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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44화 (244/300)

#244. 파천황에게 없는 것 (2)

“지금 여기는 허구의 세계고 너희도 재현된 허상에 불과하단 얘기지.”

아홉 신들이 내 말을 듣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며 무시한다 해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참고로 나는 르팔타커스 시온도 아니야. 그는 오래전에 죽었고, 나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그가 남긴 기원검을 물려받아 이 시험을 치르고 있는 도전자다.”

[이 전투가 이미 오래전에 벌어졌고 지금은 그것을 재현한 환상에 우리가 투영된 것이라고?]

[신을 모독하기 위해 꾸며낸 헛소리라면 창의력 하나는 손뼉쳐줄 만하군, 르팔타커스.]

[울혈의 신이여, 잠깐 멈추어보라. 저 인간의 말이 사실일 경우를 타진해 봐야 한다. 기원검은 뒤틀린 신이 만든 무기. 그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고했는지를 생각하면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은 아니다.]

[허구의 세계선 위를 달리고 있다는 소리인가, 질주하는 신이여.]

[신이 자신이 관장하는 세계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군.]

아홉 신들은 놀랍게도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자신들끼리 격한 토론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뜨거운 반응이었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 가정할 경우 우리에겐 모독적인 이야기가 된다. 뒤틀린 신의 권능이 우리 아홉 신의 독자성과 반응을 흉내 낼 정도로 뛰어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뒤틀린 신은 아무런 타협도 하지 않는 괴팍한 성정을 가졌으나 그 권능이야 의심의 여지 없이 대단했으니까.]

[기원검에 대해서 집중해 보자고. 저 인간이 르팔타커스 시온의 다음 주자라고 한다면…… 실제로 벌어진 오늘의 전투에서 우리 아홉 신이 패배했다는 뜻.]

[우리는 자존심에 얽매여 사는 필멸자가 아니다. 결과가 모욕적이라고 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나는 차분하게 그들이 서로의 의사를 통일하는 과정을 기다려주었다. 여기서 내가 끼어든다 한들 역효과만 일으킬 것 같았다.

잠시 후 토론은 잦아들었고,

적막함의 신이 앞으로 나섰다.

[그래서 이 세계가 만약 가상이라면 그대가 바라는 건 뭐지?]

“너희들 스스로 물러가는 것. 신적 존재라면 자존심이 있을 거 아냐? 뒤틀린 신의 꼭두각시 짓을 너희의 손으로 내던지란 소리지.”

[역사상 최강의 전사가 어찌하여 무기도 없이 전장에 나섰나 했더니…… 항복하겠다는 게 아니라, 거꾸로 우리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내겠다는 뜻이었군.]

정확하다.

이것이 5회차에서 내가 생각한 마지막 변칙수였다.

싸움 없이 상대로 하여금 백기를 들게 하는 것.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연극일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오호. 내 작전이 먹히는 건가?

하지만 좋아하긴 일렀다.

[그러나 너의 두뇌에서 나온 책략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 만약 우리가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거품에 불과하다 해도 무대 안에서 무대 밖을 확인하는 건 불가지의 영역.]

잠깐. 이야기가 왠지 불리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저 멀리서 손톱이 열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을 내렸다.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가능성을 무시하고 본래의 목적에 따르기로. 르팔타커스 시온이여, 그대는 이곳에서 죽는다.]

아홉 개의 손톱이 일제히 개방됐다.

신들이 내린 결론은 가상의 꼭두각시 역할을 묵인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다음 회차로 넘어가야 할 모양이다.

*

열 번의 기회 중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6회차의 아침에 나는 단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루트를 밟아 보기로 했다.

갑옷도 벗어둔 채 셔츠 하나만 걸치고 연회 준비에 한창인 광장으로 걸어간 것이다.

“폐, 폐하.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승전의 축제라는 걸 조금 앞당기고 싶다고. 음식도, 물자도, 사람들도 다 준비돼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지 않아?”

“그렇긴 합니다만 폐하와 제국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커다란 싸움 앞에서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될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싶어진 거니까.

곧 등장할 거라 기대했던 사내가 등 뒤에 나타났다. 황제의 대장군이었다.

“싸움에 앞서 승전 축제를 벌이신다니…… 언제나 폐하께선 제 예상보다 한 모금 더 파격적이시군요.”

“뭐 어떤가. 저렇게들 즐거워하는데.”

확장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온 제국이라면 국가의 재정이 순탄하지 않았을 거란 짐작이 가능했다. 아마 오늘의 연회를 위해 데려온 대규모의 가축들도 구하기 쉽진 않았을 거다.

“싸울 필요가 없는 신민들이라면 저렇게 신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사들은 달리 생각하는 법이지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폐하께서 패배를 염두에 두신 게 아닐까 걱정하는 중입니다. 오늘 아홉 신이 폐하를 쓰러트린다면 이렇게 정성 들여 준비한 축제는 벌어질 수 없을 테니까요.”

패배했을 때를 가정해서 미리 신민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냐.

대장군의 눈빛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지력은 다소 떨어지는 것 같은데 눈치와 직감이 아주 비상한 사내였다.

그의 말처럼 나는 6회차에서 아예 싸움에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홉 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 머리를 식힐 필요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기원검이 만들어낸 추체험의 세계가 허구란 것을 안다. 눈앞의 대장군도, 기원검을 깔고 앉아 있는 자쿰도 전부 가짜에 불과하다.

최소한 만질 수 있는 인형의 육체라도 있었던 만철도시의 오토마타들보다 더한 수준의 허구.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건 전염되니까.

어쩌면 그런 과정에서 내 기분 또한 좋아질지 모르잖아?

