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파천황에게 없는 것 (3)
“제가 걱정한 것은 폐하의 사후였습니다. 세상에서 신의 감시와 가호를 동시에 없애버린 자가 죽게 된다면 문명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대혼돈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요.”
노파의 음색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멀어버린 눈으로 직접 그 대혼돈의 미래를 보고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르팔타커스에게 신이 되길 부탁한 건가.”
“정확히는 신을 죽인 자, 그 옥좌를 비워놓아서는 안 된다고 충언을 드렸지요.”
“그게 지금의 내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폐하의 흉내자시여. 저는 이렇게 태어난 바람에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위해 (이루고자) 도전하는 인간들을 많이 만났답니다.”
주술사의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이끼처럼 피어났다. 느릿느릿한 손짓으로 그녀가 내 손바닥을 다시 어루만졌다.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으나 한 번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보기로 했다.
“르팔타커스 황제 폐하도, 그리고 당신도 같은 부류라는 걸 알겠군요. 범인들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수록 오히려 불타오르는 신념을 가진 자들. 한데…… 그런 자들의 맹목은 신화로 남겨질 위업을 가능케 하지만 보지 못하는 점도 분명하지요.”
“그게 뭐라고 생각해?”
“폐하께서는 자신이 떠나버린 뒤 남겨진 제국의 신민들에 대해 아무런 동정심이(도) 없으셨습니다. 그분이 세계에 요구한 것은 핏값이었지요. 우연에 의해 농락당하고 신에 의해 감시당하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고자 하셨을 뿐, 그 인간을 보살필 계획은 갖고 있지 않으셨다는 것.”
핏값. 그것은 르팔타커스의 영령이 내게 반복해서 말했던 단어였다.
그는 딱히 신들을 원망했던 게 아닌 모양이다. 다만 자신이 받아낼 핏값을 갖고 있었던 게 아홉 신이라고 판단했을 뿐.
“스스로 강한 빛을 내는 자들은 그 때문에 생길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되지요. 제 생각에는 폐하뿐 아니라 당신도 그렇습니다.”
“내가?”
분명 나는 푸르가토리움에서 르팔타커스의 선택을 받았고 그가 못 이룬 탈옥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의 운명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온갖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죄수들 중에서도 르팔타커스는 정점에 오른 자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게임 캐릭터로 조형된 용사의 몸을 빌렸으나 결국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동의 못하겠는데? 나는 르팔타커스와 달라. 세계에 물어야 할 핏값도 없고 인류 전체의 운명을 걸고 뭔가 이루고 싶은 생각도 없어. 나는 그저 내 한 몸 자유롭고 싶을 뿐이야.”
바로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팔타커스 폐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자유를 위해 검을 휘두를 뿐이라고. 그러니 다른 인간들도 그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문득 주술사가 르팔타커스의 미래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그에 대해 질문하자 노파는 숨길 것이 없다는 듯 대답했다.
“제가 인간의 운명을 읽는 방식을 먼저 설명드려야겠군요. 저는 그 인간이 품은 영혼이 어느 별의 골짜기에서 멈춰 서는지를 봅니다. 그것은 단어로 제게 전달되지요.”
아카식 레코드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 뛰어난 주술사는 그 허공록의 종이 몇 장을 더듬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인지도 몰랐다.
“폐하의 여정이 멈춰선 별자리에서 제가 읽어낸 것은 ‘자살’이었습니다. 그분은 죽음마저도 다른 누군가의 손에 맡기지 않는구나 싶었지요.”
“그 말을 들은 르팔타커스의 반응은 어땠지?”
“코웃음치셨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의 좌절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하셨지요. 저는 그 일이 벌어질 순간의 별자리를 살펴보았으나 무척 생소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발붙인 이 대륙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하다.
르팔타커스는 내가 빙의한 이 날에 아홉 신을 살해한 뒤 그 죄목으로 봉마연옥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 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층인 9층에서 실패한 뒤 스스로 심장을 뜯어내 자결했다.
당시의 르팔타커스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럼 나는 어떻지?”
“당신에게서 익숙한 별자리를 보았습니다. 필멸자를 압도하는 존재감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잔뜩 모여있는 곳이지요. 르팔타커스 폐하가 최후를 맞이한 곳과 같은 장소가 아닐런지요.”
“……정확해. 나는 그의 유언을 들었고 그것이 여기까지 내 여정을 인도했다.”
“제가 당신에게서 읽어낸 단어는 ‘왕’입니다. 크고 또렷하며 멀리까지 반짝이는군요.”
또 그 이야기였다.
교도관장이 처음 내게 말했었고 구미호인 호이란 또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내가 왕이 될 자라고.
어쩌면 그것이 탈옥을 위해 반드시 이룩해야 할 칭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의 숙원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그것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마른 침이 삼켜졌다.
과연 이 주술사의 예언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 노파는 르팔타커스의 운명을 거의 정확하게 맞추었다. 그렇다면 내 운명 또한 읽어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하지만 여기는 추체험의 세계.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실존했던 한 노파의 잔영일 뿐이다. 그 신통력까지 재현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제 힘으로 알 수 없습니다. 낯선 별자리를 넘어서서…… 공허가 그 자리를 가리고 있습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 처음 맞이하는 경험이로군요.”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다는 거야?”
