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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49화 (249/300)

#249. 최선의 빌드 (3)

피의 거인은 꿀렁이는 혈액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족보행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인세의 규칙이 녀석의 형상을 고정시키기 버거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신체에 깃든 힘이 얼마나 강하면 저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그래. 가주마. 네 목을 치면 이 짓도 끝나겠지.”

기원검을 바투 잡고 한 발을 내디뎠다.

물론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남은 체력으로 적어도 몇 방은 넣을 수 있다.

그러는 도중에 아홉 신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겠지.

[우리를 파악해 보려 하는군. 하지만 그 대가는 너의 목숨일 것이다.]

피의 거인이 양손을 합장했다.

그러자 녀석의 가슴에서 회전하고 있는 아홉 개의 소용돌이 중에서 하나가 튀어나왔다.

꽈르르릉!

지면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초월적인 벼락이었다. 친구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오직 나만이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피격의 순간에 발동되었던 중력장, 그리고 벼락을 상쇄시키기 위해 나를 스치며 날아간 여우트림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돌볼 여력으로 나를 지켜준 것이다.

[미련한 발악을 보여주는구나. 그래. 바로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우린 이곳에 강림한 것이다.]

정했다.

저 녀석의 목을 베는 기술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용사전용기 살신참이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지은 기술명이지만 오늘에서야 그에 걸맞은 업적을 달성하게 되겠구나,

싶었을 때 추체험의 세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추체험의 달성에 실패했습니다.]

이미 한 번 겪어본 상황이다. 자연히 무슨 메시지가 이어질지 알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내디디며 기원검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이전 주인이 아홉 신을 쓰러트리는 데 걸렸던 시간을 초과하고 말았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확신.

뒤틀린 신이 빚어낸 이 무기가 저 화신체에 먹혀 들어간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9회차에서의 발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피의 거인의 허벅지에 기원검을 찔러 넣었다.

분명한 손맛과 함께 화신체의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남은 재도전 기회는 1회입니다.]

*

“이 침대에서 일어서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어떻게든 미루고 싶었던 10회차가 시작되었다.

피의 거인에게 달려들면서 고양되었던 감정은 지우개로 지워진 연필 자국처럼 희미해졌다.

시작 시점으로 강제로 되돌려진다는 것은 이런 이점도 있었다.

위협요소가 없는 장소에서 완전히 재충전된 체력과 심력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침대에서 내려오면서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사로잡았다.

“기원검 네메시스.”

그 검은 어째서 이런 방식으로 주인의 자격을 묻도록 만들어졌을까.

처음엔 이전 주인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한 전사의 손에 쥐어지기 위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주인이 무기를 계속 강화시키지만 신이 담금질한 무기니만큼 스스로 주인을 강화시켜나갈 수 있는 방식.

하지만 10회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의 안도감이 너무 커서 놓치고 있었지만,

사실 점점 강한 주인의 손에 쥐어지고 싶은 거라면 동일한 기회를 여러 번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기원검에 담긴 마음은 그게 아니라는 거겠지.’

알파테스터로 겪었던 그 무수한 게임 속 세계에서 나는 무의식 중에 늘 개발자의 의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 이런 스테이지를 배치했을까.’

‘이 아이템의 설명란에 이런 방식이 채택된 이유는 뭘까.’

그런 식으로 숨겨진 저의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해법이 보이곤 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처음으로 뒤틀린 신의 존재가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는 잊혀진 신이었고 다른 신들로부터 강제 축출당한 비운의 신이었다. 그 울분과 복수의 마음을 담아 기원검을 만들었다.

그리고 뒤틀린 신이 만들어낸 무기는 결국 적임자의 손에 쥐어졌다.

르팔타커스 시온.

인간의 정점에 오른 자가 결국 이 검으로 아홉 신의 심장을 꿰뚫는데 성공했으니까.

‘그런데도 시험은 계속되고 있어.’

복수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르팔타커스가 평원의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이 검은 부서져도 상관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지금은 내 손까지 흘러들어왔다.

‘잊혀지지 않고 싶은 것이었을까.’

더 강한 주인을 매번 갈구하는 게 아니라, 세대를 이어 더 많은 인간의 손에 쥐어지면서 자신의 이야기가 전승되기를 바란 것이라면 말이 된다.

인간의 소망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생각에 잠기신 모습인데요.”

시간이 되면 내가 부르지 않아도 찾아오는 단 한 사람.

덩치가 큰 대장군이 꿈뻑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애정이 담긴 손길로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 동안 고마웠어. 신세가 많았다.”

“그건 당연한 제 역할이 아닙니까. 오늘이 마지막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시군요. 하지만 전 폐하가 승리할 거라 굳게 믿습니다.”

그래.

내가 이기든 지든 이 싸움은 오늘로 마지막이다.

“어쩌면 실제의 세계에서 당신은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 르팔타커스보단 약하지만 성정이 곧고 신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강직했으니까. 당신이 삶이 순탄했었기를, 너무 가혹한 업화에 휘말리지는 않았기를, 죽는 순간까지 웃는 일이 많았었기를 바랄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잊지 않을 거다. 당신도. 이 세계도.”

제르비어스의 이름을 부르자 대장군은 빙의자에게 몸을 내주었다.

“용사야.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구나.”

무슨 상황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녀석도 그 현장에 있었으니까.

“모두를 깨우러 가자. 일분 일초를 아껴야지.”

*

우리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자쿰이 낮잠을 자고 있는 코앞이었다.

