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삼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 (7)
[베르단디의 스킬 ‘소울 랜턴’의 유지 시간이 곧 종료될 예정입니다. 남은 시간은 5분입니다.]
과거와의 소통이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달리아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절 측은하게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지. 그런데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부당하다고 생각해. 푸르가토리움은 무언가 잘못되었어. 뒤틀려 있다고.”
미래시를 어떻게든 거부해 보려고 발버둥 쳤던 여신이 내 눈앞에 있었다.
한 명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수한 비극을 내다본 여신은 침묵을 결정했고, 그 결과 무수한 이들이 종말을 맞이했다.
‘그게 정말 달리아의 잘못인가?’
이건 감옥을 오르면서 내내 곱씹었던 질문이었다.
존재하는 모든 우주에서 심각한 죄인을 붙잡아 온다는 봉마연옥 푸르가토리움.
물론, 골제나 용왕처럼 사악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도 많이 봐 왔지만 그렇지 않은 죄수들도 얼마든지 꼽을 수 있었다.
내 첫 번째 동료인 제르비어스부터 그렇다.
녀석은 싸움을 싫어하는 마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용사의 척결 대상으로 지정되어 오랜 시간 헤매었다.
레나스의 주인인 연금술사 그룬덴 사니릭투스.
그는 고대의 악마를 깨워 한 세계를 멸망시켰지만 그건 주인을 걱정한 오토마타의 의도에서 비롯된 재앙이었다. 사니릭투스에게 학살죄를 물을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다른 죄수들을 포식해 거인이 되어버린 크로톤조차 태생부터 그런 괴물은 아니었다.
불길한 샴쌍둥이로 낙인찍혀 종족에게 받은 차별이 어린 페어리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이다.
“표정이 달라졌군요. 무엇에 화가 난 건가요?”
“이 빌어 처먹을 감옥이 하는 짓거리에 신물이 나서. 이 감옥은 단단히 잘못되었어.”
정교한 예언의 재능 따위 달리아가 바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감옥은 오직 일어난 결과만 보고 이 여신을 죄인으로 판단했다.
“당신은 형벌이 아니라 위로를 받았어야 해.”
내 말에 달리아는 양손을 가슴에 모으더니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제 영혼에 온기가 차오르는 기분이군요.”
하지만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달리아의 어조가 조금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본디 저는 신탁을 내릴 때 정확하고, 명료한 표현을 사용해 왔습니다. 예언이 절대 빗나가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 자에게 비유나 모호한 말은 겉치레에 불과하니까요.”
이런 전제조건이 달린다는 건,
앞으로 꺼낼 말은 조금 다를 거라는 건가.
“하지만 그대는 예외입니다.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운명을 거부한 전례가 있어서일까요? 이렇게 조언을 주는 것 자체가 교도관장님의 금제를 깨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저에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한 특별취급. 그대가 이 시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독보적인 존재라서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요.”
“어떤 형태로든 괜찮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그대는 층장 니오프론과 충돌할 겁니다. 그리고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절감하겠지요. 극적인 조력이 필요한 순간이 반드시 올 겁니다. 그때가 되면 명심하세요. 이 감옥에 이유 없이 잡혀 온 죄수는 없다는 것을.”
“……그게 전부야?”
“지금은 아리송하시겠지요. 하지만 그 순간이 오면 명료해질 겁니다. 그대가 찾는 돌파구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몇 걸음 뒤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육체가 내 영혼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 말단에서부터 희미하게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제 작별이군요.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왕좌를 잃어버린 왕이여.”
달리아의 목례에 나도 마주 인사를 해주려던 참이었다.
“잠깐만, 달리아.”
그때, 한 가지 꼭 물어봐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는 이 층에 올라오기 전에 한 주술사 노파를 만났어. 내가 머지않아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예언자와 마주칠 거라 장담했지.”
“네.”
“나는 당신이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그 노파는 그 예언자의 예언을 내가 거부할 거라고 말했어. 그게 무엇인지 듣고 싶어.”
