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타천의 강가 (2)
르팔타커스와 작별하고 다시 층간 구역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반겨준 건 모두의 초조한 얼굴이었다.
“왜 이리 늦은 거야! 그 망할 검이랑 같이 죽어버린 줄 알았잖아!”
빽 소리를 지르는 아스티나 덕분에 맨홀을 닫기도 전에 귀를 막아야 했다.
아스티나 뒤에서 캉이가 머리 옆으로 검지 두 개를 올렸다. 나를 기다리는 동안 아스티나가 내내 저기압인 모양이었다.
“미안. 르팔타커스와 긴히 할 말이 있었거든.”
“……표정이 왜 그래?”
“내 얼굴이 어떤데?”
“삼월초원을 등지고 떠날 때 모습이랑 똑같잖아.”
나도 모르게 볼을 쓰다듬었다. 내가 그 정도로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당시엔 사부님과 스승님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껏 수차례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을 건너왔지만, 그때만큼 발걸음이 무거웠던 적은 없었다.
지금 상황도 그때와 비슷했다.
“용사야, 네 등 뒤를 봐라. 구멍이…… 보이질 않는다.”
층간 구역 지하로 이어지던 맨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용의 목을 짓누르던 사자 문양도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지워져 있었다.
“르팔타커스는 이제 떠났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야.”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해주었던 말을 친구들에게 전했다. 기원검 네메시스에 가까스로 잔류해 있던 파천황의 영령은 검이 완전체가 되는 순간 소멸할 거라는 말을.
“내가 다음 층에서 마지막 파편을 회수하면 그렇게 될 거야. 물론 다른 죄수에게 기원검을 빼앗기거나 8층에서 죽어버린다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겠지.”
어떤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르팔타커스와 다시는 이전처럼 대화할 수 없을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대기실에서 식인 홉고블린 차카 도기노브가 나를 당장이라도 해체하고 싶어서 철장 너머로 적의를 드러낼 때, 르팔타커스를 발견한 것은 내게 있어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감옥은 거대한 세계다, 죄수여. 진정 탈옥을 원하는가.’
‘원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심연보다 깊은 절망이 그대를 노릴지라도?’
‘죽음은 극복하고 심연은 잘라내겠습니다.’
‘마음에 든다, 죄수여. 짐의 친구가 되겠는가.’
‘네. 당신이 남긴 바통을 주워 결승점에 꽂아드리겠습니다, 르팔타커스.’
그와의 첫 조우에서 내가 했던 답변들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나는 그때 한 약속을 지켜왔다.
실제로 죽음을 극복했고, 고통을 이겨냈으며, 심연과도 같은 적들을 물리쳐 왔으니까.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겠지, 나도.”
차분하게 그의 권능으로 친구가 된 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스티나 류, 제르비어스 폰타인, 캉이, 토니아.
그리고 인벤토리에 있는 단탈리온과 레나스.
내 품속에서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베르단디까지.
일곱 명의 친구들과 감옥을 오르고 있다.
“홀로서기는 아니겠네. 동반자가 일곱이나 있으니까.”
그때 불현듯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제르비어스가 물었다.
“용사야, 만약 파천황의 영령을 다시 볼 수 없다면 친구들의 힘을 빌려오는 그의 권능은 어떻게 되는 거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통할 수 있고 마음먹는다면 순간이동도 할 수 있는 그 권능 말이다.”
“……어어? 그러게?”
방금 홀로서기 운운한 것이 민망할 만큼 내 얼굴은 빠르게 사색이 되어갔다.
가장 어려울 것이 뻔한 8층을 앞두고 파천황의 권능이 사라진다면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될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슈바인 스트링거. 네 손목을 봐.”
나를 절망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준 것은 캉이의 어깨에 앉아 있는 토니아였다.
“이 문신?”
“그래. 르팔타커스 시온은 이미 사망한 죄수야. 그런데도 주술의 힘이 남아 있다는 건 전부 그 징표 덕분이지. 네가 스스로 팔을 잘라내지 않는 한 그가 건네준 권능이 소멸할 일은 없어.”
토니아는 혹한의 추위를 자랑하던 빙설협곡에서 오직 사자 문신을 새긴 죄수가 등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페어리 퀸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이라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휴우, 천만다행이군.”
“그 문신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저기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어. 설마 잊어먹고 다음 층으로 가려 했던 건 아니겠지?”
토니아의 손가락을 따라간 곳에는 낯익은 냉장고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6층에서 7층으로 넘어갈 때는 이 층간 구역을 거치지 않았었기에 무척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냉동고에는 사자의 갈기가 한 움큼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빛깔을 알고 있다.
추체험의 세계에서 만났던 거대한 사자 자쿰의 갈기였다.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 중 유일한 외부 소지품을 되찾았습니다.]
[당신을 가호하고 있는 파천황의 권능이 한층 두터워집니다.]
[권능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가 한 단계 진화합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다른 층에 머무르는 친구를 영체로 소환할 수 있으며 그 인원 제한이 사라집니다.]
오호라.
마음먹는다면 화룡도의 친구들 전부를 영체로 불러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유지를 물려받을 죄수가 외로운 등반을 하지 않도록 배려해둔 걸까.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기를 바랍니다, 르팔타커스. 당신이 놓친 바통, 내가 꼭 마지막까지 쥐고 달려갈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층간 구역을 떠났다.
