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타천의 강가 (3)
지금껏 푸르가토리움을 등반하면서 최초로 조우한 죄수가 층장인 경우는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들은 해당 층에 군림하는 가장 강력한 죄수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경우 수하들이 그 길목을 막고 있었으니까.
물론 지금껏 일어나지 않았다 해서 앞으로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지만.
“강물 소리만 있는 게 아니야. 선율이…… 음악이 들리는데?”
타천의 강가는 그 명칭에서 주는 느낌과 달리 웅혼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영롱한 오색 화초들이 흐드러지게 핀 강가는 감옥의 한 층이라기보다 오히려 무릉도원에 더욱 가까웠다.
그 강물 위에 한 척의 배가 띄워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등반죄수 여러분. 그대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선수가 우아하게 솟아오른 조각배 위에 한 사내가 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등까지 늘어뜨린 귀공자였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무기가 아니라 평범한 활대였다. 하프보다 조금 더 복잡한 형태를 가진 악기가 그의 앞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손놀림은 멈추었고 음률은 잦아들었다.
우리는 언덕 위에서 배 위의 사내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멈춰 섰다.
“당신, 이 층의 죄수야?”
“그렇습니다. 이걸 보시면 아실 테지만요.”
보는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사내가 손목을 들어 보였다. 새하얀 섬섬옥수 위에 내 것과 동일한 재질의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당신이 정말…… 8층에 배정된 죄수가 맞단 말이야?”
“하하. 이상합니까? 하긴 별로 죄를 지을 상이 아니라는 이야긴 종종 들었죠.”
“그 얼굴 때문에 묻는 게 아냐. 당신의 능력 때문이지.”
“호오. 초면에 그런 게 보인단 말입니까?”
내가 이 감옥에 들어와서 늘 돌다리를 두들겨 왔지만, 결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게 두 개 있다.
하나가 단탈리온이 내 질문에 내놓는 답변이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용사의 심안이 내어놓는 상태창이다.
내공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 반박귀진의 고수를 직면했을 때도 상대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소중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그것을 믿지 못하게 생겼다.
[이름: 니오프론]
[종족: 인간], [클래스: 반신(半神)]
[HP: 20], [MP: 0], [근력: 10], [민첩: 5]
[형량: ???,???년]
[칭호: 8층장]
이토록 각 항목이 서로를 배신하는 죄수를 본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일단 가진 스탯이 평범한 것을 넘어서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저 정도 수준이라면 최하층인 화룡도의 죄수 중에 코볼트 한 녀석이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수치다.
어쩌면 지구의 평범한 샐러리맨과 지하철에서 시비가 붙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정도랄까.
그런데 8층장이다.
“당신이 이 층의 층장이라는데? 맞아?”
“놀랍군요. 때려 맞춘 건 아닐 것 같은데. 나름의 방법이 있나 보지요? 당신과 통성명을 할 필요는 없다는 교도관의 조언은 사실이었군요.”
그말인 즉슨 8층장 니오프론 역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소리다.
“왜 그래, 형아?”
“저 녀석이 이 층의 최강자라는 게…… 믿을 수가 없어서.”
당연히 처음 방문하는 타천의 강가였지만 나는 이 층의 죄수들을 셋이나 알고 있었다.
천마 설공.
뇌신 지드.
톱니바퀴의 여신 벨리오나.
설공이야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의 강자였고 지드는 당시의 내 오감으로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벨리오나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은 없으나 지정 대상을 제외한 세계의 시간을 멈춘다는, 말도 안 되는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배 위에서 한가롭게 정체불명의 악기를 켜고 있는 니오프론이 그 셋보다 강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제르비어스. 네가 보기엔 어때?”
마왕의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뿔은 그냥 장식이 아니다. 체내에 쌓인 마력의 흐름을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는 레이더와 같다.
하지만 제르비어스의 결론도 내 것과 같았다.
“믿을 수가 없군. 마왕성 앞마당을 지키는 가고일 한 마리만 있어도 저 녀석을 가뿐하게 눌러 죽일 수 있을 거다.”
“마력이 느껴지진 않고?”
“전혀. 기이할 정도로 내 뿔에 반응하지 않아.”