“말했듯이 저는 예언에 관해서라면 오직 진실만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듣고 싶으신 건가요? 무지는 축복입니다.”
“그래. 더는 아무것도 외면하고 싶지 않아.”
달리아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 영혼이 그녀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할 만큼 희미해져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실한 의미에서 제 마지막 예언이 되겠네요. 단 하나의 질문. 가장 묻고 싶은 것을 제게 물어보세요.”
나는 주저 없이 질문했다.
“나는 탈옥할 수 있어?”
“아니오.”
“……어?”
“그대의 운명에 탈옥은 없습니다.”
그제야 나는 달리아에게 지금껏 간절한 질문을 던졌던 평범한 인간들이 느꼈을 충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단호하고 확실하게 말한다고?
“하지만 당신이 그랬잖아.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그리 말했지요. 하지만 제가 이리 장담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불가항력에 의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대는 분명 문턱에 오를 테지만 그 순간 자신의 의지로 탈옥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 언젠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을 갖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 내가…… 탈옥하지 않는 길을 택한다고?
“행운을 빈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제겐 어울리지 않는 인사말이겠지요.”
“자, 잠깐만. 그렇게 떠나버리면…….”
“그저 쓰러지지 말고 전진하십시오. 부디 안녕히.”
파아아아아앗!
[스킬 ‘소울 랜턴’이 종료되었습니다.]
변한 것은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블랙홀과 거꾸로 말려 올라가는 폭포 또한 그대로였다.
다만 달리아만이 사라졌을 뿐이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가 한 것은 대화라기보단 기록 열람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말이야, 방귀야? 내가 탈옥을 하지 않는다고?”
차라리 탈옥을 못한 채 이 감옥에서 수만 년 썩어야 한다는 예언이었다면 나았을 거다.
예언 따위 걷어차 버리면 그만이라고 스스로 위안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내가 내린 결정이라고 말하는 예언자의 앞에서 자기 위안은 나설 곳이 없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예언을 거부할 겁니다.’
주술사 노파의 말이 맞았다.
달리아의 예언을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가 찾아왔다.
‘정말로 내가 그런 선택을 내리게 되면 어쩌지?’
무지가 축복이라는 달리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장이라도 내 두개골을 열어서 방금 받은 신탁을 지워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동시에 달리아는 불과 일곱 살 때부터 이런 번뇌와 평생을 싸워왔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자신이 끝내 극복하지 못한 숙제를 내게 준 건가.
“젠장. 이렇게 혼자 떨어질 때마다 너무 많은 일이 생긴다니까.”
저 멀리 레나스의 보트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내가 저지른 죄와 직면한 것.
달리아와 벨리오나에게 일어났던 일.
그리고 충격적인 마지막 예언까지.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줄곧 영혼 상태로 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친구들의 입장에선 찰나처럼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아직 나조차도 소화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전해줘야 할 생각에 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보트로 돌아갔을 때,
내 걱정 따윈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만큼 충격적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
“없어졌다고?”
“그래. 처음엔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이 좁아터진 보트에서 어떻게 그걸 놓쳐! 계속 시야에 뒀어야지.”
“이 망할 용사 놈아! 네가 블랙홀에 뛰어들어간다며 뛰쳐나갔는데 신경이 거기에 팔릴 수밖에 없잖냐!”
제르비어스의 멱살을 덥석 잡아 내던지려 했는데, 의외로 저항이 거셌다.
천공섬에서 마룡으로 각성하더니만 기본 근력도 꽤 오른 모양이었다.
아니면 너무 어이없는 소식을 듣고 내가 탈력감에 빠진 걸지도.
“아스티나가…… 사라졌단 말이지?”
보트 위로 돌아왔을 때 제르비어스와 캉이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를 반겨주기는커녕 비 맞은 강아지처럼 슬금슬금 피할 정도였다.
무슨 일이냐는 내 질문에 대답한 건 레나스였다.