기원검을 내게 내어 준 뒤 이 거대한 사자는 자신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었다.

언제나 검을 얻은 뒤 바로 자리를 떠났기에 자쿰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대한 사자가 고양이처럼 그릉거리며 잠든 모습은 충분한 볼거리였으나,

거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방금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야, 아스티나.”

“안 될 게 뭐 있어? 다른 친구들도 모두 동의했는데.”

“이 시험의 대상자는 바로 나야. 그런데 정작 내가 싸움에 나서지 말라는 게 말이야, 방귀야?”

“나서지 말라는 게 아니야. 최후의 순간까지 힘을 온존하고 기다리라는 거지.”

“그래, 용사 놈아. 네가 쓰러트려야 할 적은 천사병이 아니라 그 천사병을 제물로 태어나는 거인이니까.”

제르비어스 또한 아스티나의 말에 동의했다.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너희들이 내 앞으로 튀어나가서 싸우는 동안 뒷짐지며 구경이나 하라고?”

“하라면 해야지.”

“굳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쓸 필요는 없어. 계속 합을 맞춰나가고 있었잖아. 시간을 조금만 더 단축한다면…….”

“아니. 천사병의 수를 줄이는 건 우리들 힘만으로 가능할 거야. 죽을 힘을 다할 거니까. 실제로 죽게 되겠지. 하지만 어제보단 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거야. 도달점이 어딘지 알면 여력을 남기지 않아도 돼.”

아홉 신의 화신체가 등장하기전까지 싸움에 나서지 말라는 가혹한 요청이었다.

제르비어스가 내게 옛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용사야. 마그마 볼을 떠올려 봐라.”

화룡도에서 있었던 일을.

내가 녀석을 잔꾀로 무너뜨렸던 그 순간을.

“그 시험의 마지막에 마그마 볼을 분화구에 집어넣었던 건 네가 아니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죄수 뚠 아티르였지.”

“그건 내가 당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으니까.”

“그래. 우리도 그런 생각에 도달한 거다. 마지막 순간까지 숨어 있었던 뚠처럼 이번엔 네가 마그마 볼을 분화구에 처 넣는 역할을 하게 된 거지.”

“천사병과 가장 많이 싸운 건 나야. 내가 뒤로 물러나 있으면…….”

“그래도 된다. 너는 스스로를 장기말로 만들어 희생시키는 데엔 익숙하면서 우리를 사지로 내모는 작전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지. 왜 그러는지는 알겠다만…….”

마왕이 나를 꿰뚫어보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우리를 믿어 봐라. 우리가 먼저 죽어도 나서지 마.”

가능할까?

검을 뽑지 않은 채 친구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걸 지켜보라고?

*

기원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잘 했다, 용사야. 여기까지 검을 뽑지 않았으면 됐어.”

폭렬마왕의 뿔은 한 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녀석의 등 뒤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진 아스티나의 시체가 있었다. 그 일격을 맞기 전에 토니아는 진작 힘을 소진해 죽은 뒤였다.

전장의 곳곳에 언덕처럼 솟아 있는 하얀 짐승은 최후의 순간까지 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캉이였다. 여우의 모습으로 죽었다는 건 마지막까지 자신은 돌보지 않고 적을 한 명이라도 더 처리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는 뜻이다.

“진짜 죽는 것도 아니니까.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목표를 이루는 것에만 전념해.”

나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저쪽에서 천사병의 무수한 피 속에서 화신체가 강림하는 거라면,

이 쪽에서도 마지막 주자를 내보낼 때 가장 강력한 상태여야 한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알겠어. 이게 최선의 빌드라면 어쩔 수 없지.”

“우리는 층간 구역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꼭 기원검의 인정을 받고 돌아오라고.”

제르비어스의 육신이 기우뚱 쓰러졌다.

[르팔타커스 시온이여.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런 모습을 꺼내들게 하는구나.]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아홉 신의 화신체가 천지를 격동시키며 강림했다.

“……예열이 길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이면 된다.

녀석은 아마도 아홉 개의 소용돌이에서 각기 다른 신의 권능을 자유롭게 뽑아쓸 수 있는 스타일의 적일 것이다.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얼음기둥을 피했다.

‘얼어붙은 신. 좌상단 소용돌이.’

다음은 칼날처럼 베어오는 질풍.

‘휘몰아치는 신. 우하단 소용돌이.’

그런 식으로 나를 소멸시키기 위해 신의 권능이 하나씩 휘몰아쳤으나 조금씩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너희는 실수를 했어. 천사병을 그렇게나 많이 나에게 보여줬으니 계속 훈련시켜준 거나 다름이 없지.”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다.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내가 가까이 접근하자 피의 거인이 결국 잠자코 있는 양손을 휘둘렀다.

닿기만 해도 지면이 녹아내리는 치명적인 일격들이었다.

검이 닿기까지 딱 한 걸음.

이 한 걸음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계속해서 죽어왔다.

그리고 환영으로도 보고 싶지 않았던 친구들의 시체까지 밟고 왔다.

“그래.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거다.”

다만 그 때 내 손안에는 너희들의 수급이 들려 있겠지.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삼식 살신참(殺神斬)]

나는 세계와 함께 피의 거인을 베어냈다.

그러자 기원검이 정지된 세계에서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기원검의 시험에 통과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진정한 칼자루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분열된 파편과 마주했을 때 당신은 상대가 누가 되었든간에 검의 주인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8층에 숨겨져 있을 기원검의 마지막 파편.

이제 그걸 주우러 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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