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최선의 빌드 (2)
[마왕군 폭렬마법]
[4급 오의 오메가 플레어(Omega Flare)]
수백 개의 하얀 점을 검은 불길이 짓이겨 나가낟.
제르비어스 폰타인은 작열하는 신이 사출하는 천사병을 도륙해 나갔다. 그야말로 폭렬마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위용이었다.
그건 단순한 파괴를 넘어선 학살이었다.
“더 뜨겁게 타올라 봐라!”
작열하는 천사병들은 개체가 사멸할 때 고온의 폭발을 일으키면서 상대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폭발 범위에 휘말리면 힘과 반응속도가 빨라지는 버프를 갖고 있었는데, 제르비어스는 그 모든 걸혼자서 흡수하고 있었다.
마족의 화염저항이 가진 위력이었다. 제르비어스가 자유자재로 방출할 수 있는 보락색의 업화는 천사병의 그것을 압도했다.
“내가 있던 세계에는 신마대전이 일어날 수 없었지. 신들은 늘 비겁하게 용사들을 보내어 마족과 싸우게 했으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신들의 볼기짝을 때려줄 수 있어 기쁘구나!”
작열하는 천사병이 발악하기 위해 사방에서 덤벼들면 제르비어스는 자신의 안에 잠재된 용의 힘을 일깨웠다.
[마왕군 폭렬마법]
[최종 오의 폭룡해방]
잠시 동안 마룡으로 변신한 제르비어스가 뒷발로 천사병들을 으깨며 나갔다. 변신을 오래 지속하지 않는 건 힘에 부쳐서가 아니라 적에게 때리기 좋은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잔뜩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은근 머리를 쓰면서 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르팔타커스 시온이여, 홀몸으로 우리를 만나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옹졸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구나.]
맥없이 쓰러지는 천사병들을 지켜보며 작열하는 신이 불평했다.
나는 제르비어스의 반대편에서 기원검의 일섬으로 천사병들을 도륙하다가 그 한 마디에 발끈했다.
“방금 누가 옹졸이란 단어를 꺼냈어? 그러면 너희들도 한 놈만 뽑아서 내보내던가. 나 하나 상대하는 싸움에서 때로 덤비는 주제에 혓바닥이 길구만.”
[어불성설이군. 오늘의 이 자리는 대결이 아닌…….]
“징벌이라고 하겠지. 그래. 나도 거기에 동의하겠다. 하지만 벌을 받을 쪽이 어디인지는 싸움이 끝날 때 정해지는 거야.”
천사병의 열세를 확인하자마자 곧 두 번째 손톱이 열리고 지원군이 튀어나왔다.
하늘을 뒤덮으며 얼어붙은 천사병이 위용을 과시하려 했으나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구미호의 여우트림에 녹아내려야 했다.
“재밌는데? 형아 혼자서 이런 걸 하고 있었어?”
캉이가 가진 만다라의 위력이 그 짧은 새에 또 한 단계 성장한 듯 보였다.
성장기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호월랑’이라는 진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인지 우리 중 누구보다 더 가파른 속도였다.
“너무 들뜨지 마. 말했듯이 이건 체력 싸움이니까.”
스마트폰 게임에 과몰입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쟤들은 왜 저러는지 알겠어?”
내 옆에서 날고 있던 아스티나가 제르비어스와 캉이의 난동 비슷한 무언가를 지켜보며 말했다.
“제르비어스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 빙의했는지 듣고 수치심에 못 이겨 발버둥 쳤잖아. 그 민망함을 떨치려고 괜히 저러는 거 아닐까? 캉이는 이 추체험의 세계를 놀이처럼 생각하는 것 같고.”
아스티나는 피식 웃으며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닐걸. 저 둘은 저래 보여도 평소보다 훨씬 무리하면서 싸우고 있어. 너 혼자 이런 삭막한 세계에서 여섯 번이나 싸우게 뒀던 걸 안타까워하고 있는 거야.”
음.
설마 그랬던 건가.
“전부 쳐부쉈다! 다음!”
캉이라면 몰라도 저 음란마왕은 아닌 것 같은데.
양손으로 뭔가를 뚝딱거리고 있던 아스티나가 완성한 것은 얼추 마법 지팡이로 봐줄 수 있을 것 같은 물건이었다.
천사병이 사용하던 창대에 그들의 갑옷에 붙어 있던 마력석을 접합한 임시 지팡이였다.
