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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46화 (246/300)

#246. 파천황에게 없는 것 (4)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눈앞의 소녀는 분명 아스티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거친 머릿결의 흑발은 물론이거니와 오랜 유랑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거뭇한 피부, 그리고 왜소한 체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짐이 너의 아비를 죽였다고?”

“그래! 네놈이 혼자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 복수는 오로지 나의 것이다. 신들 따위에게 양보할 수 없어.”

세찬 검기가 내 목을 노리고 찔러들어왔다.

나는 막사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섭물. 곧 묵직한 솥뚜껑이 날아들어왔고 다급한 대로 내공을 둘러 습격을 막아냈다.

두 뼘짜리 단검과 솥뚜껑이 서로 강기를 두른 채 공수를 반복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됐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짐이 어떻게 네 아비를 죽였단 말이야?”

“아버지뿐이 아니다. 어머니도 함께였어. 두 분은 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셨다!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네놈의 칼을 맞았지.”

아스티나와 천마 류운학의 상황과 지나치게 비슷하지 않아?

나는 일부러 공방의 템포를 늦추면서 질문을 이어나가보기로 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짐은 시온 제국의 황제다. 자식의 눈앞에서 그 부모를 참살했다면 어째서 목격자인 너를 살려둔 거지?”

“그건…….”

연격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흑발의 소녀는 자기 안에서 대답을 찾는 듯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대 위에서 연기에 몰입해 있던 배우가 마치 외워두었던 대사를 까먹고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 무공과 마법은 어디서 배운 거지? 이 대륙에 이런 체계를 가진 초인들이 있을 리가 없는데.”

“마법? 나는 마법 따위 배운 적 없어.”

“그래? 그렇다면 이 난장판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 얄팍한 단검으로 단단한 철판을 찢어버렸다고 말하는 거야?”

나는 거의 너덜너덜해진 솥뚜껑을 내동댕이치며 물었다.

“네 마법이 백묘탑에서 배운 게 아니란 말이야?”

“……배, 백묘탑?”

암살 의사를 보인 이래 처음으로 소녀가 뒷걸음질을 쳤다. 동공이 커다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떻게 황제랑 싸우고 있지? 나는 누구에게도 칼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

소녀를 자극하지 않도록 나는 제 자리에 서서 입을 움직였다.

“귀혼산장. 너는 그곳에 있었을 거야. 그리고 무수히 많은 마교도들의 애정을 독차지하면서 무공을 키워나갔었지. 기억해 내봐.”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니야.”

“네가 가진 복수심은? 그것 역시 이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닐 텐데.”

결국 소녀가 머리를 붙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쥐고 있던 단검은 아무렇게나 떨군 채.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렴풋이 감이 오기 시작했다.

‘나 혼자 끌려온 게 아니었어. 이 추체험의 세계에 아스티나가 휘말리게 된 거야.’

늙은 주술사 노파를 곁에서 부축하던 손녀. 이 소녀는 대체 몇 회차부터 존재해왔을까. 설마 내가 시험을 치르기 시작한 1회차부터?

처음 1회차의 아침에 깨어났을 때 내가 주술사를 만나기로 했다면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었을까.

“아스티나. 그 안에 있어?”

내 목소리에 소녀는 뱀을 만난 살쾡이처럼 흠칫 뒤로 물러났다.

“왜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그냥. 그 이름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나를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 마.”

나는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는 황제의 말투 따윈 버리고 본래의 나로 돌아와 물었다.

“그러면 네 진짜 이름을 말해 봐. 내가 네 아버지의 원수라면 당연히 이름부터 말하고 싶은 거 아니겠어?”

“내 이름은…… 이름이…… 뭐지?”

앙증맞은 손바닥이 소녀의 반쪽 얼굴을 덮었다. 뭔가 내면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는 듯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잠깐 튀어나왔다가 사라지는 저 하이드다.

이제는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소녀는 내가 삼월초원에서 만난 아스티나 류다. 천마 류운학과 마녀 일레인 사이에서 태어난 하나뿐인 딸.

우리의 첫 만남도 이런 칼부림이었다.

이 시험을 치르기 전에 나는 르팔타커스의 영령에게 분명 아리송한 조언을 들었다.

‘한 가지만 명심하도록. 짐은 그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대 역시 짐이 아니다.’

이제야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르팔타커스는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았던 독존자였다. 당연히 기원검의 시험을 치를 때도 그는 혼자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친구맺기’의 권능으로 이 감옥을 돌파하는 중이다.

주술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의 수수께끼도 풀린 것 같다. 분명히 그녀는 내게 ‘끈’의 존재를 이야기했다.

인과율의 끈으로 맺어진 친구.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을 느껴야 했어. 이 추체험의 세계에서 무극파천공이나 폭렬마법, 정신지배 같은 걸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잖아?’

친구들과 다른 층에 있을 경우 스킬은 봉인된다. 하지만 추체험의 세계에서 천사들과 싸울 때 내가 빌려오지 못하는 스킬은 없었다.

처음부터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어떻게 소녀 안에 있는 아스티나를 깨울 수 있을까?

정신지배는 쓸 수 없다. 자쿰처럼 단순한 야수라면 모를까 인간처럼 섬세한 작용을 하는 존재에게 먹히는 술수가 아니다.

광룡 메르킨의 마인드 스포일러는 이전 층에서 골제에게 던져주고 와 버렸다.