이 감옥 9층에는 단 한 명의 죄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가 새로 만나게 될 죄수도, 층장과 열쇠를 두고 다투는 싸움도, 기원검의 파편을 회수하는 일도, 교도관의 시련에 도전하는 일도…….
전부 이번이 마지막이다.
*
포탈을 빠져나온 순간.
나는 잠시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올려다본 하늘에 무수히 많은 행성이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공의 우주 속에 느닷없이 내던져진 줄만 알았다.
“후아. 숨이 쉬어지네?”
“왜 그래, 형아?”
우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캉이는 그저 신기하다는 듯 수없이 떨어지는 별똥별과 토성을 연상케 하는 멋진 고리를 두른 행성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면에 아스티나는 침착하게 풍경이 의미하는 바를 분석했다.
“저것들이 전부 진짜인지 모르겠는데.”
“왜 그렇게 생각해?”
“천공의 운행에는 질서가 있으니까. 그런데 저렇게 가까이 행성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면 한참 전에 서로를 끌어당겼을 거야. 내가 배운 마법 지식으로 저 하늘은 설명할 수 없어.”
“하긴. 일단 시간은 밤인 것처럼 보이는데…… 기묘할 정도로 행성들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도 이상해.”
반대편에 있을 태양 빛을 반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즉, 만들어진 풍경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으니까. 천공섬과 달리 날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희소식이네.”
우리 중 가장 예민한 감각을 가진 것은 캉이였다.
구미호의 귀가 곧 범상치 않은 소리를 포착했다.
“물소리가 들려, 형아.”
“어느 쪽이지?”
“저쪽. 거리는 멀지만 물결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어. 엄청 큰 물이 모여 있나 봐.”
설마 8층은 바닷가라도 되는 건가?
하지만 바닷가라면 캉이의 예민한 코가 소금 냄새를 놓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과 이 감옥의 환경이라면 염분 없는 바다가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때 어김없이 머리 위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8층의 교도관 ‘숭배를 강탈하는 십자가’가 등반죄수를 주시합니다.]
“왜 안 나타나나 했네.”
나는 이 교도관과 만난 적이 없으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있다.
영혼폭발을 일으켜 5층 빙설협곡을 초토화하려 했던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의 자격 박탈 투표에서 내게 유리한 표를 던져주었던 교도관이었다.
물론 이 교도관이 당시 나를 살려준 것은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전 파천황의 기원검이 완성되는 걸 보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파국이 일상이 된 제 층이 정리될 것 같거든요. 그러니 박탈에 한 표입니다.’
그 당시 내가 느낀 감상은 다른 교도관과 달리 이 ‘숭배를 강탈하는 십자가’는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게 망신당할 일도, 다음 층으로 죄수를 올려보낼 일도 있을 수 없다는 듯한 자신감이 엿보였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신격 죄수들이 힘겨루기하는 이번 층의 관리자가 될 수 없었겠지.
“오랜만이야, 십자가.”
[8층의 교도관은 그런 식으로 이명을 줄여 부르는 것은 다른 교도관에겐 어땠을지 모르나 자신에게는 불쾌한 일이라고 전합니다.]
“왜? 이참에 화신체라도 만들어 볼 테야?”
[8층의 교도관은 등반죄수 앞에 화신체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째서? 내가 시련을 통과하거나 이곳의 층장을 꺾어서 열쇠를 쟁취하면 내 앞에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8층의 교도관은 등반죄수와 그 동료들에게 아무런 시련도 강요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제껏 내가 올라온 층에는 모두 교도관이 개입한 시련이 존재했다.
노역하지 않으면 형량이 늘어나는 화룡도, 지독한 무승부를 반복해야 했던 삼월초원의 쌍마대전, 해가 뜨고 지는 순간 포식자에서 피식자로 전락했던 대수림처럼 말이다.
그런데 숭배를 강탈하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방관을 약속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 역시 호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게 드러났다.
[교도관은 이곳 8층 타천의 강가에서 치러지는 시련은 모든 죄수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게 아니라고 전합니다. 즉, 등반죄수와 그 동료들은 시련에 처할 ‘자격’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를 걱정해주거나 배려하는 게 아니었다.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설계한 시련에 임할 깜냥조차 안된다는 것.
[8층의 교도관은 등반죄수에게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저지르기를 권합니다. 8층 죄수들이 겪는 시련은 당신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교도관의 권한을 남용해 압박할 일도 없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8층 교도관의 처음이자 유일한 충고는 강가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말라는 것뿐입니다.]
녀석의 말이 거짓인 것 같진 않았다.
내가 겪어온 바로 교도관들은 죄수에게 ‘알려줄 것을 숨기는’ 경우는 있어도 가짜 속임수를 쓰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흥분할 필요는 없어. 내가 상대해야 할 건 층장이지 교도관이 아니니까.’
8층의 이름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수확이었다.
타천의 강가라.
나는 모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강물이 흐르는 곳에 뭐가 있는지 보러 가볼까? 도중에 죄수들을 만난다면 이 층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겠지.”
우리는 평소보다 훨씬 또렷한 정신, 그리고 언제든 무기를 뽑거나 반격할 수 있는 긴장 상태로 타천의 강가를 향해 걸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일개 죄수가 아니었다.
‘첫 스테이지에서 바로 보스가 나온다고?’
놀랍게도 우릴 맞이한 건 8층의 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