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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50화 (250/300)

#250. 타천의 강가 (1)

“짐이 예상한 것보다 더욱 잘해준 것 같구나.”

아홉 신의 소멸하는 모습은 곧장 르팔타커스 시온의 바위 같은 얼굴로 연결되었다.

그는 평소의 모습대로 가부좌를 튼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털썩 주저앉아 그와 눈을 맞추었다.

“제가 시온 제국의 황제가 되어서 개고생을 한 걸 직접 보여드리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네요.”

“그대가 이 감옥을 오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는 입장이다 보니 짐 또한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었는데. 그 녀석의 말끔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

르팔타커스가 여전히 내 손에 들려 있는 기원검 네메시스를 가리켰다.

본래 감옥 안에서 내가 조각을 모아온 기원검은 낡고 허름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추체험의 세계에서 내가 쥐고 흔들었던 모습 그대로의 말끔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검신의 끄트머리가 한 뼘 정도 사라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는 기원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파천황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원망스럽습니다, 르팔타커스.”

“그대의 안색을 보아하니 그래 보이는군. 검투장에서 짐의 수급을 챙기고 싶어 안달이 난 이국의 전사들과 정확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제가 당신을 때릴 수 있긴 한 겁니까?”

“불가능하지. 짐의 현재 상태는 온전한 영혼조차 되지 못한다네. 혼백이나 원령 정도일까. 그저 기원검의 불빛에 잔영처럼 달라붙어 있는 찌꺼기나 다름이 없지.”

으흠. 쉽게 이해하자면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아직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는 AI의 ‘운행기록’ 같은 개념이란 걸까.

불현듯 떠오른 질문은 내가 르팔타커스와 이렇게 ‘대화’라는 걸 할 수 있게 된 시작점이 언제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기원검을 통해 당신과 내가 연결된 거군요.”

바로 층간 구역에 내가 모르는 지하 공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였다.

어째서 4층 이전에는 르팔타커스의 영령과 접촉할 수 없었는가. 내게 기원검의 칼자루나 파편이 한 조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시험에 실패한 채로 돌아왔다면 어쩔 생각이셨죠?”

“그대에게 준 권능 전부를 회수했겠지. 그랬다면 그대는 등반을 시작했던 때의 수준으로 격하되었을 것이고.”

“섬뜩한 말을 태연하게 하시는 재주가 있군요.”

“말했지 않나. 짐을 실망시킨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르팔타커스의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흐릿하게 보여서일까, 아니면 그의 역할극을 열흘 동안이나 하고 돌아와서일까.

나는 대담해진 말투로 벌컥 짜증을 냈다.

“아니, 그렇게 중요한 시험인 줄 아셨으면! 예? 힌트를 좀 더 시원하게 퍼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짐은 그대가 아니라는 둥, 그대도 짐이 아니라는 둥 선문답 같은 소리 말고요! 시험이 치러지는 추체험의 세계에서 친구들을 불러낼 수 있다는 점만이라도 알려주셨다면 초반에 그런 삽질은 안 했어도…….”

“몰랐다.”

“……예?”

“추체험의 세계에서 그대가 친구들을 소환해서 싸울 수 있는 줄 알지 못했지.”

이게 무슨 자쿰이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그럼 그 선문답은 무슨 뜻이었던 거예요?”

“말 그대로 우리 둘의 차이점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짐에게는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 그대는 달랐지. 이 감옥을 벗어나 반드시 되돌아갈 장소,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은가. 짐이 기대했던 희망은 거기에 있었다.”

무의식중에 나 또한 르팔타커스와 내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화룡도에서부터 탈옥의 여정을 시작한 등반죄수라는 점. 그리고 모든 층장을 꺾어야만 쟁취할 수 있는 칭호인 ‘수왕’과 그것을 이어받을 후보로서 처음 탄생한 후보라는 점에서.

하지만 르팔타커스는 본질적인 동기 면에서 나와 달랐다.

“그럼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탈옥을 원했었던 겁니까?”

“탈옥을 원했던 게 아니다. 자유를 원했던 거지. 물론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대라면 알겠지. 그 둘이 결코 같지 않다는 걸.”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죠.”

“그러하다. 그리고 짐을 얽매는 올가미를 단 하나도 남김없이 잘라내는 것이 짐이 검을 휘두르는 유일무이한 목적이었다.”

단신으로 아홉 신을 무찌른 경이로운 업적을 답답한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신살의 위업도 이 사내에겐 검투장의 장벽을 뛰어넘는 일의 연장선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약 감옥을 벗어나는 순간 육체가 그대로 짓이겨져 죽었다 하더라도 짐은 망설임 없이 탈옥을 갈망했을 것이다. 짐은 꿈에 그리던 자유를 달성했다고 믿었던 순간 본래의 세계보다 더 지독한 감옥에 갇혔다. 그 절망을 이해할 자가 이 감옥에 있을지 의문이군.”

“저는 추체험의 세계에서 당신이 감옥에 붙잡혀오기 전의 하루를 반복해서 살았습니다. 당신이 기원검을 맡겨두었던 거대한 사자도 보았고, 당신에게 덤벼들었다가 혼쭐이 난 뒤 대장군이 된 우직한 남자도 만났지요.”

“짐도 그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리워한다거나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없습니까.”

르팔타커스는 내 예상대로의 대답을 했다.

“아니. 그런 마음을 품었던 적은 없다. 죽기 전에도, 죽고 나서도.”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겨우 열흘 동안 그 세계에 있었던 저조차도 신과 황제를 동시에 잃어버렸을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는데요.”

