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삼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 (4)
“베르단디.”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포자에서 탄생한 꽃.
환수들의 영혼을 흡수해 의식 없는 병사로 양산할 수 있었던 생물병기가 마지막으로 만들어낸 자손.
내가 직접 붙여준 이름을 부르자, 내 품에서 빠져나와 두둥실 떠올랐다.
처음, 이 꽃과 친구가 되었을 땐 분명 내가 빌려 쓸 스킬이 전혀 없다는 메시지가 떴었다.
차후 성장하여 스킬이 생길 가능성이 존재한다고도 덧붙여졌고.
[친구 베르단디가 성장하여 스킬 ‘소울 랜턴’이 발생했습니다.]
[친구 베르단디가 등반죄수의 영안(靈眼)을 깨우려 합니다. 이에 응할 경우 영혼이 잠시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져 주변 탐색이 가능해집니다.]
이거였구나.
세계수가 만들어낸 순백의 꽃 베르단디.
그녀가 내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스킬을 통하면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고마워, 베르단디. 나는 응하겠어.”
5층에서 영혼폭발에 휘말렸을 때와 정확히 동일한 감각이 내 몸을 지배했다.
하지만 극한의 긴장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때와 달리 이 순간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내 눈앞에 가녀린 어깨를 가진 한 여인이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달리아?”
정황상 이곳에서 만나게 된 여인이 여신 달리아일 수밖에 없다는 건 자명했으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게 된 건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느껴졌다.
그녀의 존재가 내가 찾던 죄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달리아는 등을 돌려 정확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주 최악의 죄수여.”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그대가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자부하는 만큼. 그리고 그대가 망각해버린 부분까지도 모두 알고 있지요.”
아리송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잊어버렸는지 알려줄 상대를 만나기 위해 나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곳에서 줄곧 날 기다려온 건가?”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대가 서 있는 시대와 완전히 동떨어진 시간 위에서 이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저는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고 도착할 그대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대화가 가능하잖아?”
“그것은 제 편지에 보낼 답장을 ‘미리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나누는 것은 양방향 소통이 아닙니다. 일방향이지요.”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오른쪽으로 한 걸음 이동했다.
그러자 달리아의 시선은 정확히 내가 이동한 만큼 움직여 다시 눈을 맞추었다.
이게 정말로 기록된 행동이란 말이야?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직관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마술처럼 느껴졌다.
내가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꺼내려 하자, 달리아가 선수를 쳤다.
“빨강입니다.”
“…….”
“블러디 크라운.”
“…….”
“아니요, 그분의 능력에 닿을 만큼은 아닙니다. 신격 위에도 단계가 있다면 오직 그분만이 가능하실 테죠.”
“……대단해. 나는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내지 않았는데.”
방금 일어난 일은 지독하게 놀라웠다. 이 순간에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만큼.
방금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질문을 달리아에게 던지려 했다.
‘내가 지금 속으로 생각한 색깔은?’
‘이 감옥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플레이했던 게임의 이름은?’
‘당신의 예지력은 교도관보다 뛰어난가?’
이 세가지 질문은 달리아를 만나기 전엔 생각해본 적 없는, 말 그대로의 임기응변이었거늘 여신은 손쉽게 받아쳐 버린 것이다.
질문이 내 입 밖으로 꺼내지기도 전에.
“이제 믿겠습니까? 더 이상의 시험은 유희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믿겠어. 확실히 시간 낭비할 때는 아니지.”
“다행이군요. 저와 달리 그대는 지금의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저의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나요?”
“내가 뭘 하면 되지? 벨리오나는 내가 당신을 만나야만 니오프론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 아이의 믿음은 보답받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그대는 저와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달리아는 등 뒤의 거대한 블랙홀을 가리켰다.
“저 구멍의 심부까지 걸어가십시오, 등반죄수여. 그리고 다시 돌아와 저를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겁니다.”
“사건의 지평선 너머까지…… 넘어가라고?”
아스티나의 설명을 들은 뒤라 저 블랙홀에 뛰어든다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 어떤 물질도 되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하니까.
“그대를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은 천 마디도 넘게 해드릴 수 있지만, 의미가 없습니다.”
“어째서?”
“그대는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할 테니까요.”
묘하게도 그 말을 들으니 블랙홀에 걸어 들어가도 내 영혼이 짓이겨지거나 영원의 감옥에 갇혀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여신의 말에서 나오는 권능일지도 모르겠다.
“좋아. 그럼 다녀오겠어.”
그렇게 나는 육체를 떠난 영혼의 상태로,
모든 인과율이 닿지 않는 사건의 지평선의 문턱을 넘어섰다.
*
블랙홀이 나를 집어삼키는 순간.
등골이 섬찟해지는 감각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안락한 어둠이 나를 감쌌다.
그런데도 계속 걸어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그리고 내 존재가 무한을 향해 뻗어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초의 순간부터 종말의 장막까지 창생사멸의 전부가 기록된 아카식 레코드의 앞에 섰습니다.]
[지금껏 등반죄수에게 걸려 있는 제약이 모두 해제됩니다.]
[이제 알고 싶어 했던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째서 우주 최악의 죄수인지 알고 싶다.’
그러자 어둠이 걷히고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대수림?”
