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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57화 (257/300)

#257. 무너진 꼭짓점 (4)

“내가 타천의 강물을 마셨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백발의 타천 죄수는 내 말을 믿지 못한다는 듯 눈동자에서 분노를 거두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에 담긴 힘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아서 손쉽게 떨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집착은 내 예상보다 대단했다.

치이이이익.

강제로 뿌리쳐진 두 팔이 아론다이트의 칼날을 덥석 붙잡은 채 버텼다.

성검의 날은 파사(破邪)의 속성이 있기에 사악한 존재라면 닿는 것만으로도 고통에 몸부림치게 된다.

타천 죄수의 손바닥에서 푸른색 불길이 일어나며 접촉면을 태워버리고 있었다.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그대에게선 분명 타천의 강물을 마신 자만이 가진 냄새가 나노니.”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나는 여기 올라온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걸.”

“부디 비결을 알려다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잊고 싶지 않단 말이다.”

“모른대도, 글쎄.”

벽창호와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대뜸 덤벼들어선 타천의 강물이 어쩌고, 멀쩡할 수 있는 비결이 어쩌고 하니 대답해줄 말이 이쪽에서도 궁색했다.

그렇게 우물쭈물한 대치 상황이 누군가에겐 심상치 않은 위기로 보였던 모양이다.

[마왕군 폭렬마법]

[2급 오의 ‘지옥파쇄포(地獄破碎砲)’]

어디선가 날아온 보라색 마기가 타천 죄수의 무방비한 등을 때렸다.

“크아아아아아!”

그는 뭐라도 붙잡으려는 듯 허우적댔지만 허망한 포물선을 그리며 강물 아래로 가라앉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괜찮냐, 용사야?”

“어, 응. 그래. 다친 곳은 없어.”

“네가 처리 못할 정도의 상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뭘 그렇게 망설이고 있었던 거야?”

“……저 녀석이 내게 말을 걸어왔거든.”

“뭐라고 했길래?”

“아니야.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제르비어스는 오메가 위프에 매달린 채 나를 내려다보다가 곧 갑판 위로 돌아갔다.

성검을 다시 인벤토리에 역소환시키며 타천 죄수의 마지막 눈빛을 되새김질했다.

‘추락할 때는 괴물의 눈빛으로 돌아가 있었어.’

어쩌면 성검이 그 백발 죄수의 육체를 꿰뚫으면서 잠시나마 이성이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8층 죄수가 거짓으로 기만을 유발하려 했던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얻게 될 아무런 이득도 떠오르지 않았고.

이 강가에서 처음 마주쳤던 타천 죄수가 떠올랐다.

단탈리온은 그가 내게 ‘물어볼 것이 있어 접근했다’고 알려줬다.

어쩌면 그 또한 내게 타천의 강물을 마신 자 특유의 냄새를 맡았던 건 아닐까.

푸르가토리움과 이 8층에 대해서 밝혀내야 할 것이 숙제처럼 던져진 기분이었다.

교도관장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녀석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거야?’

‘글쎄요. 그것을 알아내는 건 당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변수이며 여러 번의 행운도 중첩돼야 가능할걸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 당신이 자신의 죄를 기억해내지 못하면…… 당신의 영혼은 절대로 푸르가토리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뿐.’

내가 저지른 죄를 기억 못 하는 이유.

그게 타천의 강물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먹이를 잃고 흩어지는 타천 죄수들의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도 어지러워지는 듯했다.

*

벨리오나의 범선은 본래 있던 곳에서 한참 떨어진 지면에 불시착했다.

지드와 친구들이 모두 갑판 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여기는 안전한 거야?”

“적어도 강가로부터는 멀어졌으니 당장 타천 죄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나나 벨리오나는 강물로부터 오래 벗어나 있을 수 없다. 신격 죄수들에게 내려진 주박 같은 거지.”

지드의 설명에 따르면 8층의 육지는 극도로 불안정한 곳이라고 한다. 시시각각 세계가 중첩되고 분열하면서 높은 격을 가진 자를 감염시킨다는 것.