놀랍게도 아스티나는 그것을 이용해 마법진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정말로 해냈네?”
“나 혼자만 구경할 순 없으니까. 네가 한 이야기에서 따르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나는 솔직한 걱정을 드러냈다.
“네 청룡패웅검과 월장석에 비교하면 그 지팡이는 효율이 떨어질 텐데?”
맨 몸으로도 오랫동안 싸워온 제르비어스나 캉이와 달리 아스티나는 지팡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추체험의 세계에 딸려오는 것은 영혼과 의지뿐. 현실의 무기까지 친절하게 재현해주는 법은 없었다.
게다가 시온 제국에는 마법이 거의 발달해 있지 않았는지 이 세계 안에서 아스티나가 사용할만한 지팡이도 없었다.
천사병의 갑옷에서 떼온 마력석은 신력을 응집한 용기일 것이다. 마력과 궁합이 좋을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건 내가 아스티나를 보조하면 돼.”
아스티나의 후드에 숨어 있던 토니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마력 변환에 손실이 일어나는 만큼 요정술의 버프로 그것을 상쇄시키는 더블팀의 탄생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세해볼까.”
혼자서 몸을 갈아 넣던 싸움과는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전장에서 등을 맞댈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
큰 기술에 필수로 동반되는 빈틈을 메꿔줄 팀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줬다.
어쩌면 르팔타커스 시온이 내다본 것은 지금, 이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룩해낸 업적을 꼭 나 혼자서 따라잡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그는 내게 ‘친구맺기’의 권능을 부여해줬던 건 아닐까.
“슈바인. 나는 어제 처음 죽음을 겪었어.”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추체험의 세계에 진입한 아스티나의 말이었다.
담담한 듯 보이려 애썼으나 어투가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독한 회귀를 겪으면서 나는 죽음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아니었어. 세계가 파괴되는 것보다 내 존재가 지워지는 그 섬뜩한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끔찍했어.”
은발의 마법사가 함꼐 달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너는 어떻게 멀쩡할 수 있니? 나는 단 한 번의 죽음을 체감하는 것만으로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인데.”
“음…… 아마도 한, 두 번이 아니라서 그런 거 아닐까?”
이 문제에 대해선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푸르가토리움의 죄수가 된 이래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맛본 적 있다.
먼저 삼월초원에서 MP 스텟을 억지로 늘리기 위해 제르비어스의 손톱에 꿰뚫리면서 저주를 받아들였던 것.
그 때 여동생의 모습을 한 심마에게 수차례 목이 잘리는 경험을 했다.
삼월초원의 천마와 마녀를 포섭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지만, 그 고통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는 건 아니다.
메르킨의 세뇌에 붙잡혀 있던 시간은 어떠했는가.
그때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세계가 나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세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캉이의 여우트림에도 여러 번 죽었었다.
‘실제로도 한 번 죽었지.’
빙설협곡의 층장 크로톤이 벌인 영혼폭발. 그때는 스스로 심장을 터트려서 몸과 영혼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었다.
호이란이 교도관장에게 넘긴 여분의 목숨이 아니었다면 그때 내 등반여정은 완전히 끝났을 것이다.
“겪어보니 알겠어. 죽음을 체험하고서도 의식이 이어진다는 건 마음의 척추가 골절당하는 것과도 같다는걸. 슈바인 스트링거. 다른 건 몰라도 르탈타커스 시온조차 그 많은 죽음을 겪고서도 너처럼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순 없었을 거야. 그건 보통 정신력으로 되는 건 아니니까.”
바스러지는 천사병이 내뿜는 독무를 살신참으로 날려 보내면서 나는 아스티나의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게 반드시 좋은 걸까.”
알파테스터로 살아가던 때에도 VR의 세계에서 무수한 죽음을 체험해 본 적이 있다.
어쩌면 나는 푸르가토리움에서 겪는 죽음을 그런 데이터 소멸과 등차시키면서 자기 위안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누가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불사신이 아닌데.
“그저 발악하고 있을 뿐이야. 적어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내 손안에 있는 동안에는.”
내 정신력이 르팔타커스보다 더 단단해서 이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마음을 지키는 방어기제를 쌓아온 걸 수도.
그래서 친구들이 이곳에서 ‘죽음’을 추체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실패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우리는 일곱 번째 신인 땅거미의 신이 내보낸 천사병들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적들의 공세에 체력과 기력이 전부 소진된 탓이다.