시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녹색 때문에 3층 대수림으로 돌아온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산등성이와 나무들이 신화적 크기를 자랑했던 대수림의 그것보다 훨씬 아담한 규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보다 더욱 친숙한 장소.
훨씬 오랜 시간을 보낸 공간.
“지구?”
S자 코스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내 발아래 깔려 있었다.
그리고 하얀색 SUV가 먼발치에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호흡이 가빠지고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또 그때의 거기라고? 빌어먹을, 심마에 빠진 것도 아니잖아!”
아홉 살의 여름.
부모님이 죽는 순간을 목격하고 내 두 다리 또한 잃어버렸던 날로 되돌아와 있었다.
SUV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아빠.
그 옆에서 뒷좌석의 나와 상희에게 물컵을 건네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곧 그걸 만나게 될 거야.’
고개를 돌려 자동차가 향하는 절벽을 노려보았다.
간밤에 내린 폭우로 약해진 지반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 미약한 진동이 곧 산사태를 일으킬 것이고, 여름 휴가를 떠나는 평범한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선물할 것이다.
‘막아야 해.’
무의식중에 아론다이트를 소환하려 했다.
[인벤토리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기록. 관측할 수 있을 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단탈리온을 여기에 집어 던지지 않았던 건 잘한 일이었다.
여기는 녀석의 숙원이 이뤄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젠장.”
나는 감옥에 처음 떨어졌던 그때처럼 빈손으로.
그리고 그때보다 더한 무력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산사태가 차량을 덮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눈을 감고 싶었으나 그것 또한 불가능했다.
집채만 한 암석이 운전석을 깔아뭉갰다.
나는 이것을 내게 보여주고 있는 아카식 레코드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게 내 죄라고?”
아홉 살의 사내아이가 갑작스런 산사태를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었겠는가.
“어째서 이따위 것이 우주 최악의 죄라는 거야! 누가 보고 있다면 답해보라고, 개새끼들아!”
나는 처참하게 내려앉은 절벽 위에 떠 오른 채로 사방팔방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반파된 SUV의 천장에서 새하얀 빛기둥이 터져 나온 것이다.
‘차가 폭발해? 아니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당시 내가 타고 있었던 저 차가 폭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가 일어난 지 30분 정도가 흐른 뒤 구조대에게 발견되어 나와 상희는 구출되게 된다.
하지만 그건 물질계에서 일어났던 일.
영혼계에서 일어났던 일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부터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나의 왕이여.”
백의를 입은 청발의 미소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
고시원에서 자고 있던 나를 푸르가토리움으로 데리고 왔던 소녀.
교도관장의 진짜 모습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소녀는 내 질문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스르륵 지상에 내려앉았다.
나 역시 홀린 듯이 소녀를 따라 사고현장 차량 앞에 섰다.
아무리 실제 벌어진 일을 재생하는 것에 불과하다지만 부모님의 시체에 가까이 다가선다는 것은 숨 막힐 듯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아홉 살 소년이 자동차의 뒷좌석에서 걸어 나왔다.
문을 열지도 않고 그저 벽을 뚫듯이 통과해 버렸다.
“뭐야, 이게?”
나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 어릴 적의 내 모습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어릴 적의 나는 교도관장만을 주시했다.
“네가 직접 마중을 나온 거야?”
“그토록 고대했던 왕의 시찰이 끝나는 날이니까요. 푸르가토리움까지 머나먼 길이기도 하고. 당신과 나눌 이야기도 잔뜩 쌓여있잖아요?”
소녀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돌아가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그러나 아홉 살 꼬마는 그 손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에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등 뒤를 가리켰을 뿐.
“가고 싶지 않아졌어.”
“……그게 무슨 소리죠?”
청발의 소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경악한 얼굴이었다.
“이 별에 조금만 더 머무를 순 없을까? 내가 지금 너를 따라가면 저 아이는 일가족을 전부 잃고 험난한 삶에 혼자 내던져지게 될 거야.”
아홉 살의 내가 통통한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불과 다섯 살의 상희가 기절해 있었다.
“왕이시여, 한낱 필멸자의 육체가 품게 되는 감정 때문에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겠다는 겁니까? 그게 얼마나 커다란 죄인지 모르시는 건 아닐 테죠?”
“그래. 이건 감정 때문에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일이야. 하지만…….”
꼬마의 눈빛에 단호함이 어렸다.
“바로 그걸 배워오라며 네가 시찰을 보낸 거잖아? 이 비극엔 너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어.”
“……웃. 비겁하게 그런 식으로 회피하는 건가요?”
“부탁할게. 어떤 대가라도 달게 받겠어. 이 육체에 주어진 수명을 조금만 더 늘려줘. 너라면 할 수 있잖아?”
“정해진 죽음을 유예하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기간을 원하는 거죠?”
“최소한 상희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는 어때?”
“안 됩니다. 그건 당신뿐 아니라 저 인간 여성의 운명도 크게 뒤틀리게 되는 죄악이에요.”
인간을 초월한 두 존재가 내 여동생의 삶을 저울에 올려놓고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어?”
“저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의 순간으로 하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날. 그날이 오면 당신을 다시 데려갈 겁니다.”
청발의 소녀의 말투는 무척 서늘해져 있었다.
“봉마연옥 푸르가토리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