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최선의 빌드 (1)
아스티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규칙이 있는 것 같다고?”
“네가 빙의해 있던 소녀는 나를 죽이려 했어. 아버지의 원수라면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당한 일에 르팔타커스가 연루돼 있었겠지. 어쩌면 황제의 손에 강제 통합 당한 민족의 생존자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는 건 어떠한 규칙에 따라 빙의 대상이 정해진다는 뜻이다. 내가 르팔타커스에 빙의한 것도 그런 규칙성에 따른 것일지도 모르고.
아홉 신에 대항해 검을 든 황제.
아홉 개의 층을 올라 탈옥하려는 등반죄수.
동일한 숙명과 갈망을 가진 인물과 영혼이 서로에게 공명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사례가 나 하나뿐이잖아?”
“그러니까 두 번째 사례를 확인하면 내 가설이 뒷받침되겠지.”
나는 성큼성큼 아스티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야? 저기에 뭐가 있는데?”
“아스티나, 이 세계에도 서커스가 있다는 거 알아?”
지난 회차에서 나는 황제의 승전 축제를 미리 앞당겨서 보고 싶어 했고 그 덕분에 유랑 광대패의 존재를 알게 됐다.
유독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우글대는 집단이기도 했다.
이번 회차에서도 광대패는 저잣거리에서 판을 벌여놓고 저들끼리 놀고 있었다.
바닥에 늘어진 채 배를 까고 있던 우두머리 수광대가 나를 보고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히익. 화, 황제 폐하! 천한 왈패들이 노는 곳에 어인 일이십니까.”
“그냥 둘러보러 온 거야. 짐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있게나.”
그러자 아스티나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멍청아, 제국의 황제가 편하게 있으란다고 편해지겠어? 차라리 정공법으로 나가.”
아스티나의 조언을 들어서 손해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난 이번에도 그녀의 말에 따라보기로 했다.
“혹시 자네 광대패 중에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버려진 아이가 있나?”
“말씀드리기 송구한데, 황제 폐하. 누구도 거둬가지 않는 전쟁고아들을 받아주는 곳이 우리 광대패입니다. 몸으로 먹고살 기술이 변변치 않으니 유랑하고 합숙하면서 기술을 배우는 거지요.”
“……내가 질문을 잘못했군. 그러면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을 모두 한데 모아줄 수 있겠나?”
후보군이 너무 많았다.
다섯 살배기서부터 어른이나 다름없을 만큼 어엿한 아이들까지 50명이 넘는 전쟁고아들이 내 눈앞에 있었다.
다행히 잘 먹이면서 지내는지 아이들의 영양상태는 좋아 보였다. 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버려졌다는 사실에 적응해야 했던 아이들 특유의 안쓰러움이 있었다.
후줄근한 옷차림보다 기죽은 표정에서 더욱 그것들이 느껴졌다.
몇몇 아이들은 막 자다가 끌려 나왔는지 입가에 침이 흥건했다.
“이게……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진짜 전쟁이구나.”
아스티나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삼월초원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쌍마대전은 엄밀히 말해 진짜 전쟁이 아니다. 죄수들끼리의 알력 다툼을 커다란 규모로 확장했을 뿐.
무엇보다 천마신교와 백묘탑은 오랜 시간 힘을 갈고 닦은 강자들이었다. 상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자신의 목숨 또한 내놓는 투사들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아니다.
그저 침략과 핍박이 일상인 터전에서 태어났을 뿐 아무런 죄가 없이 이런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 여기가 파천황이 태어난 세계야. 그 역시 처음엔 저 아이들처럼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떠돌았겠지. 도착한 곳이 광대패가 아니라 노예 검투장이었을 뿐.”
“내가 본 책에서는 기사나 마법사들의 영웅담만 가득했어. 전쟁이 지나간 자리엔 이런 아이들이 남게 되는구나.”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어. 이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전쟁이 없는 통일 제국을 세운 르팔타커스는 대단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역시 많은 피를 흘렸겠지. 내가 빙의한 소녀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거고.”
이 추체험의 세계에 떨어진 후 줄곧 느껴왔던 감정을 아스티나도 짊어지게 된 거다.
르팔타커스의 위업에는 분명 빛과 어둠이 있다.