“대체…… 끝이 안 보여.”
“졸려. 자고 싶어.”
심신이 넝마가 된 친구들이 하나둘 쓰러져 갔다.
가장 안색이 좋지 않은 건 토니아였다.
“이 세계는 정령에 친화적이지 않아. 게다가 이 평원은 더더욱. 계속 물속에 잠수한 채 억지로 호흡하는 기분이야.”
토니아의 요정술이 있었다면 더 오래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티나의 마력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무르느라 회복의 요정술은 거의 발휘할 틈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ᄄᆞᆨ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땅거미의 천사병 셋이 어둠의 권능을 발하는 검을 든 채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는 그것에 꿰뚫리기 전에 쓰러진 친구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내일은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
8회차와 9회차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나와 친구들의 숙련도는 더욱 올라갔다.
내가 여러 회차를 거치면서 천사병들의 움직임과 특성, 집단전을 펼치는 상대의 틈을 발견했던 것처럼 친구들 또한 어떤 시점에 힘을 폭발시킬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회차의 기회는 무한하지 않다.
처음부터 전원이 함께 싸웠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기원검의 시험을 통과한 뒤 다음 층을 향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9회차가 절박했다.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다는 유리한 심리적 고점.
그것의 이점을 놓지 않은 채 시험을 끝내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실패하면 끝’이라는 벼랑을 끝을 내딛는 기분으로 이 감옥을 올라왔지만, 그건 아무에게나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친구들이 10회차가 마지막 기회라는 압박에 짓눌려 제힘을 발휘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각자가 맡게 되는 천사병들을 확실히 정하자. 얼어붙은 천사병은 중력 마법에 약해. 빙결을 만들어내는 공간을 아스티나가 장악할 수 있을 거야. 썩어들어가는 천사병이 부패 안개를 펼칠 땐 잠시 토니아가 캉이에게 붙어 줘. 생물에게 취약한 독이어도 구미호는 건드릴 수 없었으니까.”
그건 한정된 자원으로 적을 쓰러트릴 수 있는 최선의 빌드였다.
그렇게 아홉 신이 내보낸 수천의 천사병을 착실하게 격파해나갔을 때.
우리는 휘영청 뜬 만월이 지켜보는 아래 끝을 볼 수 있었다.
철커덩.
마지막까지 서 있던 천사병이 기원검에 의해 두 동강 났다.
더는 이 평원에 움직이고 있는 천사병은 없었다. 단 한녀석도.
“해치운 건가?”제르비어스가 거의 주저앉은 태도로 물어보았다.
그 단어는 죽었던 적도 되살아나게 하는 마법의 구절이니까 입을 다물라 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어도 내 싲머은 차분했다.
설공의 그림자를 쓰러트려 재로 만들었을 때.
제트카이저에 탑승해 크로톤의 숨통을 끊었을 때.
완전한 승리를 손에 쥐었다는 그 느낌이 지금은 전혀 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팔타커스 시온이여. 정말 놀랍구나. 이것이 징벌의 시간이라 말했던 우리의 언행을 물리도록 하지. 그대는 분명 아홉 신에게 도전할 만한 자격을 갖추었도다.]
자격이라는 두 글자가 내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
승리할 자격이 아니라 도전할 자격이라.
[우리가 온 대륙에 걸쳐 굳이 이 장소를 고집했던 것은 지형의 구조 때문이었다. 천사들이 흘린 피가 어디로도 흐르지 않는 천혜의 제단이기 때문이지.]
치이이익.
나는 젖먹던 힘을 짜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천의 천사병. 아니, 천사병이었던 무언가가 그들이 흘린 피에 녹아내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너희들의 세계에 온전히 강림할 수 없다. 그대에게 자격을 묻는다 했지만, 이 싸움은 우리의 자격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
아홉 신이 그 많은 수의 천사병을 내보냈던 이유.
단순히 나를 죽이기 위해서도, 지치게 만들어서 인간의 한계를 맛보여주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궁극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평원 전체를 적시는 ‘천사의 피’가 있어야만 강림할 수 있는 무언가.
그것이 눈 앞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슴에 아홉 개의 소용돌이를 품고 있는 피의 거인이었다.
아득히 먼 땅에서부터 울리는 천둥벼락이 고막을 간지럽혔다.
[오라. 그대를 벌하기 위해 아홉 신이 처음으로 이 땅에 헌신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