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삼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 (2)
“나는 너를 질투했다.”
벨리오나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언니는 내가 니오프론을 이길 수 없을 거라 말했어. 그냥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만 했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갚아줄 죄수는 내가 아니라면서.”
“여신 달리아가 내가 등장할 것을 예언했다고?”
“우스운 일이지. 언니가 내 품에서 네 이름을 이야기했을 때 넌 감옥에 입소하기는커녕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니까.”
토니아가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더니 벨리오나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치명적인 상처도 되돌릴 수 있는 요정술을 발휘해 보려 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안 되겠어. 내 힘으론 어찌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닌걸.”
토니아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환자의 몸을 개복했으나 손쓸 방법이 없어 수술대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의사처럼.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요정족의 여왕. 내 숨이 곧 끊어질 거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언니의 당부를 듣지 않기로 결심한 뒤부터 예고된 일이었지.”
벨리오나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힘겨워지기 시작한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벨리오나, 만철도시의 극장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 그때 당신은 내게 기원검의 칼자루를 줬고 나머지 조각을 전부 모아서 꼭 8층까지 와주기를 부탁했지.”
“맞아. 벌써 한참이나 오래전 일 같군.”
“그때 당신은 내게 거래를 제안했었어. 기원검의 소유권을 두고 목숨을 건 승부를 하자고. 내가 달리아의 원한을 풀어줄 죄수였다면 어째서 그런 제안을 했던 거지?”
“말했듯이 너를 질투했으니까. 복수는 자신의 손으로 이뤄내야 의미가 있는 거야. 네 등 뒤에 있는 마녀의 딸에게 물어보렴. 만약 다른 죄수의 손에 설공이 비명횡사해버린다면 그때의 기분이 어떨는지 말이야.”
아스티나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벨리오나의 말에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너를 꼬드긴 거야. 8층에 올라온 너를 없애버리고 내가 기원검의 주인이 되어 니오프론에게 복수할 생각이었지. 언니의 예언이 틀렸다는 걸 내 손으로 입증하고 싶었어.”
벨리오나는 첫 만남에서 자신의 심부름을 거절했던 내게 자신만만한 말투로 회중시계 모양의 호출기를 건넸었다.
‘내가 이걸 사용할 거라 장담하는 눈친데. 미래시라도 쓸 수 있는 건가.’
‘아니. 신탁파처럼 취급하지 말아 줄래? 나는 시곗바늘을 멈출 수 있는 권능이 있지만, 바늘 위를 벗어나지는 못해.’
그때엔 미처 알지 못했으나 인형의 몸에 빙의해 나와 마주 선 벨리오나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예언의 여신 달리아를 믿었으나, 복수를 위해서는 그 예언을 부정해야 했을 테니.
“네가 나를 만나러 올 때를 대비해 몇 겹이나 함정을 준비해 놨었는데. 결국 실패해버리고 말았어. 엉뚱한 놈이 치고 들어왔으니 말이야.”
말 그대로 벨리오나는 바늘 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절대영역을 폭주시키면서까지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탄식의 폭포로 가라, 슈바인 스트링거. 네가 지금껏 간직해 온 의문과 미혹을 전부 그곳에서 풀어낼 수 있을 거다.”
지드의 귀밑머리에서 전류가 번쩍하고 일어났다.
벨리오나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란 것이다.
“탄식의 폭포라니. 슈바인을 죽일 셈이냐? 거기에 흘러 들어간 죄수는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
뇌신의 어조로 미루어 보건대 탄식의 폭포라는 장소는 신격 죄수조차 두려워할 만큼 위험한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벨리오나의 태도는 진지했다.
“내 생각이 아니야. 언니인 달리아의 예언이지. 언니는 자신의 운명을 누구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걸 정확하게 기록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겠지. 그래서 층장인 니오프론조차 얼씬할 생각을 않는 탄식의 폭포에 뭔가를 남겨뒀다고 생각해.”
“그곳이 어떤 곳이길래? 달리아라는 죄수는 이미 한참 전에 금제를 어긴 죄로 소멸당했다면서. 탄식의 폭포로 가면 내가 누굴 만나게 되는 거지?”
“그건 나도 모르지. 내 말을 믿고 그곳으로 가든 안 가든 전적으로 너의 자유야.”
“내가 위험부담을 감수하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블러핑이나 허풍은 아니었다.
8층까지 올라온 이상 경거망동하는 순간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 전부 위험해질 수 있다.
내가 위험부담을 안고 미지의 장소에 뛰어드는 경우는 하나뿐.
도박을 걸만한 보상이 걸려 있을 때다.
“언니는 너를 가리켜 ‘우주 최악의 죄수’라고 했어. 그리고 본인조차 그렇게 불리는 이유를 알지 못할 거라고 했지.”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나를 가리켜 그런 표현을 쓴 존재가 한 명 있었으니까.
봉마연옥 푸르가토리움에 나를 데려온 교도관장.
그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표현이다.
“탄식의 폭포로 가면 네가 저질렀다는 우주 최악의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언니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여신의 이름을 걸어서…….”
“아니. 믿겠다. 지금의 당신에게 날 속이거나 기만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벨리오나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본능적으로 그걸 알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할 상대에게 적어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대우를 해주고 싶었다.
“고맙다, 슈바인 스트링거. 언니가 남긴 전언은 모두 마친 것 같으니 내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
“말해.”
“내 목을 잘라다오.”