한 인간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쟁패에서 승리한 자.
하지만 그렇기에 유산이 이어질 수 없다. 르팔타커스가 없는 텅 빈 제국이 지금 어찌 되었을지 상상해 보면 아득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든 캉이를 찾아내 보자. 내 직감은 이 아이들 중에서 있을 것 같거든.”
“무슨 방법을 쓸 건데?”
“음, 너희들 중에서 공중제비를 돌 수 있는 애가 있느냐?”
그러자 50여 명의 아이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백덤블링을 선보였다.
시키면 바로 동작이 튀어나온다는 점에서 얼마나 훈련이 잘돼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 잘하는데? 이래서야 구분이 안 되잖아.”
그 뒤로도 캉이가 잘하는 동작들을 시켜보았으나 어느 한 아이도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몇몇 아이들은 구미호로 태어난 캉이의 천부적인 몸놀림을 뛰어넘기도 했다.
그때 눈길을 사로잡는 아이가 있었다.
구석에서 특이한 목걸이를 하고 있는 어린 꼬마였다.
“쟤는 왜 저렇게 떨어져 있지?”
“아, 쟤는 허드렛일 하는 녀석이에요. 발재주가 그렇게 뛰어나질 않아서.”
나는 묘한 이끌림 때문에 어느덧 그 꼬마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 목걸이는 어디서 났니?”
허름한 줄에 꿰어져 있는 건 금은보석이 아니라 형태가 각기 다른 동물들의 뼈였다.
“제 친구들이에요.”
꼬마는 광대패를 따라다니며 묘기를 선보이는 늑대나 원숭이들의 뼛조각을 목에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래전 대수림에서 자신을 지켜주었던 죄수들의 수갑을 묘비 위에 묶어놓았던 한 외로운 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나와 아스티나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찾은 것 같지?”
“캉이야, 우리가 만나러 왔어.”
“……형아?”
베르단디를 꼬마 앞에 비추자 우리가 알고 있던 캉이의 모습이 꺼풀을 벗고 일어섰다.
“우와, 여기는 아무도 수갑을 안 차고 있네?”
아스티나와 마찬가지로 캉이 또한 푸르가토리움 바깥의 세상을 처음 구경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들떠 있는 구미호를 진정시키는 데 애를 좀 먹어야 했다.
“그렇게 찾아봐도 여기에 변신하는 자동차 같은 건 없어.”
“왜왜? 형아가 있던 세계가 아니라서?”
“……응. 제트카이저는 내가 있는 지구에만 있는 거야.”
물론 자동차에서 변신하는 슈퍼로봇 같은 건 당연히 지구에도 없지만 일단 그렇게 둘러댔다.
토니아를 찾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샴쌍둥이로 태어났다가 반쪽을 잃은 페어리 퀸.
그런 조건을 충족하는 인물이 여럿 존재할 리 없었으니까.
토니아는 몸 절반이 화상으로 뒤덮인 채 독초를 연구하는 약초사의 몸에 빙의해 있었다.
“어떻게 식물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죠?”
유도질문 같은 걸 할 필요도 없었다. 약초사는 무지갯빛 색채를 내뿜는 베르단디를 보자마자 홀린 듯이 먼저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르고 베르단디와 접촉시킨다.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자 약초사는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아주 작은 페어리의 몸으로 줄어들게 된 것이다.
“세계수가 없는 행성이라서일까? 정령의 기운도 약한 것 같아. 대신에…… 다른 게 있어.”
“아홉 신의 존재감일 거야. 르팔타커스가 자라온 여긴 신력이 자연력을 압도하는 세계니까.”
이제 마지막 친구를 찾아내 볼 차례였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막막한 상황에 부딪혔다.
“제르비어스 아저씨는 누구로 변장해 있는 거야?”
“변장이 아니라 빙의라고, 캉이야.”
“빙의가 뭔데?”
“……아니야. 편할 대로 생각하렴.”
“슈바인,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마족이 있을 리 없잖아?”
르팔타커스 시온의 용력을 의심해 악마의 핏줄이라고 몰아붙였던 자들이 모두 이단으로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만약 마족이 공존하거나 마왕이 현신해 있는 세계였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단 심문의 단계 이전에 마왕과의 충돌이 있었겠지.
