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십만 개의 칼날 (1)
푸르가토리움에 들어온 이래 나는 다양한 형태의 구조물과 운송 수단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문명에 바탕을 둔 구조를 뽐내곤 했다.
그중에서 크기만을 따지자면 가장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던 것은 삼월초원의 백묘탑이다.
블록처럼 쌓여 있던 백묘탑이 공중요새로 탈바꿈되어 마법사들의 협력으로 하늘을 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말 그대로 건축물의 비행이었다.
그것을 능가하는 광경을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그 생각이 오늘 보기 좋게 박살 나고 말았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저걸 배라고 부른단 말야?”
니오프론의 대형선은 한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보통의 배는 파도를 헤치기 위해 날렵한 유선형의 모양을 갖추게 마련인데 저 ‘물건’은 그렇지 않았다.
강 위에 엎어져 있는 거대한 항아리, 혹은 원추부가 기이하게 넓은 팽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바람을 타기 위한 닻이나 물 위를 헤엄치기 위한 노도 보이지 않았다. 배라기보단 섬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움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배가 이동해야 하는 건 목적지 때문이지만 니오프론의 배는 이미 강의 최상류에 자리 잡고 있다. 습격을 대비할 필요도 없어. 자신을 위협할만한 강적을 오랫동안 착실하게 제거해왔으니까.”
“하지만 저래서야…… 배가 아니잖아?”
“신들은 그런 불일치를 사랑하니까.”
“어쨌든 저 정도로 크니까 시야에서 놓칠 일은 없네. 가자!”
전진을 명하는 내게 지드는 탐탁지 않은 기색을 드러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슈바인 스트링거. 승산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자살행위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잖아. 아까 니오프론에게 사생결단을 하겠다고 이를 드러냈던 게 누군데?”
“그건 예외적인 상황이었으니까. 녀석이 저 배를 벗어난 채로 단독행동을 취하는 일은 지독하게 드물거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 저 대형선은 그 자체로 니오프론의 절대영역이야. 진입하는 순간 상대가 원하는 형태로 썰려 나갈 거다.”
“적진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건 이미 여러 번 해본 짓이야. 새삼스럽지도 않아. 오히려 안락한 본거지에 짱박혀 있는 녀석들일수록 공략할 구석이 있기 마련이야. 그만큼 방심하기 쉬운 환경이니까.”
“그건 인간의 기준이군. 신격에 오르면 방심 같은 건 하지 않아. 그대를 부추긴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자가당착 같다만…… 벨리오나가 기원검의 조각을 강탈당한 시점에서 희망은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난 울컥한 심정으로 지드의 말을 받아쳤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단순하게 말해봐.”
“그 아가씨를 포기해라. 어쩌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당했을지도 모르지. 그대는 어떻게든 전열을 재정비해서 차분하게 빈틈을 노리는 게 낫다.”
아스티나를 내버려 두라니.
그건 결코 선택지에 넣을 수 없는 옵션이었다.
“말도 안 돼. 위험한 곳이니만큼 친구를 더 빨리 빼내 와야지. 안 그래, 제르비어스?”
“어, 응. ……그래.”
내 딴엔 동조를 바라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무미건조했다.
폭렬마왕은 보트의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평소와 다른 그 얼음장 같은 얼굴이 내 불안감을 가중했다.
“왜 그래? 설마 너도 지드의 생각에 동의하는 거야? 겁먹고 꽁무니를 빼자고?”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지금까지 우린 많은 난관을 거쳐왔고,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적들에게 덤벼들었으니까. 이런 미친 짓이야 너를 따라다니기로 결정한 이후 언제나 각오했던 바다.”
“거 봐. 그러니까…….”
제르비어스가 한 손을 들어, 내 입을 막았다.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용사야. 솔직히 말하자면 아스티나를 따라가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제 발로 설공을 찾아갔어. 그게 본인의 숙원이라는 걸 지금껏 숨기지도 않았지. 일방적이긴 했지만 우리는 분명한 작별 인사를 들은 거야. 아스티나의 의사를 존중한다면 끝장을 보겠다는 그녀의 각오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마왕의 지적은 비수처럼 내 논리를 찢고 들어왔다.