반면에 토니아는 귀신을 본 것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왜 그래, 토니아?”
“저 사람, 존재 자체가 말이 안 돼.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 해도 자연에서 태어난 이상 조금의 생기라도 품고 있어야 해. 그건 정령이 없는 세계도 마찬가지야.”
토니아의 설명은 이랬다.
존재감이 아무리 희미한 사람이라고 해도 페어리 퀸의 시각을 속일 순 없다는 것. 그게 가능하다면 환영이거나 환시일 터다.
“그런데 저 사람은 분명히 저기에 있어. 환영이나 가짜가 아니야. 나로선…… 설명할 수가 없어.”
그렇다면 마녀의 딸이 보는 관점은 어떨까.
나는 그걸 물어보기 위해 아스티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살기 어린 표정으로 청룡패웅검을 뽑아 드는 아스티나의 모습이었다.
“아스티나?”
쨍그랑!
니오프론의 무릎 앞에 놓여 있던 기묘한 형태의 악기가 무참하게 박살나는 소리였다.
“어이쿠야. 이거 자기소개치고는 좀 과격한 편 아닌가요?”
니오프론은 본래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해체당한 악기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나 먼 거리에서 정확히 악기만을 노릴 수 있었다는 건 아스티나가 중력마법인 그래비티 잽을 펼쳤다는 뜻이다.
“왜 그런 거야, 갑자기?”
“너희가 말할 때부터 저 자식이 기분 나쁘게 나를 훑어보고 있었거든.”
그리고 아스티나는 동시에 나만 들을 수 있는 귓속말도 본심을 말했다.
- 힘을 숨기고 있는 건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었어. 그런데 정말로 반응을 못 하네. 저 당황하는 모습도 연기인 걸까?
아스티나의 지적에 니오프론은 공손하게 양손을 모으며 사과했다.
“아, 제 쪽에서 먼저 실례를 저질렀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당신을 너무 애타게 기다려온 나머지 실물을 영접하니 그만 제 본심을 조금 드러낸 모양입니다.”
“나를 기다렸다고? 등반죄수 슈바인이 아니고?”
“그렇습니다. 아스티나 류.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당신을 마중 나온 것이거든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니오프론의 눈빛에 강렬한 탐욕이 어른거렸다.
내가 황급히 인벤토리에서 아론다이트를 꺼내 손에 쥘 만큼.
파아아아아앗.
그런데 나보다 더 빠른 대응을 한 것은 순식간에 여우화를 마친 캉이였다. 녀석은 자신이 왜 변신을 한 것인지도 모른 채 어리둥절했다.
“어라? 뭐지?”
꼬리를 바싹 세운 채 아스티나의 앞을 막아선 캉이였지만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큼직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캉이의 핏에 흐르는 영물로서의 직감이 니오프론의 눈빛에서 위협을 느낀 것이다.
이왕 아론다이트를 빼 든 참에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8층장 니오프론. 어차피 이 층에 오른 이상 한 번은 당신을 찾아갈 생각이었어. 당신이 가진 층장의 열쇠가 필요하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고 말 거다.”
“아, 그렇게 노려보실 필요 없습니다. 열쇠를 빼앗는다는 야만적인 방법을 쓰실 필요도 없지요. 저는 제 열쇠를 당신에게 드리기 위해서 여기 나온 거니까요.”
“……어? 뭐라고?”
내 말을 입증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가 소용없어진 악기의 활대를 던져놓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구슬처럼 보이는 것.
하지만 저것을 일곱 개 모아온 나는 안다.
푸르가토리움에서 다음 층의 포탈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저것이니까.
“열쇠를 양도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알지요. 층장에서 평범한 죄수로 돌아가 교도관의 시련을 처음부터 다시 받아들이는 것.”
교도관의 시련 중에서 만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악랄함마저 느껴지는 설계가 대부분.
그런데도 니오프론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층장이야 제가 마음먹으면 언제든 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보단 이 열쇠를 넘겨줌으로써 당신에게 받아낼 대가가 제게는 더 소중합니다.”
거래다.
니오프론은 열쇠를 넘겨주는 대신 무언가를 받길 원하고 있었다. 6층장의 열쇠를 넘기면서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문을 뚫어주길 바랐던 골제처럼.
