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타천의 강가 (4)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최종영창(最終詠唱)]
[아스트로노미컬 디스트럭션(Astronomical Distruction)]
아스티나의 영창이 끝나고 점으로 압축된 중력폭발이 일어났다.
아스티나의 마법이 나와 엇비슷했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렸다는 걸 절감하게 됐다.
캉이가 진명을 받고 한층 더 진화한 것처럼 아스티나 또한 진정한 9클래스 마법사로 성장한 것이다.
중력마법 최종영창의 이명은 ‘천체파괴술’.
모든 물질을 우그러뜨리는 마력의 방출에도 니오프론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배 위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볼까.’
아스티나가 8층장을 일격에 쓰러트릴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껏 아무런 힘의 방출도 보여주지 않은 니오프론이 어떤 방식으로 전투에 나서는지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파지지지지직!
그 순간, 타천의 강가 전체에 백광이 몰아치며 자연계에선 목도할 수 없는 두께의 벼락이 내리꽂혔다.
그것은 아스티나의 중력마법을 강제로 해제시키며 원형으로 새카맣게 그을린 불모지를 만들어냈다.
“누구야? 뭐 하는 자식이냐고.”
아스티나의 험악한 말은 방해꾼을 향했다.
그제야 나는 벼락이 내리꽂힌 자리에 우뚝 솟아 있는 기다란 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창 위에 한 미남자가 우아한 포즈로 서 있었다.
“……지드?”
3층 대수림에서 내 앞에 현신했던 뇌신 지드.
내가 그를 알아보자 지드는 해맑은 얼굴로 황금색 후드를 펄럭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슈바인 스트링거. 다행히 너무 늦지 않은 모양이군.”
“나도 우리가 다시 만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런 상황은 아니었지.”
당시 지드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전성기 시절을 복원해 대결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지드는 그것을 수락해 준 감사의 의미로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를 내게 주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게 호의만을 보여줬던 자였기에 이런 식으로 우리 앞을 막아설 줄은 몰랐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내가 방금 힘을 쓴 건 그대들을 해코지하려 한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그러면서 지드는 곡예를 펼치듯 땅 위에 내려선 뒤 뇌창을 잡아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향해 살기를 내뿜고 있는 아스티나를 향해 윙크했다.
“거기 계신 숙녀분도 노여움을 푸셨으면 좋겠군. 아마 이 순간이 끝나면 방금 내가 벌인 짓을 고맙게 생각할 테니까.”
지드의 뇌창이 향한 곳은 니오프론이었다.
니오프론의 얼굴에 처음으로 지겨워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노골적인 한숨과 함께 그가 입을 열었다.
“또 당신입니까. 징글징글하군요, 지드. 저분들과의 만남을 제가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잘 알면서 이렇게 초를 치시나요.”
“어지간해선 꿈쩍도 않는 네놈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는 순간을 놓칠 수야 없지. 네 꿍꿍이가 뭐가 되었든 나를 죽이지 않는 한 뜻대로 되긴 어려울 거다.”
지드와 니오프론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둘은 오래된 앙숙처럼 보였다.
하나 여전히 무방비 상태로 배 위에 앉아 있는 니오프론과 달리 언제라도 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뇌창을 단단히 부여잡은 지드의 모습은 퍽 대조적이었다.
“당신이 제 예상보다 더 빨리 나타난 건 예상 밖이었다는 걸 인정하도록 하지요.”
“네가 보낸 부하들은 잘 돌려보냈다. 쯧쯧. 그러게 진심으로 나를 묶어둘 생각이었다면 설공 녀석도 같이 보냈어야지.”
니오프론은 지드가 내 앞에 나타날 것을 예상해 미리 조치를 취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천마 설공을 운용할 수 없었기에 일이 틀어졌던 것이다.
지드의 뇌창에서 신령스러운 울부짖음이 새어 나왔다.
“니오프론, 네놈이 배 밖으로 기어 나오는 날이 얼마 되지 않잖아? 여기서 못다 한 승부를 이어서 치러보는 건 어때.”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군요. 그리고 뭐가 못다 한 승부라는 겁니까. 매번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난 쪽은 당신 아닙니까.”
모욕에 가까운 발언이었으나 지드는 해맑게 웃었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승자가 갖지 못하는 패자만의 미덕이니까.”
“승자는 승리에 집착하고 패자는 승자에게 집착한다는 말도 있지요.”
“그래서? 달아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관두지요. 당신과의 힘겨루기는 별로 재미있지도 않으니까요. 어차피 제 볼일은 거의 끝난 거나 다름이 없고.”
니오프론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무도 쥐지 않은 노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강 상류로 떠나면서 아스티나에게 다시 한번 질척였다.
“제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아스티나 류. 저를 거치지 않고 설공을 만나는 방법은 없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절 찾아오게 될 거예요. 이 강 상류를 거슬러 오면 제가 머물고 있는 배가 있습니다. 찾기는 쉬울 겁니다. 그럼 이만.”
니오프론의 배는 점점 속력을 내더니 이윽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지드는 등을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기세등등했던 것과 달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휴우, 진짜로 한 판 붙자고 하면 어쩌려나 걱정했네.”
“방금 전엔 허세를 부렸던 건가?”
내가 묻자 지드는 뇌창을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였다.
“저놈은 못 이겨.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제대로 한 방 먹여본 적도 없을 정도야.”
지드의 시선이 아스티나를 향했다.
“이봐, 아가씨.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졌을 거야. 니오프론이 절대영역을 전개하는 순간 손쓸 새도 없이 납치당했을걸.”