아스티나의 생체 신호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를 꺼냈다.
“납치당한 걸 수도 있잖아. 니오프론이나 다른 죄수들이…….”
그것을 반박한 건 뇌신 지드였다.
“그건 불가능하다, 슈바인. 말했듯이 탄식의 폭포에 다가오는 정신 나간 죄수는 이 층에 없다. 그리고 내 절대영역에 접근했다면 이 몸이 모를 수 없지.”
“장담할 수 있어?”
“니오프론이 아스티나를 납치할 생각이었다면 내가 너희를 찾아오기 전에 손을 쓰는 게 최적의 시점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충분히 답이 되지 않았는가?”
“이익! 말이 안 되잖아. 다른 녀석들은 몰랐다고 쳐도 당신 같은 격을 가진 죄수가 어떻게 아스티나가 몸을 빼내는 걸 놓칠 수가 있지?”
지드는 살짝 자존심이 상한 듯 변명했다.
“그 아가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벨리오나의 마지막 숨을 거둬들였어. 내 감각을 완벽히 속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벨리오나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을 정지시킨 후 달아난 거다.”
그것은 레나스의 설명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뛰어난 오토마타인 레나스는 반경 3km의 모든 생체 신호를 감지해낸다.
아스티나처럼 강력한 마력 회로를 품은 인간일 경우는 놓칠 래야 놓칠 수가 없다.
감정이 없는 인형.
신경이 어느 한쪽에 쏠릴 일도 없다.
그런데도 레나스가 아스티나의 생체 신호를 놓쳤다는 건 골제의 보석이 흡수한 벨리오나의 권능을 사용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캉이가 울상을 지으며 내 품에 안겨 왔다.
“누나가…… 아까부터 답을 안 해.”
친구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파천황의 권능 귓속말을 말하는 것이었다.
캉이의 말을 듣고 나 또한 바로 아스티나에게 귓속말을 걸어보았으나,
[아스티나 류와 친구 관계가 끊겼습니다. 더 이상 귓속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녀가 나를 차단했다.
미약하게 남아 있던 납치라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스티나가 마지막 순간에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함께 가지 못해서 미안해.’
그때는 블랙홀에 나 혼자 들어가게 한 것에 대한 사과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그때 무언가를 결심했던 거다.
“인벤토리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좀처럼 내게 먼저 대화를 걸어오지 않는 상대가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단탈리온?”
인벤토리에 넣어둔 단탈리온이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녀석을 꺼내 펼치자 단탈리온이 글씨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용사님. 너무 놀라지 말고 들으십시오.
“너는 알고 있었어? 아스티나가 사라진걸?”
- 그녀는 제 사용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분이 제게 마나를 지불하고 편지를 남기셨습니다. 용사님이 돌아오시면 보여드리라고 하셨지요.
“……당장 보여줘.”
단탈리온의 필적이 묘하게 달라졌다.
아스티나가 사용하는 글씨체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 미안해, 슈바인. 이렇게 말도 없이 훌쩍 떠나서.
지금쯤 버럭 화를 내고 있겠지? 하지만 내 결정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따라올 필요 없어.
나는 지금부터 설공을 죽이러 갈 거야.
이 층에 설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그 자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때문에 너희 모두를 위험한 수렁에 빠트리고 싶지도 않아.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설공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우린 다신 만나지 못할 테지.
하지만 이게 내 결심이야.
너라면 알아들을 거라고 믿어.
오래전 그날 처음 설공이 나의 세계에 떨어져서 삼월초원의 전부를 학살한 이후…… 내가 몇 번 회귀했는지 들었잖아?
29,108번이야.
무려 삼만 번에 가까운 회귀를 엄마와 아빠의 피로 쓰여진 마법진으로 반복해야 했어.
한 번의 복수로는 채워질 수 없는 내 증오를 이해해 줘. 아주 고통스럽게 짓이겨줄 거야. 어쩌면 동귀어진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
설공.
그자는 삼만 번 죽어야 마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