“제르비어스가 마족에만 빙의할 수 있는 건 아닐 거야. 토니아도 페어리지만 인간 여성의 몸에 깃들어 있었으니까.”
“슈바인, 중요한 사실 하나 정정하자면 그는 남자였어.”
“에엑? 진짜?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남자의 몸 안에 여성성을 품고 있었던 거지. 아마 그런 점 때문에 부족으로부터 핍박받았던 모양이야. 나와 비슷하지 않니?”
생각해 보니 페어리 토니아는 남성 페어리 크로톤과 한 몸으로 태어난 기형 요정이었다.
그 때문에 불길한 존재로 낙인찍힌 채 살아왔으니 토니아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접근 방법을 달리해보자고. 마왕도, 마족도 없는 세계라면 종족 특성이 아니라 행동 양식에서 후보군을 좁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먼저 군인들을 제외했다.
제르비어스는 자발적인 폭력을 싫어했으니까.
“형아, 제르비어스 아저씨는 천공섬에서 용으로 변신했잖아. 어쩌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인 것 아닐까?”
황제의 최후 결전을 따라온 이 무리엔 당연히 인간뿐 아니라 온갖 털 짐승들이 잔뜩 있었다. 요리에 쓰일 가축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수백 마리나 되는 돼지나 양을 붙잡고 제르비어스의 이름을 외쳐야 하는 건 너무 오래 걸릴 텐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도 걱정이고.”
“돼지는 아니야. 염소일 거야.”
“왜?”
“제르비어스는 뿔이 있잖아.”
아스티나의 추리는 제법 날카로운 데가 있었으나 서른 마리의 염소들 중 누구도 마왕으로 돌변하지 않았다.
겁먹은 염소들 때문에 목축군의 볼멘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제르비어스를 찾지 못한 채로 어이없게 7회차를 넘겨버릴 위기였다.
그때 벼락처럼 백묘탑의 서고에서 ‘마왕이 너무 잘함’이나 ‘대마도사의 부적절한 성인식’ 같은 야설들에 흠뻑 빠져 있던 마왕의 뒤통수가 떠올랐다.
“설마?”
색다른 방향에서 탐색의 가능성이 엿보이자 나는 다급한 마음에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았다.
“폐하, 설마 결심을 바꾸신 겁니까. 신들과의 싸움에서 폐하의 곁을 지킬 병사로서…… 저들은 그다지 효용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부름에 달려온 대장군은 내 옆에 도열해 있는 친구들을 보며 난색을 표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그의 시선으로 보이는 것은 주술사를 부축하던 가녀린 소녀, 이상한 목걸이를 하고 있는 광대패의 꼬마, 신체 절반이 불타버린 약초사일 테니까.
“그런 것까지 설명할 시간은 없고. 물어볼 것이 있다, 대장군.”
“하명하십시오.”
“야설이 뭔지 알아?”
“야설이요? 희한한 단어군요. 야외에 내리는 눈 같은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음. 도색잡지 같은 서적을 말하는 거야.”
“아하. 색화첩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제국이 확장한 영토에서 서적을 수집하는 수집꾼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색화첩을 전문으로 모으는 자도 있고요.”
내 얼굴에 자연히 화색이 돌았다.
“잘됐군. 그자를 내 앞에 데려와 줄 수 있겠어? 아니, 그냥 우리와 함께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낫겠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폐하의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어? 설마 자네가?”
“그렇습니다. 대륙에서 긁어모은 색화첩의 절반 이상을 제가 관장하고 있습니다.”
“대장군이 업무도 바쁠 텐데 그런 걸 압수해서 관리하느라 바빴겠는걸?”
그러자 덩치가 산만 한 대장군은 놀랍게도 발그레해진 얼굴로 목소리를 죽였다.
“압수한 게 아니라…… 제가 보려는 목적이었습니다만.”
나는 십여 초간 멍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스티나를 비롯한 친구들의 눈빛을 차례대로 훑어본 후…… 이렇게 말했다.
“제르비어스, 너냐?”
그러자 베르단디가 내 품에서 두둥실 떠올랐고,
대장군의 몸이 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