내가 끙끙대고 있을 때 뇌리를 스친 건 푸르가토리움에서 가장 최근에 사귄 친구의 존재였다.

“베르단디? 어디에 있지?”

영혼과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세계수의 꽃잎. 어쩌면 베르단디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미처 깨닫지 못한 꽃송이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옷 속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답답한 나머지 웃옷을 아예 집어던져 버렸다.

“꺄악! 무슨 짓이냐. 이 파렴치한! 나를 겁탈하려는 것이지?”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저 소녀.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웃통을 깐 나를 보자 눈빛이 다시 적의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이드가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지킬 박사가 주도권을 쥐려는 모양이다.

서둘러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침대의 머리 맡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거기 있었구나, 베르단디!”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유산이 베개를 찢고 피어올라 있었다.

베르단디가 내뿜는 빛이 소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검은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물들고 길이가 쑤욱 늘어났다. 골격 또한 내가 알고 있던 여인의 그것으로 탈바꿈했다.

아스티나 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표정은…… 황당해하고 있었다.

“슈바인? 시험을 통과했구나!”

놀랍게도 아스티나는 추체험의 원주민들과 달리 나를 르팔타커스 시온이 아닌 슈바인 스트링거로 인식하고 있었다.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이겠지.

“아니야. 미안한데 너도 잡혀 온 모양이야.”

최대한 간결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집중하며 내 이야기를 들은 아스티나는 곧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너 혼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차원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는 거구나. 그리고 나를 소환한 거야.”

“우연이었어.”

“그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겠네. 나와 베르단디가 이 추체험의 세계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면 다른 동료들도 가능할 거야.”

“그래. 모두를 찾아서 다 함께…….”

우르르르르릉.

그때 막사가 격동하면서 골조들이 일순간에 박살나 버렸다.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대규모의 지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슈바인?”

“모르겠어. 6회차 동안 한 번도 이런 상황은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주술사를 만나서 르팔타커스에 대해 오랜 시간 대화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소녀와 싸우다가 아스티나를 깨우는 동안 시간이 훌쩍 흘러 버렸다.

일몰의 시간에 당도해버린 것이다.

시온 제국의 신민들은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모두 하늘을 보고 있었다.

보지 않으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노을이 물든 하늘을 찢고 나타난 그것.

그것은 손바닥뿐 아니라 전신의 육체를 수복한 아홉 신의 전령이었다.

[너희 인간들의 대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 아홉은 너희 모두를 소멸시키고 세계를 정화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아스티나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까지 저런 놈이랑 싸워왔다고?”

“……찔끔해서 이실직고하자면 저것 중에서 한쪽 손이랑만 싸운 거야.”

우리가 대화하는 와중에도 아홉 신은 세계의 절멸을 선포하는 중이었다.

[비겁하게 숨은 채 나타나지 않은 너희들의 황제를 원망하면서 죽도록 하라!]

하늘이 부서지면서 불타는 운석 파편이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나는 아스티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사과했다.

“들어오자마자 죽게 해서 미안해. 곧 다시 보자고.”

“그게 대체 무슨 말…….”

콰아아아아아앙!

*

“이제야 좀 활로가 보이는군.”

운석 엔딩으로 6회차를 마무리했으나 일곱 번째 아침을 맞이하는 내 마음은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이 추체험의 세계에서 홀로 고독하게 떨어져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베르단디.”

이름이 불리자 베개 속에 숨어 있던 베르단디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이 추체험의 세계에 친구를 빙의시키는 첫 번째 조건은 ‘진짜 이름’을 부르는 것인 듯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 베르단디의 빛.

이 꽃잎이 어디에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생각해 보면 얼추 말이 된다. 위그드라실은 환수들의 영혼을 복제하는 생물병기였다.

마법으로도, 환술로도 어쩌지 못하는 영혼의 작용에 베르단디는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주술사를 불러오라고요?”

“아니야. 내가 직접 가겠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기만 해.”

대장군이 알려준 장소를 찾아 주술사가 이동하고 있는 마차를 찾아냈다.

“폐하. 어쩐 일로 이 누추한 곳에?”

“미안한데 볼일이 있는 쪽은 당신이 아니라 손녀 쪽이야. 그렇지, 아스티나?”

잔뜩 나를 경계하고 있던 주술사의 손녀에게 베르단디를 코앞에 들이밀어 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아스티나가 나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런 식이구나.”

“다른 친구들은 만났어?”

“아니. 내 입장에선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다시 불려온 거야. 운석을 맞고 죽었더니…… 지금 여기인 거야.”

“좋아. 그러면 다른 친구들을 찾으러 가자.”

아스티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는데도 주술사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뭔가 마음이 켕겨 노파에게 양해를 구했다.

“손녀를 잠깐 빌려 가도 되겠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소인에겐 손녀가 없습니다만.”

“……그래, 알겠어.”

아무래도 외부자가 추체험의 세계에 빙의하는 순간 본래 덧씌워진 존재는 망각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후보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아스티나는 수천 명의 신민들을 마주하자 아득해진 모양이었다.

외양만 봐서는 친구들이 어떤 인물들에게 빙의해 있는지 판단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한 명씩 불러내 베르단디를 보여주고 이름을 불러보는 것 또한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러는 사이 일몰이 찾아오면 어이없이 회차 하나를 날려버리는 것이다.

지금부턴 한 회차가 소중하기에 더 영리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빙의는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게 아니야. 거기엔 규칙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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