“……어째서?”
“이대로 목숨이 다하더라도 형량을 끝마치지 못한 나는 감옥에 붙잡혀 있게 될 거야. 타천 죄수가 되어 스스로 강물로 기어가겠지. 언니와의 추억도, 내가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더러운 진흙더미와 하나가 되겠지.”
벨리오나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연명하고 싶진 않다. 그 전에 끝내줬으면 해.”
눈앞의 여신이 원하는 것은 일종의 안락사였다.
제르비어스가 묵직한 목소리로 내게 경고했다.
“같은 죄수를 죽이면 죄수살해죄가 추가될 거다. 그걸 잊지는 않았겠지, 용사야?”
“물론. 명심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등반죄수다.
1층에서부터 한 층을 오를 때마다 형량이 두 배로 곱해지는 처지를 감당하기로 마음 먹은 지 오래다.
[이름: 슈바인 스트링거]
[잔여형량: 12,800년]
어느덧 만년을 훌쩍 넘겨버린 내 형량에 죄수살해죄 하나쯤 추가된다 해서 문제 될 건 없겠지.
나는 벨리오나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기 위해 아론다이트의 칼자루를 쥐었다.
그러나 벨리오나가 손바닥을 들어 그걸 막아섰다.
“내가 원하는 상대는 따로 있어. 마녀의 딸 아스티나 류. 그대가 내 목을 잘라줬으면 좋겠는데.”
놀랍게도 처형인으로 지목을 당한 것은 내가 아닌 아스티나였다.
아스티나는 침착한 얼굴로 내 옆에 와서 섰다.
“굳이 슈바인이 아니라 나를 지목한 이유가 있어?”
“내 절대영역을 파괴해준 대가로 선물을 주기로 했잖아. 품에 숨기고 있는 아티팩트가 하나 있지? 그걸 꺼내서 네 검의 수정구와 융합시켜 봐.”
“이걸 말하는 거야?”
아스티나가 꺼내든 것은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보석이었다.
그것은 6층장인 바르한 니칸드로스,
타인에게서 빼앗은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해 많은 강자를 농락해온 흑마법사의 지팡이에 붙어 있던 보석이었다.
“레나스. 가능하겠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물질의 형태를 변환시키는 레나스의 무장연금술이 발휘되었다.
오토마타 소녀가 아스티나의 청룡패웅검을 몇 차례 만지작거리자 붉은 보석은 토성의 고리처럼 월장석의 주변에 링 형태로 고정되었다.
벨리오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검으로 나를 죽이면 시곗바늘의 여신인 내가 쌓아온 권능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갈 거야. 뛰어난 흑마법사인 너라면 그 그릇에 담긴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겠지.”
예상치 못했던 커다란 선물에 아스티나는 당황한 듯 보였다.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 이유는 뭐지?”
“복수를 시도할 힘도, 기회도 없었던 선배가 후배에게 남기는 애정 어린 선물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군. 내 힘을 사용해서 설공에게 한 방 먹여줘.”
“……그렇게 하지.”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벨리오나는 눈꺼풀을 내리감았고 나는 조용히 캉이의 앞으로 가서 구미호 소년이 참혹한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청룡패웅검이 내려치기 전에 벨리오나는 내 이름을 불렀다.
“슈바인 스트링거. 나는 예언으로부터 끝까지 발버둥 쳤어. 비록 실패했지만, 거기엔 한 점의 후회도 없다. 너도 부디 그렇게 살기를 바라.”
*
벨리오나의 범선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선장의 목숨이 다한 순간 배는 더 이상 존재할 목적이 없어지게 된다.
신격 죄수가 만들어낸 배였으니만큼 평범한 목재가 쓰인 건 아니었을 테지만 불씨를 제공한 쪽도 평범하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화르르르륵.
몇 분 동안 업화의 불길을 쏟아내던 제르비어스가 조금 피로한 얼굴로 날아왔다.
“고생했다.”
“이 감옥에 들어와서 온갖 일을 겪어봤지만…… 여신을 화장시키게 될 줄은 몰랐군.”
지드 역시 마지막까지 벨리오나의 범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뒤로 다가가자 그는 방금 전까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대와 벨리오나를 화해시켜 연합 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거라 믿었거늘.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다, 슈바인 스트링거. 기원검의 파편을 니오프론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이제 무슨 수로 녀석에게 대항해야 할지 암담하군.”
“괜찮아. 당신 탓이 아니었잖아.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정말로 벨리오나의 유언을 따를 셈인가.”
“적어도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
“그대의 결심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탄식의 폭포까지 안내해주마.”
“그렇게까지 신경 써줄 건 없는데.”
“부담 갖지 마라. 층장에게 반기를 든 순간 어차피 내게 안전지대는 없는 셈이니까. 그대와 니오프론 사이에 어떤 결착이 벌어지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지드는 다시 먹구름을 소환해 올라탔다.
우리는 다시 보트로 변신한 레나스에게 신세를 진 채 타천의 강가로 돌아왔다.
“어디로 가면 되지, 지드?”
“니오프론의 배가 있는 곳은 강가의 상류 끄트머리다. 녀석이 거기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오직 하나야. 탄식의 폭포로부터 가장 먼 곳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야?”
“감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도 그 악명높은 폭포를 구경하러 다가가 본 적이 있지. 물론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무얼 본 것이냐고 묻자 지드의 입에선 생각지 못했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대는 사건의 지평선이란 개념을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