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삼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 (1)
“이제껏 설공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이번에는 달랐어. 가로막는 것은 전부 부숴버리겠다는 기세로 덤벼들더군. 기원파의 죄수들이 전부 죽거나 타천당했지.”
벨리오나는 레나스의 입을 통해 자신이 당했던 참극을 이야기했다.
이 범선이 본래 있었던 장소에 모여 있던 타천 죄수들.
개중엔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활동하던 신격 죄수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지드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왜 그리 어리석은가, 벨리오나. 맞서 싸우지 않고 달아날 수도 있었지 않나.”
“당신이라면 어땠을 것 같은데? 절대영역에 침범한 적을 두고 꽁무니를 만 채 달아났을 것 같아?”
“……아마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겠지.”
“흥. 그런 주제에 누굴 나무라는 거야.”
“그대는 나처럼 전사도 아니잖은가. 목숨을 더 중히 여겼여야지.”
“이쪽도 나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오토마타를 매개체로 통하고 있었으나 벨리오나의 선언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그래서 지드도 차마 그 말엔 대꾸하지 못했다.
자동인형의 고개가 스르륵 꺾여 나를 향했다.
“강가로부터 먼 곳에 날 데려왔군, 슈바인 스트링거.”
“거기 놔두면 당장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거든.”
“내 배를 구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지. 하지만 타천의 강가로부터 떨어진 덕분에 내 절대영역이 붕괴되고 있어. 이런 부탁하기 민망하지만…… 나를 여기서 꺼내줄 수 있겠어?”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당신이 건 주술 때문에 접근하면 시간이 정지돼 버리잖아. 왜 직접 열어주지 않는 거야?”
“말했듯이 죽어가는 중이라서 말이야. 내 절대영역은 폭주 중이야. 시전자도 통제할 수 없는 단계로 넘어가 버렸어.”
지금의 벨리오나는 단단한 방공호에 들어가 몸을 숨긴 처지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방문자가 나타나길 바라면서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문제라고 한다면 그 방공호의 문을 열 방법이 장본인에게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때 벨리오나가 의외의 상대를 지목했다.
“거기 있는 마녀의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나 말하는 거야?”
“그래. 이 중에서 오직 너만이 날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벨리오나는 자신을 꺼내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아스티나에게 설명해 나갔다.
갑판 위에 발 딛고 선 존재 중에서 둘의 대화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청중은 없었다.
“중력 제어로 절대영역에 구멍을 내겠다고?”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지.”
“하지만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타인이 전개한 술식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은 마법사들에게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위야. 게다가 그게 신격의 베틀에서 짜인 실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좌표 계산이 조금만 빗나가도 나는 시간의 미아가 되어버릴 거야.”
“신격의 안목이 틀릴 일은 없어. 나는 네가 가진 힘의 한계치와 성장 가능성까지 따져본 뒤에 이를 요청하는 거란다. 네 역량은 이미 네 모친을 뛰어넘었어. 아마도 부친에게서 이어받은 천혜의 육체가 마력 회로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스티나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내 가족 이야기를 알아? 8층에 묶여 있는 당신이 무슨 수로 엄마와 아빠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야?”
“숙적이 애타게 찾고 있는 목표물이 무엇인지 파악해두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설명이 되었나?”
“아니. 안 됐어.”
팔짱을 낀 아스티나는 내게 따로 이야기하자는 눈빛을 보냈다.
아무리 작게 소근댄다 해도 이 장소에 둘이나 있는 신격 죄수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서 아스티나는 내게 귓속말을 보냈다.
-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놔두고 가자.
- 죽어가는 상대를 외면하잔 말이야?
- 내 가족사에 대해서 저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게 꺼림칙해. 마치 내가 8층에 도착해서 자기를 만나러 올 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투잖아. 수상하기 짝이 없어.
- 하지만…….
- 애초에 저 여자는 네가 애써 모아온 기원검을 꿀꺽하려던 심보를 키워온 죄수야. 그마저도 지금은 설공에게 파편을 빼앗긴 상황이고. 이쪽에서 도와줄 의리 따윈…….
“도와줄 의리 따윈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이보다 정확할 수 없는 타이밍에 벨리오나가 끼어들었다.
아스티나와 나는 말문이 막힌 채 레나스의 치켜 올라간 눈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이에 의리 같은 걸 내세울 생각은 없어. 그러면 마음 편하게 거래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군. 날 여기서 꺼내주면 네게 반드시 필요한 걸 선물로 주지.”
“내가 필요로 하는 게 뭔지 어떻게 알고?”
“설공의 죽음을 바라고 있는 거 아니야? 그것도 네 손으로 직접 그 자의 숨통을 끊고 싶어 하지. 이 감옥 전체를 뒤져봐도 네가 품은 원한보다 강렬한 마음의 소유자는 없을걸.”
“당신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한다면?”
“너희가 3층에서 쓰러트린 설공은 본체가 아닌 그림자야. 그 자가 진짜로 살심을 품으면 그보다 훨씬 상대하기 버거워지지.”
“나도 벌벌 떨던 그때의 내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증명해 봐. 설공은 완벽에 가까운 내 절대영역을 자신의 힘으로 찢고 들어왔어. 네가 같은 걸 해낼 수 없다면…… 복수는 허망하게 실패하고 말 테지.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그들이 간절히 지키려 했던 네 목숨마저 설공의 칼 앞에 내어주는 꼴이지 않겠어?”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게 죽음을 앞둔 죄수가 마지막으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인지, 원수를 조롱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스티나가 망설임 없이 청룡패웅검을 빼들었다.
“이 배 위에서 전부 떨어져 있어. 다칠지 모르니까.”
나는 오래전에 저 눈빛을 본 적이 있다.