“내게서 뭘 원하고 있는데?”
“아, 제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분은 당신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절 노려보고 있는 저 아리따운 숙녀분이시죠.”
니오프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아스티나였다.
“열쇠 대신에 제가 바라는 것은 아스티나 류 당신입니다. 저분을 이 층에 놔두고 다음 층으로 오르는 것. 그게 제 거래 조건입니다.”
나는 아론다이트의 검신에 푸른 검기를 흘려보내며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대답했다.
“아스티나와 나는 무수히 많은 난관을 함께 돌파해온 동료야. 그깟 열쇠 때문에 내 친구를 팔아넘길 것 같아?”
“하하. 감동적인 우정입니다. 하긴 그게 인간들이 가진 미덕 중 하나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니오프론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렇게 물었다.
“장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의외로 아스티나는 되려 침착해진 모습이었다.
“내가 왜 당신 옆에 남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거야 제 곁에 남을 경우 제가 드릴 수 있는 선물이 하나 있으니까요. 그걸 당신이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도 알고요.”
세상에서 가장 간교한 뱀조차 저런 미소를 지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티나. 당신은 정말로 그 옆의 등반죄수와 함께 탈옥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 8층까지 온 건 그저 지금까지 여정이 우연히 겹친 것에 불과하지요. 당신의 숙원은 다음 층인 9층이 아니라 이곳 타천의 강가에 있지 않습니까.”
결국 니오프론의 입에서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이 튀어나왔다.
“죄수 설공. 그를 죽이기 위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것 아닌가요?”
캉이가 귀를 축 내리면서 한 걸음 물러났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흉흉한 살기가 아스티나의 전신에 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캉이는 3층 대수림에서 우리를 처음 만났다. 그래서 아스티나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을 것이다.
“어디 있어?”
“설공 말입니까.”
“그래. 그 씹어 죽일 자식 어디에 있냐고?”
“그는 이 8층에서 오직 제 명령만을 듣는 충직한 심복이지요. 여러분이 오기 직전에 제 지시를 받아 잠적해 있습니다. 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라고 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죄수도 찾아낼 수 없을걸요?”
아스티나의 은발이 푸르게 빛났다.
등 뒤에 펼쳐진 거대한 마법진 때문이다.
“아스티나, 진정해. 널 도발하려고 저러는 거야.”
“지금 집중하는 중이니까 방해하지 마.”
평소보다 훨씬 더 오래 마법진이 회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젠장. 지금은 설득이고 뭐고 통하지 않겠는걸.
나는 제르비어스와 캉이에게 눈짓했다.
저 기술을 시전할 때 아스티나와 가까이 있으면 우리까지 멀쩡하기 어려워진다.
“니오프론이라고 했나? 설공이 너의 심복이라면 주인을 이렇게 적들 앞에 내팽개쳐둔 건 그 자식의 실수야. 여기서 내가 널 죽여버리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응?”
청룡패웅검에 박힌 월장석에서 엄청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니오프론은 손가락을 턱에 괸 채로 뭔가를 진지하게 따져보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는 설공의 성격이라면…… 제 복수를 위해서 당신을 찾아 나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해? 이곳에서 네 목을 따버리는 게 나에겐 더 달콤한 선택지로 들리는데?”
“하하. 그야 그렇겠지요. 설공에게 시켜서 당신을 데려오라고 명령한 게 바로 저니까요. 지금껏 당신이 수천 개의 평행우주를 헤매야 했던 원흉이나 마찬가지지요.”
으드득.
아스티나의 치아가 서로 마찰을 내뿜는 소리였다.
강가에 핀 꽃들이 아스티나를 중심으로 하나둘씩 시들어가고 있었다. 거의 폭주 수준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마력회로가 주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절 죽인다니. 그따위 오만한 소망이 이뤄질 리가 없지 않나요?”
“으아아아아아악!”
폐부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악에 받친 소리.
니오프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우주를 박살 낼 기세로 폭발했다.
나는 다음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오직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다.
아스티나의 분노 어린 일격에 니오프론이 죽는 것.
혹은 층장에 오른 죄수답게 숨겨온 힘을 노출해 아스티나의 일격에서 멀쩡히 살아남는 것.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