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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67화 (267/300)

#267. 십만 개의 칼날 (3)

“무슨 생각이야, 토니아?”

“나는 우리 셋 중에서 유일한 비전투원이잖아. 만일의 경우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어. 그러니 내가 먼저 나서는 게 유리해.”

“하지만…….”

토니아의 말에는 분명한 일리가 있었다.

셋 중에서 한 명만 승리하면 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버림패가 되겠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르비어스의 손바닥보다 작은 페어리를 첫 타자로 내보낸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상대인 우투릴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작은 요정아. 그럼 정식으로 도전하는 걸로 알겠어. 이름을 말해주련?”

“토니아.”

“깜찍한 이름이네. 좋아. 정의와 진리의 여신으로서 네가 걸어온 길을 훑어보겠어.”

우투릴리의 망치에서 흘러나온 황금색 오오라가 토니아의 전신을 감쌌다.

페어리 퀸은 흠칫하고 놀랐으나 여신의 손길이 자신을 해치거나 고통을 주는 일은 없었다.

해독할 수 없는 문자가 황금색 오오라의 주변을 배회했다. 주술적인 힘이 담긴 암호문처럼.

우투릴리는 잠시 눈을 감더니 그 글자들을 빨아들였다.

여신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연옥의 입소자 토니아여. 듣거라.”

달라진 것은 말투만이 아니었다.

우투릴리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스러운 존재감이 장내를 압도하고 있었다.

제르비어스는 마계에서 태어난 마족. 이런 기운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원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는 본디 한 몸으로 태어난 쌍둥이 남매와 함께 이 감옥에 발을 들였구나. 일족으로부터 배척당했던 것에 대한 증오, 그리고 정령의 보살핌도 받지 못했던 괴로움이 느껴져.”

토니아는 우투릴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스스로 한 번 생을 포기하기도 했으나 지금의 동료들을 만나 너의 잘려 나간 날개를 대신하고 있어. 나는 너처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여성을 좋아해. 종족과 상관없이 말이야. 하지만…….”

우투릴리가 황금 망치를 머리 위로 가뿐히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회전을 멈춘 망치가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숙녀의 장난감처럼 보였던 무기가 이제는 용의 두개골도 조각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 천리안은 본인이 자각하고 있는 죄가 아니라 그 이면의 것을 본다. 정의롭지 못한 자는 이 망치 아래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

“너는 스스로를 여왕이라 이름 붙였다. 이 봉마연옥의 5층 빙설협곡에서 살아남은 요정족을 이끌고 기나긴 생존 싸움에서 승리했지. 맞느냐?”

“맞아.”

“그렇다면 네 왕국의 신민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토니아는 우투릴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을 찔렸기 때문이다.

“네가 등져버린 요정들은 현재 아무 상관도 없는 화룡도의 채석장에서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 너는 남매인 크로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도 목숨을 끊음으로써 숭고한 최후를 맞이하겠다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으나 그것은 기만이다. 오직 여왕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 믿고 충성을 바친 신민들을 배신한 것이지.”

“아니야. 나는……..”

“크로톤이 죽고 교도관마저 몰락했다. 그 순간 너는 그토록 바라왔던 숙원을 달성했겠지. 하나 다른 요정들은 너와 크로톤의 대치에 장기말처럼 이용된 후 버림받은 것이다. 너는 여왕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렸다.”

우투릴리의 눈이 먹이를 집어삼키려는 맹수의 그것처럼 빛났다.

“묻겠노라. 요정 토니아. 너는 너를 믿고 따르던 신민들을 배신하고 내팽개쳤다. 인정하겠나?”

질문이 던져졌다.

제르비어스와 캉이는 초조한 눈빛으로 토니아의 입에서 어떤 답이 흘러나올지만을 기다렸다.

장본인인 토니아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혹한의 추위로 얼어붙은 날개를 서로 비벼주며 살아남았던 동지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자신이 그들을 이용했을 뿐이란 말인가?

내가 그렇게나 파렴치한 여왕이었다고?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토니아는 자기 입술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아니. 나는 인정하지 않아. 인정 못 해.”