차라리 녀석의 뿔로 갈비뼈를 관통당하는 게 나을 만큼 뼈아픈 지적이었다.
작정하고 나를 막아설 때는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놈이니까.
삼월초원을 떠난 직후 아스티나는 내게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설공은 내 거야, 슈바인.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은 없어. 지금 여기에서 약속해줘. 내가 설공에게 죽더라도 철저히 내 검에 맡겨주겠다고.’
‘……설마 우리의 힘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설공을 상대하겠다는 거야? 여긴 감옥이야. 목숨보다 승부를 우선시하는 협객의 세계가 아니라고.’
‘난 협객의 세계에서 태어난 여자야. 설공에게 핏값을 받아내는 건 오로지 내 몫이라고. 내가 그에게 패해서 죽는다면…… 그땐 내 복수를 갚겠다고 나서도 상관 않겠지만.’
결코 방해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그때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거야 진짜로 우릴 따돌리고 불나방처럼 뛰어들 줄 몰랐던 거고.
“나는 마왕성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성을 버리고 달아날 생각은 한 적이 없었지. 내 목을 노리고 성벽을 넘는 용사들은 내게 복수의 대상이었으니까. 동시에 그 복수의 권리는 용사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하지 않았어. 복수는 당사자들끼리 풀어야 할 일이야. 아무리 가까운 사이더라도 거기에 개입하는 게 옳은 일일까 묻는 거다.”
너무 오래 턱을 앙다물고 있었더니 양 볼이 저렸다.
하지만 잠자코 제르비어스의 말을 듣고만 있을 순 없었다.
“나는 층간구역에서 파천황의 권능을 계속 진화시켰어. 그래서 비르카 리케우톤처럼 아래층에 있는 친구를 영체의 형태로 소환시킬 수 있었던 거야.”
“…….”
“그때 아스티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룡도에 남겨두고 온 친구를 불러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애가 정말 아무 번민이 없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어.”
아스티나 류는 천마 류운학과 마녀 일레인 쿠디슈의 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둘과도 친구를 맺었다.
아스티나가 원한다면 비르카를 불러냈던 것처럼 아스티나의 두 부모 또한 영체로 소환시킬 수 있었다. 언제든지.
“하지만 아스티나는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부탁 따위 하지 않았어. 왜 그랬을 거라 생각해?”
“마음이 약해지는 게 싫었을 테니까.”
“그래. 자기 딸이 고집부리다가 죽는 걸 원하는 부모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더더욱 그 복수에 끼어들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
“직접 들어야겠어.”
“……뭐?”
“아스티나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직접 작별을 고할 수 있었어. 하지만 단탈리온에게 편지만 달랑 남긴 뒤 시간을 멈추는 짓까지 벌여서 달아났지. 단순히 우리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서라고 생각하진 않아.”
무서웠던 거다.
목숨을 던져야 하는 순간에 우리가 막아선다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아스티나 자신도 확신이 없었던 거다.
“그런 어중간한 각오로 설공과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냐고, 멍청이가. 자기 복수에 끼어들지 말라는 선언을 할 거라면 적어도 면전에 대고 했어야지. 나는 아스티나의 편지 따위 못 본 걸로 할 거다.”
“나도 누나를 따라가고 싶어.”
캉이가 내 지원군으로 나섰다.
칭얼거리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캉이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매번 성장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스티나 누나의 말에 반항한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하지만 누나가 모든 걸 걸고 싸워야 한다면 그걸 지켜봐 줘야지. 혼자서는 분명 외로울 테니까.”
제르비어스는 캉이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구미호 소년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니오프론의 배를 향했다.
“그리고 만약 누나가 설공에게 죽는다면…… 그 남자는 자기가 감당해야 할 복수가 끝났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쿠르르르릉.
레나스가 형태를 변환한 보트가 격하게 진동했다.
강력한 환수가 내뿜는 분노를 오토마타의 선체가 받아내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움직임이었다.
결국 지드가 백기를 들었다.