“그거야 당신 생각이지. 이전에 슈바인을 도와준 죄수라는 이야기만 아니었더라도 치워버렸을 거야.”
“호오. 마치 아가씨가 나를 봐주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언행을 주의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건가. 여기가 꼭대기 바로 밑층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나는 복수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입소하자마자 이 층에 배정된 주제에 그 증오의 깊이를 알 수 있을 리 없지.”
“흐음. 말 잘했군. 증오로 따지면 저 니오프론을 미워하는 내 마음도 아가씨의 그것 못지않을 거야. 그리고 앙숙을 괴롭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녀석이 간절히 원하는 보물을 빼돌려서 박살 내버리는 방법도 있지.”
“해 보시던가.”
아스티나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설공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회까닥 돌아버리기 때문이다.
뇌신의 속눈썹에서 날카로운 전류가 흘렀다. 그가 흘깃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이 아가씨를 죽이면 그대가 많이 곤란해지려나?”
“곤란해지는 정도가 아니지. 그전에 내가 막을 거야.”
나는 아스티나와 지드 사이에 서며 팔짱을 꼈다.
뇌신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일취월장했군. 오러코어의 수준이 일전의 만남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어. 이런 때만 아니었어도 그대와 한바탕 칼춤을 추는 것도 즐거운 유희가 되었을 텐데.”
“이런 때라니?”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층장 니오프론이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르팔타커스 이후 최초로 일곱 개의 열쇠를 가진 수왕 후보가 8층에 등반했지. 탈옥을 꿈꾸는 자들이라면 앞으로 벌어질 일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될 거야.”
수왕 후보는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지드는 자리를 옮기고 싶어 했다.
“그대들에겐 별 영향이 없겠으나 이 강물은 나 같은 신격 죄수들에게 무척이나 해로워. 아차 하는 사이에 잡아먹힌달까? 그대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죄수가 있어. 함께 가지 않겠나.”
“……10분만 생각할 시간을 줘.”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지드는 한 걸음 물러나서 뇌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시커먼 구름으로 만들어진 배 한 척이 소환되었다. 지드는 그 위에 선 채 강 상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저자를 따라갈 생각이야?”
아스티나가 물었다.
나는 충분히 생각을 정리한 뒤에 대답했다.
“우린 이 층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어. 믿을 만한 동맹군, 최소한 호의를 가진 안내자가 있다면 탐색이 한층 수월해질 거야.”
“나는 못 믿겠어. 말이 신격 존재라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흥분해서 싸움 걸기 좋아하는 무뢰한처럼 느껴지거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여기에서 가장 흥분해 있는 건 너야, 아스티나.”
“설공이 나와 내가 있던 세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어떻게 잠자코 있으란 말야.”
“알아. 하지만 네가 화를 못 이겨서 뛰어든다면 층장의 펴 놓은 함정에 대책도 없이 걸려드는 거라고. 조금만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봐. 어차피 우리가 다음 층에 가려면 열쇠가 필요하고 설공은 층장의 심복이라며. 그러면 원치 않아도 넌 설공과 만나게 될 테니까.”
유심히 듣고 있던 제르비어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긴가민가할 때는 그 녀석이 있지 않냐, 용사야. 단탈리온에게 물어봐라.”
아스티나는 그것까지 막아설 생각은 없다는 듯 한 발짝 물러났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마도서 단탈리온은 이렇게 말했다.
- 죄수 지드의 목적은 탈옥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층장 니오프론을 향한 적의에 사로잡혀 있지요. 그가 용사님에게 한 제안에 거짓은 없습니다. 니오프론을 견제하기 위해서 용사님과 동맹을 구축하고 싶어 하는 거죠.
“지드에게 내 힘이 필요한 이유는 뭔데?”
- 용사님께는 마지막 한 조각만 남은 기원검이 있으니까요. 죄수 지드가 용사님을 안내하려는 곳에 바로 그 마지막 조각이 있습니다.
“좋아. 그 정도면 대답이 됐어.”
- 조심하세요, 용사님. 이전 층들과 다르게 8층에는 제가 파악할 수 없는 장막이 여러 겹 둘러쳐져 있습니다. 아마 가장 흉악한 죄를 저지른 죄수들만이 붙잡혀 왔기 때문이겠죠. 특히…… 제 조언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최대한 저 강물과는 떨어진 곳에서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또 왜지?”
- 거기에 답변드리는 건 어렵지 않으나 용사님께서 갖고 계시는 MP의 절반 이상을 필요로 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이 강물에 대한 지식은 지드 또한 갖고 있습니다. 용사님께서 그와 동행을 결정한다면 마력의 소진 없이 답을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웬일로 친절하게 구네. 요물 같은 녀석.”
- 용사님의 여정도 이제 막바지니까요. 이 정도는 서비스라고 생각해 주세요.
나는 단탈리온을 덮고 지드에게 다가갔다.
“결정은 끝냈나?”
“한 가지만 물을게. 나와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죄수가 누구지?”
“그대도 이미 만난 적이 있을 거다.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를 가진 8층의 죄수가 나 혼자만은 아니었으니까.”
지드와 설공을 제외하면 내가 조우했던 8층의 죄수는 단 한 명이었다.
게다가 단탈리온이 설명했던 기원검의 마지막 조각.
그것을 품고 있는 자라면 퍼즐 조각이 얼추 들어맞는다.
만철도시에서 내게 기원검의 파편들을 모아서 8층까지 올라와달라고 제안했던 정체불명의 죄수.
“벨리오나. 톱니바퀴의 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