우투릴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방금 그녀의 귀를 통해 들어간 토니아의 대답을 내면에서 곱씹기라도 하는 듯이.

그러고 나서 여신은 싸늘한 비소를 날렸다.

“거짓을 고했구나. 죽어라.”

슈우우우우우웅!

우투릴리의 황금 망치는 토니아의 대답을 ‘거짓’으로 판명했다.

그 대가는 가혹한 처벌.

거대해진 황금 망치가 페어리 퀸의 머리 위를 덮쳤다.

거부할 수 없는 절대영역.

단순한 무게뿐 아니라 신격의 권능이 담긴 철퇴가 내리꽂힌 것이다.

“아아아아악!”

토니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주저앉았다.

퍼어어어억!

제르비어스는 순간 반쪽 날개만을 가진 페어리가 끔찍하게 짓눌려 죽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끄으으으응.”

캉이가 황금 망치를 양손으로 떠받친 채 집행을 막아 세운 것이다.

아홉 개의 꼬리가 공작의 깃털처럼 펼쳐진 채 요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구미호 소년의 주변에는 붉은 만다라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캉이야, 왜?”

토니아의 질문에 캉이는 선혈을 왈칵 토해내며 대꾸했다.

“그럼 누나가 죽는 걸 그냥 지켜봐?”

예기치 못한 방해를 받은 황금 망치가 다시 떠올라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내리누르던 힘이 사라지자 캉이는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우투릴리는 조금의 당황도 없는 표정이었다.

“감동적인 우정이었으나…… 결과적으론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구미호야. 환수라 하더라도 신력의 행사를 막아선 대가는 아주 비싸거든.”

정의와 진리의 여신이 가리킨 곳은 캉이의 뒤를 받치고 있던 아홉 개의 꼬리였다.

그 꼬리 중 하나가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더니 재가 되어 사라졌다.

끔찍한 고통이 어린 구미호의 감각을 집어삼켰다.

“끄으으윽.”

“신성한 집행을 방해한 대가로 방금 너는 목숨 하나를 잃었다. 내가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말한 이유는 저 망치가 표적으로 삼은 생명체를 죽이기 전까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야.”

끼기기긱.

황금 망치의 머리가 다시 토니아에게로 향했다. 다시 한번 거짓을 고한 자의 목숨을 노리고 운석처럼 충돌하려는 것이다.

제르비어스는 초조하게 캉이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라, 캉이야. 네가 여덟 번 더 죽어도 이건 끝나지 않아.”

“그렇다고 보고만 있으라고, 아저씨?”

제르비어스가 간절한 눈빛으로 우투릴리를 노려보았다.

“여신이여. 제안이 있다. 집행을 잠깐만 연장시켜다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 게임의 룰에선 승자가 패자의 생살여탈권을 쥘 수 있다고 밝혔는걸. 너희도 모두 동의했고.”

“말했듯이 이건 삼 대 일의 승부잖아. 이쪽에선 겨우 한 명이 패배했을 뿐이야. 목숨을 가져가야 한다면 승부가 가려진 뒤가 맞지 않겠나.”

어느 정도는 궤변이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제르비어스의 간절함에 우투릴리의 마음이 움직였다. 자비나 동정은 아니었다.

다만 희망을 가진 채 발버둥 치는 자를 지켜보는 열락에서 오는 것일 뿐이었다.

“좋아. 받아들이지. 사이좋게 나란히 죽고 싶어 한다면 그 정도야 양보해줄 수 있어.”

이때 제르비어스는 확신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여신은 일말의 패배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런 억지와도 같은 부탁마저 받아들이겠다고 나선 것이다.

마왕이 팔을 걷어붙였다.

“다음은 나다. 무조건 솔직하게 대답해주겠어. 거짓이 없다면 내가 이기는 거겠지?”

“물론. 말했듯이 나는 설명을 반복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 확인은 그쯤에서 멈춰줬으면 해.”

제르비어스는 울먹이고 있는 토니아와 여전히 꼬리 하나를 잃은 통증에 괴로워하고 있는 캉이를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차례에서 이 빌어먹을 신의 장난을 멈춰 세우겠다는 각오뿐이었다.

