 아이여, 먼저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지.”
말뿐만이 아니었다. 설공은 실제로 아스티나에게 허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것이 아스티나를 더욱 격분하게 만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뭐 하는 짓이지? 뭐가 고맙다는 거야.”
“그대가 이곳까지 오르는 동안 죽지 않은 것. 복수를 포기하지 않아 준 것. 겁을 먹은 채 스스로 자결하지 않은 것. 그 모든 것에 대한 감사다.”
“……이익.”
어쩌면 비아냥이 섞인 도발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알았다.
지금 설공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8층까지 올라오라고 했던 자기 말에 따라준 것에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그게 머리끝까지 화를 불러일으켰다.
도로롱.
그때 니오프론이 악기의 현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아스티나와 설공을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뭐야, 이게?”
만년설이 아득히 높은 곳까지 덮여 있는 설산.
그리고 순백의 설원 위에 흐트러지게 피어 있는 혈화들. 온갖 명검들을 손에 쥔 채 죽어 있는 무사들의 시체였다.
아스티나의 지식에는 없는 풍경이었으나, 설공은 이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층장.”
니오프론의 답변은 설산 꼭대기의 작은 산장에서 들려왔다.
“양해해주십시오, 설공. 저 또한 두 분 못지않게 오늘의 이 만남을 기다려왔단 말입니다. 그냥 검투장에서 치고받는 건 멋도, 낭만도 없잖아요? 바로 이곳이야말로 두 분의 결착을 위한 가장 완벽한 장소일 겁니다.”
아스티나가 설공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설공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곳은 본좌와 본좌의 교단이 기거하던 십만대산의 앞마당이다. 본좌와 그대의 아비가 처음 조우했던 곳이기도 하지.”
아스티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발아래 널브러진 시체들을 살펴보았다.
그 말이 맞다면 이 무인들은 그녀의 아버지 류운학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어간 무림맹의 동지들일 터다.
삼월초원에서 설공의 그림자와 싸웠던 류운학.
그가 이 장소에서 벌어졌던 일을 비통하게 후회하는 외침을 아스티나도 들었었다.
‘내 살신성인이! 무위로 돌아감이 슬프다고 하려느냐! 쿨럭. 오너라. 나는 아직 두 다리로 서 있다. 그날 그곳의 굴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노라.’
차가워진 공기 때문일까.
아스티나의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차가워졌다.
지금 자신이 누구와 싸워야 하는 것인지, 어째서 이겨야 하는 것인지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좋은 얼굴이다.”
설공이 진각을 밟자 그의 주변에 있던 시체가 밀려나며 작은 눈보라가 피어올랐다.
다음 순간 설공의 신형은 사라졌으며 아스티나는 농도 짙은 살기가 자신의 목을 노린다는 것만을 깨닫고 황급히 대처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자이언트 포스 쉴드(Giant Force Shield)]
반구형의 방어막이 생성되자마자 오른쪽의 일점이 붕괴되는 것을 감지했다. 아스티나의 청룡패웅검이 바로 그 일점을 정확히 영격했다.
까아앙!
방어막을 뚫고 들어오느라 느려진 설공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낸 아스티나는 연속 워핑으로 거리를 벌렸다.
먹잇감을 놓친 설공은 아스티나가 있었던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본좌의 기억이 잘못되었던가? 그대의 성취가……. 경천동지할 정도로 달라졌군.”
“그래. 그때는 너와 일 합도 겨루지 못할 만큼 약해빠진 애송이였지. 하지만 이 감옥이 나를 단련시켜줬어. 방심했다간 큰코다칠걸.”
설공은 대꾸하는 대신 두 번째 공격을 몰아쳤다.
이번에는 사각을 노리는 대신 정면에서의 돌격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훨씬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왔다.
아스티나는 이미 마법진을 최대로 전개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딜!”
청룡패웅검이 얼어붙은 땅을 내리찍자 설공을 중심으로 열 두 개의 중력구가 솟아올랐다.
무려 열 두 개의 그래비티 볼을 동시에 컨트롤해야 하는 신기. 이것은 캉이가 분신을 만들어 상대를 몰아치는 모습을 보고 고안해낸 정교한 트랩이었다.
“먹어라.”
아스티나가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열 두 개의 중력구가 순차적으로 설공을 집어삼키기 위해 폭산했다. 그 순서에는 아무런 규칙이 없었다.
하나의 중력구를 잘라낸다 해도 끝이 아니다.
무작위의 방향에서, 규칙도 없는 박자로 연격이 들어온다.
이것은 슈바인 스트링거가 오토마타 레나스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공간이동의 좌표를 무작위로 흐트러트렸던 순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내가 쓰러트린 적들만 나를 키운 게 아니야. 내 친구들도 나를 강하게 만들어줬어.”
중력구 세 개를 연달아 격파하던 설공은 상대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던지 내공을 일거에 끌어올려 큰 기술을 폭발시켰다.
[천마회풍일섬]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중력구들이 초신성 폭발에 허물어지는 행성들처럼 소멸했다.
뛰쳐나온 설공은 곧바로 아스티나를 향해 뛰어들었고 곧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크윽!”
충돌할 때마다 상대의 검에 중력부하를 걸고 있음에도 아스티나는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빈틈을 노려 반격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살초의 연속이었다.
반면 설공은 호흡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말을 걸어왔다.
“방심이라고 했던가? 본좌는 검을 잡은 아해 시절부터 지금까지 방심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다.”
피할 수 없는 검격이 아스티나의 목젖을 향해 날아들었다. 제자리에서의 워핑으로 검을 통과시켰으나 그것은 일전에 설공에게 보여준 적 있는 전법, 곧바로 응징이 돌아왔다.
퍼어억!
설공의 수도에 직격당한 아스티나가 설원 바닥에 처박혀 미끄러졌다.
재빨리 일어났으나 머리카락은 눈덩이에 휘감겨 엉망이 되었다.
“방심이라는 건 인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의 것. 본좌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딘가 고장 나 있었다. 오욕칠정과 희노애락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스티나는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설공은 싸우는 와중에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벼를 심는 농부가 벼에게 말을 걸지 않듯 무감정하게 칼을 휘두르곤 했을 뿐.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본교의 교주들은 그런 본좌가 천부적인 마의 씨앗이라며 흡족해했지. 아해야. 이곳이 왜 십만대산인지 아느냐? 십만개의 봉우리를 가진 천혜의 요새이기 때문이다.”
아스티나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묵직한 통증. 뼈가 부러지는 것은 간신히 면했으나 쉽사리 회복될 충격은 아니었다.
만약에 설공의 검에 직격당했던 것이라면 그 순간 희망을 품을 수 없이 승부가 끝났을 것이다.
설공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하나 본좌에게 십만의 의미는 다르다. 십만 명의 적을 죽이면……. 십만 개의 칼날을 부러뜨리고 나면 본좌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 경지에 오르기 전에 이 사내는 생각지 못한 방해를 받았다.
봉마연옥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 온 것이다.
설공이 또 한 번 거리를 순살 시키며 돌격해왔다.
“어디, 네가 그 십만 번째 칼날이 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