“쉽게 설명해서 인간의 생활권으로 비유하자면 분 단위로 폭염과 혹한이 번갈아서 습격하는 야생이나 다름없지. 우리가 항상성을 보존한 채 절대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건 강물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타천의 강물이 당신들에게 그렇게나 해롭다면서 왜 떠나지 못하는지 이제야 알겠군.”

“그래. 언젠가는 우릴 완전히 잡아먹게 될 강가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운명. 그게 8층 신격 죄수들에게 내려진 시련이자 형벌이다.”

8층 교도관의 이름은 ‘숭배를 강탈하는 십자가’.

보통은 교도관의 이명에서 해당 층의 ‘시련’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타천의 강가는 죄수들에게서 말 그대로 ‘숭배’를 강탈하는 형벌의 장소이면서, 타천의 순간을 최대한 늦게 맞이할 수 있는 안전지대이기도 한 것이다.

“자, 그럼.”

지드는 타륜을 마주 보고 서 있는 문을 가리켰다.

범선의 선장실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라는 설명과 함께.

“벨리오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보자고.”

지드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뇌창을 내게 건네었다.

“이걸 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내가 신호하면 망설이지 말고 그걸 휘둘러 줬으면 하네.”

뇌창을 받아들자 눈 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름: 뇌창 토니트리움]

[등급: S급]

[뇌신 지드의 권능이 담긴 벼락의 창입니다. 현재 무기의 주인이 생존해 있는 아이템이므로 용사의 인벤토리에 수납할 수 없습니다.]

지드는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물러나란 손짓을 한 뒤에 선장실 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평범해 보이는 손잡이였으나 지드는 그것을 손톱만큼도 돌리지 못했다.

파지지지직.

그의 오른팔에 거친 전류가 휘감긴 걸 보아 가진 힘을 최대한 쏟아붓는 듯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드의 시선이 다급하게 나를 향했다.

“역시 안 되는군. 이 팔을 잘라주게.”

“뭐라고?”

“설명할 시간이 없어! 어서!”

“……젠장!”

내게 아군의 신체를 절단시키는 취미 따위는 없다고 볼멘소리를 내고 싶었으나 지드의 목소리가 워낙에 다급했다.

부우우우웅!

내가 가진 스킬에 창술은 없었으나 그저 휘두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 토니트리움을 내려치자 지드의 팔꿈치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파직.

그러자 손잡이에 달라붙어 있던 지드의 손과 손목이 미약한 전류로 흩어지더니, 곧 본래의 주인에게로 되돌아왔다.

다시 돋아난 오른팔을 만지작대는 지드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그게 고통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열리지 않는 거야?”

“그래. 여전히 벨리오나의 절대영역이 선장실 주변을 막아서고 있다. 그대가 보기엔 내가 저 손잡이를 붙잡는 것처럼 보였겠지?”

“아니었어?”

“손잡이에 누군가가 접근하는 순간 시간이 느려지는 걸 경험했다. 가까워질수록 내 손은 느려질 테니 억겁의 시간이 주어졌더라도 나는 저 손잡이를 건드릴 수 없었을 거야. 이게 일전에 내가 그대에게 말했던 거다. 신격이 자신의 절대영역으로 개념을 강요하는 것 말이야.”

내가 지드의 팔을 재빨리 잘라내지 않았더라면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절대영역이 지드의 전신에 퍼졌을 거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섬뜩한 순간이었다.

“내 신체는 전류로 이뤄져 있어. 그래서 뇌창으로 당한 상처엔 피해를 입지 않아.”

“만약에 내가 문을 열려고 시도해 본다면?”

“실패했을 시 나처럼 팔을 잘라야겠지. 그대의 팔이 자유자재로 탈부착하는 게 아니라면 시도하는 걸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

이래서야 선장실 안에 처박혀 있는 벨리오나에게 닿을 방법이 곤궁해진다.

그때 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꽃 하나가 우리에게 날아왔다.