4층 만철도시에서 ‘음란의 마녀’ 에띠소크를 박살 낼 때 정확히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쩔 셈이야, 아스티나?”
“중력 마법의 압착점을 한계까지 끌어올려서 저 여자의 절대영역에 접목시킬 거야. 시간은 중력장 안에서 휘어지기 마련이니까. 고여 있는 호수에 샛길을 파는 거지.”
그 설명이 내게는 핵폭탄의 표면에 바늘구멍을 뚫어서 폭발을 막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위험천만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과격한 방법인 줄 알았으면 반대했을 거야. 천천히 더 안전한 길을 찾아보면…….”
“그 사이에 저 여자가 뒈져버리면? 엄마와 아빠의 이름을 제멋대로 거론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너도 얼른 갑판에서 떨어져.”
내가 알겠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머리 위에 장막을 펼쳤다.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단신으로 귀혼산장에 쳐들어와 수백의 마교도들을 때려눕혔을 때 이후로 저런 대규모의 마법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젠장. 어디 마음대로 해 봐, 아스티나.”
천마어기행공으로 날아오르자 상공에는 먹구름에 올라탄 지드와 모두를 등에 태운 캉이가 걱정 어린 얼굴로 범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소용돌이처럼 휘감겼다. 그녀의 손에 들린 청룡패웅검의 월장석 안으로.
마법진마저 끌어당길 만큼 거대한 중력장이 손바닥만 한 구체로 생성된 것이다.
[마도제국학파 중력마법]
[그래비티 메가 프레스]
갑판의 절반이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벨리오나의 절대영역으로 보호받고 있던 선장실 전체가 격하게 요동치더니 다음 순간,
보이지 않는 거인이 잡아챈 것처럼 천장이 무참하게 박살 나버렸다.
*
“참으로 요란한 구출방법이네. 일단 고마워.”
무너진 잔해더미에서 피투성이의 벨리오나는 웃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녀의 목에 청룡패웅검의 날을 들이밀며 격한 숨을 내뱉었다.
“어디 또 한 번 지껄여보시지.”
“성질을 건드렸다면 사과할게.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어서 조금 과격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어.”
나는 아스티나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다행히 그녀는 버티지 않고 내 손길을 따라와 주었다.
지드가 벨리오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탄식했다.
“손쓸 방법이 없군. 정확히 급소를 난자당했나.”
벨리오나의 명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깔끔하고 무자비한 검에 의해 꿰뚫린 상처였다. 선장실의 바닥은 이미 붉은 액체로 철벅이고 있었다.
“내 몸뚱이는 이미 망가진 태엽이나 마찬가지야. 가까스로 죽음을 유예하고 있는 거지, 조금만 힘이 빠져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걸.”
“기원검의 힘을 사용했다면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알잖아, 지드. 나는 그 검을 사용할 수 없어. 이미 오래전에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그 또한 달리아의 예언이었던 건가.”
“맞아. 오직 나만 거부하고 있었던 사실을 결국 받아들이기로 한 거지. 내 배를 정지된 시간에 가둬두면 당신이 이들을 데려올 것 또한 알고 있었어. 모든 게 언니의 말대로 흘러갔지.”
영문 모를 이름이 지드와 벨리오나의 대화 속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설명을 요구하자 벨리오나는 창백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일전에 설명한 적 있지, 슈바인 스트링거? 층장 니오프론이 신탁파의 이름을 걸고 예언의 아이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건 어떤 예언자의 죽음 때문이었다고.”
그 죄수의 이름은 달리아.
운명과 방직의 여신이 가진 이름이었다.
달리아에게는 입소 직후 교도관장의 엄격한 금제를 받게 되었다. 미래를 정확하게 엿볼 수 있는 그녀의 힘을 동료 죄수들에게 선보일 경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금제를.
하지만 니오프론은 달리아의 사정 따위 관심 없이 그녀를 압박했고 결국 층장이 듣고 싶어 하는 결정적인 예언을 들려주고야 말았다.
“그 예언이 정확하게 뭐길래?”
“푸르가토나투스.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 당시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예언의 아이가 곁에 있어야 9층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었어.”
레나스를 제외한 모두가 그 순간 아스티나의 얼어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탈옥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니오프론의 질문에 예언의 여신이 지목한 주인공이 아스티나였던 것이다.
“달리아를 언니라고 부르던데. 가까운 사이였나?”
“시간을 정지시키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한 가지 커다란 결점이 있어. 모두의 시간과 동떨어진 채 혼자만의 순간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이지. 그리고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였어. 모두가 현재에 발붙이며 살아가는 와중에 고독하게 앞날의 무게를 짊어져야만 했으니까.”
동병상련.
감옥에서 만난 두 여신이 의자매가 되는 것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니는 나를 지키느라 죽었어.”
달리아가 니오프론의 겁박에 굴복했던 이유.
금제를 어기면서까지 층장이 듣고 싶었던 예언을 해줄 수밖에 없었던 건 벨리오나를 니오프론의 마수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예언을 들은 뒤 니오프론은 언니를 홀로 남겨둔 채 교도관장이 목숨을 거둬갈 때까지 방치했어. 언니의 곁에 붙어 있던 내겐 조금의 관심도 없었지.”
눈물은 여신에게도 찾아온다.
벨리오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어갔다.
“언니는 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어. 그래서 웃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어줬지만 난 아니었지. 제정신을 잃고 울부짖었다.”
각기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두 여신이 나머지 한쪽을 상실했다. 인간의 애도와 그리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언니의 입에서 두 번째 예언이 내려졌기 때문이야. 지금 이 순간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했던 적 없는 아주 길고 긴 예언이. 그걸 들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벨리오나의 피 묻은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바로 너다, 슈바인 스트링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