“그럼 질문해라.”

우투릴리의 황금색 오오라가 이번엔 마왕의 주변을 탐욕스럽게 핥았다.

토니아의 차례보다 더욱 긴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제르비어스는 적어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는 마왕이구나. 자신의 성을 공격하는 용사와 그 동료를 수없이 때려죽였어. 용사 학살자. 그야말로 푸르가토리움에 입소할만한 죄인이군.”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한 발언이었으나 제르비어스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나는 내 죄를 알아. 분명히 내 손에 묻힌 피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 외면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을 거야.”

마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게임의 본질은 상대인 여신과의 싸움이 아니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서 이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토니아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무엇을 묻든지 상관없이 그냥 인정하기만 하면 돼. 생각을 비운 채 오직 거기에만 집중하겠어.’

전의에 불타는 마왕의 얼굴을 보면서 우투릴리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마치 상대가 어떤 작전을 궁리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는 듯.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 너는 감옥 바깥에서도 대적할 자가 없는 마족의 왕이었다. 용사의 무리뿐 아니라 동족인 자들 가운데서도 단연 군계일학이었지.”

“쓸데없는 소린 닥치고 질문이나 해.”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이야. 내 게임은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아. 잠자코 들어줄래?”

“…….”

“그렇게 고강했던 네가 이제는 마룡으로 변신할 수 있는 힘까지 각성했어. 하지만 선물처럼 획득한 힘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궁금증을 가진 적이 없나 보네?”

“내 변신능력과 이 게임이 무슨 상관이냐.”

“이상하지 않니? 네가 있던 세계에서 먹이사슬의 정점엔 마족이 있었어. 네 아버지 대에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시대에도 용에 관한 설화나 기록은 일체 존재하지 않았잖아?”

제르비어스는 0층 대기실에서 자신들을 도와줬던 이무기 이멜타스를 떠올렸다.

그가 대기실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는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

‘폴리모프로군. 용의 특권 중 하나라고 들었다.’

‘너도 용을 처음 보는 거야?’

‘그럴 수밖에. 내가 있던 세계에선 용이 오래전에 멸종했다고 들었거든. 저런 생물이 열 마리만 있었어도 마족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건 불가능했겠지.’

우투릴리가 양손에 턱을 괸 채 마왕을 직시했다.

“그런데 어째서 넌 용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응?”

“그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무의식의 단계에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막았을 수도 있고.”

위험하다.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우투릴리가 묵직한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사전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는 그걸 막아설 방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듣고 있어야만 할 뿐.

“너희 마족은 오래전에 용들이 지배하던 대륙을 찬탈했어. 그들을 멸종시킨 것도 모자라 그들의 둥지 위에 성을 지은 거야. 네가 그토록 증오하던 용사들은 그 전쟁에서 죽은 용들이 흘린 피가 뭉쳐 태어난 종족이지. 너는 그 용의 후예들을 워낙 많이 죽여서 그 피를 수백 년 동안 뒤집어썼어. 그래서 용사들조차 각성하지 못한 ‘용체화’의 능력을 얻게 된 거고. 너는 용사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그 조상의 넋까지 강탈한 거란다.”

“어디서 거짓부렁을…….”

“말했잖아? 내 권능은 진실에서 온다고. 지금껏 당당하게 생각해 왔을 테지. 그토록 많은 수의 용사들을 쳐 죽였으나 단 한 번도 먼저 싸움을 건 적이 없다고. 그저 침략자를 막아섰을 뿐이고, 몰살당한 가족의 복수를 위해 채찍을 휘둘렀을 뿐이라고. 아주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믿어왔을 거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침략자는 너희 마족들이었다. 게다가 그 역사가 후대에 전해지지 않도록 은폐하기까지 한 업보가 있지.”

황금 망치가 제르비어스의 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투릴리는 어디 마음껏 대답해 보라는 듯 질문을 던졌다.

“묻겠노라. 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 너는 용족을 학살한 자들의 후손이다. 종족의 끔찍한 악행을 인정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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