“젠장. 못 말리겠군. 너희가 정녕 그렇게 다짐했다면…… 적어도 정면으로 직진하는 미친 짓은 해선 안 된다. 그 아가씨를 만나기도 전에 잿더미가 될 테니까.”
“뭔가 샛길이라도 알고 있는 거야, 지드?”
“정확히는 이 층의 그 누구도 이용할 수 없는 샛길이지. 하지만 너희라면 가능할 거다.”
지드가 가리킨 곳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강물 속이었다.
“잠수해라. 강물의 밑바닥에 닿으면 니오프론과 그 수하들의 시선을 피한 채 배에 접근할 수 있을 거다. 나 또한 그렇듯이 8층의 죄수들은 강물에 접촉하는 것을 발작적으로 싫어한다. 그래서 절대영역을 강물까지 뻗쳐오진 않지. 저 배에 진입할 틈이 있다면 거기뿐일 거다.”
뇌신이 내게 손을 뻗어왔다.
“그 아가씨가 죽지 않기를 빌겠다. 물론 그대들도. 강바닥을 이용한다면 나는 함께 갈 수 없다. 바깥에서 상황을 보다가 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을 때 진입하겠다.”
“고마웠어. 여러모로.”
“마지막처럼 얘기하지 말라니까? 너희 인간들은 말에 지배당하는 종족이니까 한마디 한마디 허투루 하지 마라.”
그렇게 너스레를 떨던 지드의 얼굴이 다시 무거워졌다.
“니오프론의 수하는 몇 명 되지 않아. 하지만 하나하나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이지. 그중에서도 황금 망치를 들고 다니는 여자가 있다. 다른 녀석은 몰라도 그 여자를 만났다면 무조건 달아나라.”
“어째서지? 그 여자가 설공만큼 강한가?”
“아니. 하지만 너희들과는 상성이 최악이야. 내 말을 명심하도록.”
그렇게 우리는 지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타천의 강물 아래로 깊이 잠수했다.
물론 타천의 강물이 오직 신격 죄수들에게만 작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맨몸으로 뛰어드는 건 꺼림칙했다.
그래서 레나스가 수압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단단하게 감싸줄 잠수정으로 변신했다.
“레나스. 만철도시에 바다도 있었던 거야? 어떻게 잠수정의 형태를 알고 있어?”
“이 선박의 형태는 관객님들을 따라다닌 이후 습득한 지식입니다. 층간 구역에서 철왕전기 제트카이저라는 활동사진을 보며 알게 되었지요.”
캉이의 귀가 쫑긋하고 일어났다.
“17화 대왕 오징어의 역습편!”
“맞습니다, 캉이 관객님.”
“……기억나. 그거 볼 때 아스티나 누나가 꿀밤을 때렸었거든. 웅크린 자세로 보지 말라고. 키 안 큰다면서.”
유유히 강물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잠수정 안에서 어린 구미호는 울적함에 젖어 들어갔다.
나는 가만히 녀석의 등을 쓰다듬어줬다.
“걱정하지 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스티나를 우리한테 다시 데려올 테니까.”
둥그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잠수정이 니오프론의 배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잠수정의 상단부가 묵직한 충격을 받아낸 뒤 해치가 열렸다.
그러자 레나스가 레이저로 잘라낸 원형의 목재가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수고했어, 레나스. 만일을 대비해서 이 물 밑에서 기다려줄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와 제르비어스, 캉이, 그리고 토니아가 들어선 곳은 넓은 형태의 연회장이었다.
노가 없으니 노잡이도 없고, 그런 노잡이들이 몰려 있는 선실도 필요 없는 듯했다.
“아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거야. 조심해서 움직…….”
까앙.
작지만 분명한 쇳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느닷없이 샹들리에의 불빛이 커지면서 연회장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타오르는 듯한 주황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뾰족한 구두를 신은 채 샹들리에 위에 올라타 있었다.
“너무 늦게 와서 깜빡 잠들 뻔 했잖니. 배에 숨어든 쥐새끼들아.”
여인은 싱긋 웃었으나 나는 그 매혹적인 얼굴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깨에 얹어 놓은 장난감 같은 무언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앙증맞은 황금 망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