“말씀하신 대로 관객님들의 생체 신호를 추적해왔습니다.”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온 오토마타 레나스였다.

레나스는 지드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야기를 듣더니 감정 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한 번 열어볼까요?”

“네가?”

“아시다시피 저는 신체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는 자동인형입니다. 그 벨리오나라는 죄수의 개념에 잠식당하더라도 분절시키면 그만이니까요. 천공섬에선 목이 분리되었었지만 관객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한 번씩 교차했다.

확실히 우리 중에서 신체가 잘려 나가더라도 복구할 방법이 있는 일원은 레나스가 유일했으니까.

“그럼 부탁할게, 레나스.”

“알겠습니다.”

지드에게 뇌창을 돌려준 뒤 한 걸음 물러섰다.

모두가 바짝 긴장한 가운데 정작 도전자로 나선 레나스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덥석 손잡이를 붙잡았다.

감정이 없는 오토마타는 이런 게 무섭다니까.

몇 초의 시간이 흘렀으나 손잡이를 붙잡은 레나스의 몸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도 흩날리지 않는다.

“어때, 레나스? 돌릴 수 있겠어?”

“…….”

“레나스?”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머리와 몸통이 서로 분리된 상태에서도 레나스가 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낙관적인 건 아니었다.

그때 캉이가 레나스의 흉부를 가리켰다.

“형아, 누나 색깔이 이상해. 원래 안 저랬잖아.”

레나스의 가슴 중앙에는 연금무장술의 핵이 되는 마정석이 박혀 있다.

레나스가 힘을 사용할 때마다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 마정석이 발하는 광채 때문이었다.

그것이 처음 보는 보라색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안 되겠어, 자르자. 더 늦으면 레나스가 어찌 될지 모르잖아.”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던 순간이었다.

레나스의 고개가 미약하게 움직이더니 똑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 친구의 만행을 멈춰달라고 해, 슈바인 스트링거.”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내리치지 않은 건 그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레나스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음성이 완전히 낯설었기 때문이다.

경계심으로 날선 말투가 아스티나에게서 흘러나왔다.

“당신, 누구야?”

하지만 그 생경함은 나와 지드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벨리오나?”

“그래, 오랜만이야. 반가움에 축포라도 쏴주고 싶은데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내 환영파티에 잿가루를 뿌리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네.”

“……지금은 레나스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건가?”

“맞아. 4층 만철도시에서 내가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나는 시곗바늘뿐 아니라 톱니바퀴의 여신이야. 지성체가 만든 기계장치의 지배권은 언제든 빼앗아올 수 있지.”

레나스의 몸을 움직이는 통제권은 현재 벨리오나가 쥐고 있는 듯했다.

묘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모두 레나스와 함께 여러 층을 오르면서 이 오토마타 소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일정한 음색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레나스는 마치 환락가 요부의 혼이라도 덮어쓴 것처럼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서워. 레나스 누나는 안 저런단 말이야.”

오죽하면 캉이가 본능적으로 꼬리를 말게 될 정도였다.

지드가 끼어든 것은 이 타이밍이었다.

“벨리오나, 회포를 풀 시간을 더 주고 싶지만 그대도 알고 있듯이 그럴 시간이 없군. 절대영역을 왜 이런 식으로 폭주시킨 건지 말해주겠나.”

오토마타의 앙증맞은 입술이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본래 주인에게선 상상도 못 할 욕설이 툭 튀어나왔다.

“빌어처먹을. 습격을 당했지 뭐야. 설마 신탁파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날 공격할 줄은 몰랐어. 전에 당신이 말했던 8층의 삼각형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꼭짓점 하나가 무너진 거지.”

“니오프론이 너에게도 수하를 보냈나? 하지만 그대가 그 정도로 당할 수준은…….”

“딱 한 놈만 아니었다면 괜찮았겠지.”

이어지는 벨리오나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설공. 그 망할 칼잡이 놈이 내 몸을 난자한 뒤에 기원검의 파편을 강탈해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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