“가로막고 있다기보단 아직 때가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당신은 머지않아…… 저처럼 미천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예언자를 만나게 될 겁니다. 아마도 그분의 존재감이 제 눈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곧 예언자를 만나게 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푸르가토리움의 교도관장이었다. 하지만 녀석과는 이미 여러 번 만나서 얽혔다. 미래를 알고 있으나 내게 예언 비스름한 걸 해준 적도 없다.
그렇다는 건 8층에서 있을 일을 예고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당신은 그 예언을 거부할 겁니다.”
“……거부해?”
“네. 특이한 반응은 아니지요. 많은 이들이 미래를 알고 싶어 저를 찾아오지만 그들은 자신의 앞날을 알고 싶은 게 아닙니다. 원하는 미래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내가 만날 그 대단한 예언자의 말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거군.”
“그래서 저와 같은 인간 예언자들은 아무리 비극적인 운명이어도 모호한 말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언어를 방패를 사용하지요. 어쩌면 당신이 조우할 그분께서는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술사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의외로 미래를 점치는 이 노파의 체력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꼿꼿이 허리를 편 채 지치지도 않고 나와 긴 시간 대화했다.
다만 노파를 부축하고 있는 소녀의 안색이 파리했다. 아마 제국의 황제를 눈 앞에 둔 위압감을 이기기가 쉽지 않았을 터다.
아홉 신이 예고한 일몰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주술사와 소녀에게 물러가란 손짓을 했다.
“일어서기 전에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더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뭐지?”
“처음에 저에게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당신은 시험을 치르고 있으며, 그 통과 방법을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고.”
“그래. 맞아. 거기에 대해서 실마리를 알려줄 수 있겠어?”
“실마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읽어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표현이 곧 노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끈. 당신은 이미 시험을 통과할 수단인 ‘끈’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낸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시험에 활로가 보일 것입니다.”
*
끈이라.
아리송한 단어였다. 거대한 손가락에서 쏟아져 나오는 천사병들을 대적해야 하는 입장에서 고작 끈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폐하. 어떠셨습니까.”
노파와 소녀가 사라지자 대장군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시키지도 않은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꾸짖을 생각은 없어.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자리를 비켜줬으면 해.”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잖아. 걱정하지 말고 본래 자리로 돌아가.”
내가 아홉 신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관찰하는 것이 이번 회차의 목표였다.
예상치 못하게 주술사를 만나서 아리송한 예언을 듣게 되었으나 이제부터가 정신을 바짝 차릴 순간이었다.
‘어쩌면 아홉 신이 거꾸로 나를 찾아올지도 모르지.’
그렇게 될 경우 내 곁에 있는 인간에게도 커다란 재앙이 떨어질지 모른다.
비록 이 추체험의 세계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이 가상의 NPC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천사병에게 도륙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고.
‘끈이라니. 이미 내가 갖고 있는 끈?’
어쩌면 물질적인 끈을 말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생각을 넓히면 주술사가 말한 끈이 어떤 뜻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똑똑똑.
그때, 누군가가 막사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연 것은 대장군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게 낯선 인물도 아니었다.
주술사의 곁에서 그녀를 부축하던 말없는 소녀.
그 소녀가 고개를 숙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뭔가를 놓고 가서요.”
“그게 뭐지?”
여기 있다간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나는 소녀가 놓고 간 게 무엇일지 함께 찾아줄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에게서 뿜어지는 기세가 일순간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것은 내게 지독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풀숲에 숨은 승냥이가 처음 발톱을 드러낼 때의 오싹한 예감.
“제가 놓고 간 것은 폐하의 목숨입니다.”
소녀의 손목에 숨겨져 있던 두 뼘 길이의 단검이 챙하고 튀어나왔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집중하면서 대꾸했다.
“암살자라고?”
“내 아버지의 원수.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이고 그 원한을 갚겠다.”
뭐 이렇게 황당할 데가 있나.
이 가녀린 소녀가 르팔타커스 시온을 죽이겠다고 나선 것도 어이가 없는데.
무엇보다 나는 르팔타커스가 아니란 말이다.
이 소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르팔타커스에게 왜 죽었는지도 모른다.
“꼬맹아.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문답무용!”
뭔가 세계관에 맞지 않는 단어를 외치며 소녀가 내게 덤벼들었다. 아무리 약해 보이는 외양을 지녔다 해도 암기를 든 이상 멍청하게 서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보법을 사용해 단검의 간격에서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 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소녀의 단검에서 1미터가 넘는 검기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촤아아악!
막사의 천막에 붉은 피가 덧칠해졌다.
나는 축축해진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멍하니 소녀를 노려보았다. 아홉 신의 천사병조차 내게 첫 피를 흘리게 만들기 위해서 떼죽음 당했는데, 이 가녀린 아이가 방금 그걸 해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보았다.
우리 둘 사이의 간격을 지워낸 소녀의 ‘마법’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중력 마법 워핑이었다.
“역시 피해냈구나, 아버지의 원수.”
소녀의 등 뒤에서 빛나고 있는 익숙한 마법진.
그것은 분명 내 친구 목록에 올라 있는 은발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아스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