“짐의 단순한 변덕이라 생각해. 너무 과하게 걱정하는 것도 좋지 않아. 축제 때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면 분위기 망치는 주범이라고.”

진지 전체에 대낮부터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다.

대륙의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공연이 펼쳐졌다. 자쿰에 비해 훨씬 덩치가 작은 사자들이 불길 위를 뛰어넘었고, 조악한 수준의 마술 공연도 이어졌다.

무희들의 춤은 색다른 재미가 있었는데 상체와 하체가 전혀 다른 리듬에 의해 움직이는 신묘한 체계를 갖고 있었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춤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시온 제국은 정복전으로 영토를 확장하지만 노예를 해방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자연스레 서로 섞일 리 없던 거리의 왕국들 문화가 섞이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예가 저 춤이라고 하지요.”

분쟁을 없애기 위해 더 큰 힘으로 대륙을 통일해버린 사내.

그의 위업이 저 무희들의 손동작과 발동작에 스며들어 있었다.

대장군과 나는 축제 한복판에서 슬그머니 빠져 황제의 침소에서 작은 술상을 앞에 두고 있었다.

“더 지켜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아니, 괜찮아. 짐이 지켜보고 있으면 흥이 덜 날 것 아냐.”

“……폐하의 배려심이 대단하시군요.”

대장군의 감탄에 마음속 한구석이 찔렸다. 함성과 고함이 득시글대는 곳에선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어서 내린 결정이었을 뿐이기에.

그때 누군가가 황제의 침소를 방문했다.

눈앞을 가린 노파와 그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 따라온 소녀였다.

“제국 최고의 주술사입니다. 제가 불렀습니다.”

“무슨 이유로?”

“폐하에게서 어떤 고민거리를 느꼈는데…… 그것에 관해선 저보다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대장군의 마음 씀씀이를 내칠 수 없어서 나는 노파를 침소 안으로 들였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노파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고, 소녀는 그녀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대가 주술사라고?”

“소인은 땅거미의 신을 모시는 고위 사제였습니다. 신들은 운명을 읽는 힘을 주는 대신에 두 눈을 가져가시지요.”

대장군이 자리를 비켜준 사이 나는 주술사 노파가 시키는 대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금을 읽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노파는 쭈글쭈글해진 손으로 손바닥을 잠자코 어루만질 뿐이었다.

“어떤 식으로 운명을 읽는 거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맥박을 느낍니다. 인간의 영혼은 그 피를 타고 돌기 때문이지요.”

잠시 후 노파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나는 모른 체하며 지켜보기로 했다.

“그대는…… 시온 제국의 황제가 아니로군요.”

“그게 보여?”

“타고난 별의 운명이 다릅니다. 대륙의 어떤 밤하늘에서도 뜨지 않는 별자리 아래서 태어나셨군요.”

“당신의 말이 맞아. 나는 르팔타커스 시온이 아니다. 사정이 있어서 그의 역할을 잠깐 대신하고 있을 뿐이지.”

“그러하시군요.”

“별로 놀라워하지 않네? 주술사 특유의 평정심 같은 건가.”

“저를 죽이지 않으실 걸 아니까요.”

“내가 황제가 아니란 걸 알았으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는 이유는?”

“주어진 사명을 다할 뿐입니다. 주술사로서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고민을 도와주는 것이지요.”

“내 고민은 하나야. 나는 지금 몹시 어려운 시험 하나를 치르고 있어. 문제는 이 시험을 통과했던 이전 응시자보다 내 힘이 모자라서 고민 중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런 고민에 힘들어하고 있지요. 신들은 이길 수 없는 시련을 인간에게 내리지 않습니다.”

“신이 내린 시련이 아니라…… 신을 꺾어야 하는 시련이라면?”

노파의 입꼬리가 진중해졌다.

그러더니 곧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소인의 눈으로는 읽을 수 없지요. 다만 이전에 르팔타커스 폐하께 드렸던 조언을 반복할 수밖에요.”

“이전에 짐을…… 아니, 이 몸의 주인을 만난 적이 있나 보군?”

“폐하께서는 인간의 머리 위에 선 것들을 모두 증오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점성술이나 신탁의 존재를 모두 사이한 것이라고 내쫓으셨지요. 제가 그분을 알현했던 것은 점을 봐 드리고자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제국이 유지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응시자여.”

도리어 내게 질문인가.

나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강력한 왕권.”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강력한 신권입니다. 시온 제국에 부족한 것이 바로 그 신권이지요. 왕권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각 집단을 한데 묶기 위해선 통치당하는 자들의 신념 체계가 일치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던 지구에서도 얼마든지 반복되었던 역사다. 같은 땅덩어리에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던가.

하지만 르팔타커스는 종교를 통일시키기는커녕 신전을 파괴하고 아홉 신을 도발했다.

“저는 폐하에게 신이 돼라 간청하였습니다. 그분께서 아홉 신을 살해한 뒤에 인간을 보살펴줄 존재가 없어져 버리니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말씀드렸지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노파는 분명 르팔타커스의 승리를 전제로 그런 조언을 해주었던 것이다.

자신이 아홉 신을 굴복시킬 것이라고 믿는 주술사를 눈앞에 뒀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일말의 불안함을 잊게 되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지레짐작하는 주술사에게 화를 내었을까.

“그래서, 르팔타커스의 반응은 어땠지?”

“신이 되지 않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신의 자비에 기댈 필요가 없고 신의 분노에 굴복할 걱정이 없는 세계를 만들겠다 하셨지요. 그때가 되어야 인간은 비로소 ‘노예’라는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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