“짐은 아홉 신을 죽임으로써 그들 모두에게 자유를 주었다. 짐은 그들에게 복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짐에게 복종할 자유를 주었을 뿐. 짐은 그들에게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짐을 믿을 자유를 준 것일 뿐.”

“……어디 가서 친구 없게 생겼다는 말 자주 듣지 않습니까.”

“실제로 없었으니까. 친구뿐 아니라 부모나 연인, 자식도 없이 살아왔다.”

그야말로 지독한 자유주의자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인간이라면 응당 갖고 태어나는 오욕칠정을 모두 차단한 채 오직 ‘자유롭기 위해’ 살아온 자를 마주하니 그 어느 때보다 르팔타커스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이번엔 짐이 질문할 차례인가.”

“저한테 궁금한 게 있었나요?”

“그대가 지금까지 기원검의 파편을 회수했다면 보았을 것이다. 그 무기의 힘을 빌어 욕망을 현실화시킨 죄수들을.”

그룬덴 사니릭투스. 그는 기원검의 힘으로 푸르가토리움의 무기고에서 레나스를 돌려받았다.

5층장 크로톤. 원래 작디작은 페어리였던 그는 기원검의 힘으로 다른 죄수들과 융합해 온갖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인이 되었다.

하나의 세상만큼 거대한 세계수 위그드라실. 그 나무 또한 기원검을 품어 6층과 7층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기원검은 그렇게 나누어진 파편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지.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은가. 만약 짐이 감옥의 무기고에서 온전한 기원검을 되찾은 시점에서 ‘탈옥시켜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렇게 물어오시는 거라면 실제로는 소원을 빌지 않았다는 뜻이군요.”

“맞다. 짐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짐이 바라는 소원이 아니었을 뿐.”

원하는 게 탈옥이 아니라 자유라고 말하는 자였다.

“기원검의 힘으로 탈옥하는 건…… 무기에 얽매이게 된다고 생각했겠군요.”

르팔타커스는 내 추정에 흡족해했다.

“정확하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건 알량한 자존심이나 고집 같은 게 아니로군요. 당신은 그 길을 시도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유를 위한 수단으로 구속을 택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대는 어떠한가. 기원검의 힘을 휘두르는 자들과 싸워온 장본인으로서 누구보다 그 무한한 권능을 실감했을 터. 그런데 어찌해서 아직까지 기원검에게 ‘기원’을 빌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

그것은 이미 내 안에서 답이 내려진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그럴듯하게 들릴 답변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나는 그냥 속에 있는 진심을 털어놓기로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나는 간절히 염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간절함은 아무것도 장담해주지 않는다.

기도할 시간에 한 번이라도 검을 휘두르는 게 낫다.

기원검을 세상에 내놓은 장본인은 뒤틀린 신이다.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의지해 영원불멸성을 획득하려 한 음험한 신.

그래서 내가 본 기원검의 사용자들은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이한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룬덴 사니릭투스는 윤회도 하지 못하는 소멸을 맞이했고, 크로톤은 너무 비대해진 자아와 함께 폭발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 역시 꽃 한 송이만 남긴 채 느린 죽음을 선물받았다.

기원검에게 소원을 비는 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나는 판단했다.

“짐과는 다른 이유로 같은 결정을 했군. 그대는 확실히 짐에게 있어 거울과도 같은 동반자라 할 수 있겠어.”

“당신은 끝까지 기원검에게 소원을 빌지 않았나요?”

르팔타커스는 회한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짐은 결국 뒤틀린 신에게 넘어가고 말았지.”

“그게 뭐였죠?”

“여러 개의 조각으로 스스로를 조각내 달라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 나타날 그대와 같은 죄수가 천천히 검을 수복할 수 있도록.”

나는 그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기원검의 다음 주인이 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군요.”

“기원검의 주인이 되려면 짐의 마지막 싸움을 이겨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인간을 상상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을 왕좌에서 군림한 용이나…… 필멸의 굴레를 초원한 신격 죄수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최소 7층이나 8층의 죄수.

하지만 르팔타커스가 후임자로 바란 죄수는 오히려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말했듯이 짐은 짐이 걸어온 길을, 짐과는 다른 걸음걸이로 올라온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만 탈옥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을 흉내내지 마라.

그래서는 안 된다. 결국 탈옥의 목전에서 주저앉고 말았으니.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지 않은 르팔타커스의 말을 분명히 주워담고 있었다.

“이제 가 보도록 하라. 그대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겠군.”

르팔타커스는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다. 내 눈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내 목덜미 정도로 내려올 만큼.

하지만 나는 그것을 결별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저는 이제 기원검의 마지막 파편이 있는 8층으로 올라갈 겁니다.”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다. 그대가 방금 돌파한 시험보다 훨씬 가혹할 테지.”

“만약 제가 8층의 층장이 되어서 기원검의 마지막 조각마저 회수한다면…….”

나는 르팔타커스가 노예 시절 몸을 뉘었던 검투장의 을씨년스러운 숙소를 둘러보며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원검의 다음 주인이 완전해지는 것이니 짐은 응당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겠지.”

가까스로 기원검에 달라붙어 있던 혼백은 사라져버리는 건가.

내비게이션의 메모리가 포맷되면 AI의 운행기록은 복구할 수 없도록 완전 삭제된다.

르팔타커스의 마지막 말이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겠지.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을 믿고 나아가도록 하라. 내가 선택한 등반죄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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