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파천황에게 없는 것 (1)
“비켜라! 막아서지 마!”
3회차의 아침.
나는 막사의 문을 걷어찬 뒤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누구도 황제 르팔타커스의 앞을 막아설 배짱이 없었기 때문에 신민들은 황급히 길을 비켜줬다.
내 얼굴에 드러나 있을 엄청난 분노와 짜증을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디 있지?”
마구간을 발견한 나는 냅다 말 구유통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보그르륵.
그래야 욕지거리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온갖 험악한 욕을 여물 속에서 부글부글 내뱉었다.
그러면서 2회차의 어이없는 실패를 다시 상기했다.
‘분명 최선의 수를 꺼내든 것일 텐데.’
출발은 좋았다.
나는 폭발적인 힘으로 천사들을 찍어눌렀던 1회차 때와 달리 인내심을 갖고 느리지만 착실하게 천사들을 각개격파해 나갔다.
다중포위되었을 때를 제외하면 광역기는 최대한 자제하면서 최소한의 동작으로 천사들을 쓰러트려 나갔다.
한 대를 더 때린다는 생각은 버리고, 맞지 않는 것에 주력했다.
당연히 1회차 때보다 진도가 훨씬 더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첫 번째 웨이브인 작열하는 신의 천사들을 전멸시켰을 때 내 체력은 거의 깎여나가지 않았다.
걸린 시간은 3시간 30분 정도.
소모되는 것은 수치화된 HP가 아닌 내 집중력 뿐이었고 그건 용사의 몸이 아니었을 때도 내가 갖고 있던 최고의 무기였다.
단순 계산으로 천사의 무리 하나를 쳐부술 때마다 3시간이 넘게 걸린다면 이 전투는 하루를 넘기게 될 테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두 번째 신인 얼어붙은 천사들을 상대할 때 일어났다.
작열하는 천사들의 잔해를 지뢰 삼아 터트리면서 준비한 전략대로 냉기를 뿜는 천사들을 녹여나가고 있을 때,
느닷없이 신체가 정지하면서 주변이 암전되었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괴이한 메시지.
[추체험의 달성에 실패했습니다.]
[이전 주인이 아홉 신을 쓰러트리는 데 걸렸던 시간을 초과하고 말았습니다.]
[남은 재도전 기회는 8회입니다.]
어이없게도 기원검의 시험에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단순 클리어가 목적이 아닌 타임 어택이었던 것이다.
싸움이 시작되고 4시간 이내에 모든 천사병을 몰살시켜야 한다는 소리였다.
후반으로 갈수록 천사들의 패턴이 더 까다로워지는 걸 고려하면 앞이 캄캄한 달성 조건이었다.
이쯤되니 르팔타커스가 원망스러워질 정도였다.
‘대체 이 인간은 뭘 먹고 컸길래 이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셌던 거야?’
그래서 구유통에 머리를 처박고 왁왁 내뱉었던 욕설의 대상엔 르팔타커스도 섞여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슬슬 숨이 차기 시작했다.
“푸학!”
그렇게 젖은 머리를 꺼내자 새하얀 수건이 얼굴 앞으로 내밀어졌다.
“닦으십시오, 폐하.”
대장군이 내 뒤편에 얌전한 자세로 부복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신민들이 마구간을 빙 둘러싼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체 짐이 얼마나 오래 머리를 박고 있었지?”
“제가 도착한 이후로도 3분은 그러고 계셨습니다.”
“말려보지 그랬어?”
“폐하는 황실 무도회 때 내무대신과의 잠수 대결에서도 이기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내무대신을 이겼다는 게 왜 대단하다는 거지?
그러자 곧 설명이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그는 인어입니다. 그는 패배하고 나서 인간에게 졌다는 걸 도저히 인정하지 못했죠. 결국 폐하의 옥체에서 아가미를 찾겠다며 난리법석을 피우다 이틀 동안 곤장을 맞…… 기억 안 나십니까?”
“네 말을 들으니 생각이 났어. 하다못해 잠수 능력에서 인어를 이길 정도였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신체능력으로 폐하를 앞설 수 있는 필멸자가 있을 것 같지 않군요.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는 더러워진 수건을 대장군에게 다시 돌려주며 물었다.
“짐이 불필요할 정도로 세다고 생각하지 않아?”
“건국 초기엔 그런 의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폐하가 인간으로 둔갑한 악마라고 몰아붙이던 작자들이었지요.”
“지금은 어떻게 되었지?”
“시온 제국의 까마귀는 유독 통통합니다.”
형장의 이슬로 전부 사라졌다는 소리였다.
“폐하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너도 여물이 얼굴에 잔뜩 묻으면 짐의 기분을 알 거다.”
“제 아버지는 마구간지기였습니다. 어릴 적 몇 번이나 여물통에 빠져본 줄 아십니까. 그런 건 구분할 줄 압니다.”
어느덧 3일째 대화를 나누다 보니 대장군의 목석같은 얼굴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주군을 걱정하고 있었다.
“혹 오늘 있을 아홉 신과의 결전에서 힘이 부족하실까 걱정이신 겁니까.”
나는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아니. 짐의 힘이 너무 과해서 짜증이 날 뿐이다.”
“네?”
“됐어. 신민들을 좀 물리쳐줘. 잠깐 생각할 것이 있으니까.”
대장군이 손을 번쩍 들자 그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마구간 주변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가 물러나기 전에 잠시 망설이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에 저 또한 폐하께 여쭌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하실 수 있냐고.”
귀가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르팔타커스 시온은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때 짐이 했던 대답이 뭐였지?”
“태어날 때부터 담금질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장군이 사라진 뒤에도 그 말은 오랫동안 귓가에 남았다.
*
어릴 적 철왕전기 제트카이저에 푹 빠져 있을 때 나는 그런 의문이 들곤 했다.
‘왜 제트카이저의 숙적인 외계대마왕 뫼비우스는 부하를 총동원해서 덤비지 않을까?’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어린이 애청자들의 궁금증이기도 했을 것이다.
뫼비우스의 수하인 사천왕들은 꼭 한 명씩 제트카이저와 훈이에게 덤볐다가 박살 나고 돌아와 뫼비우스에게 혼쭐이 나곤 했던 것이다.
‘사천왕을 한꺼번에 내보내면 제트카이저를 그냥 이길 수 있을 텐데?’
당연히 애니메이션의 방영 회차를 길게 늘여야 하니 모른 척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불과 여덟 살 시절에 어른 제작진의 사정이야 내가 알 리 없었다.
다만 악당들의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치사한 전법을 택할 수 없나 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자존심이 강한 건 애니메이션 속 사천왕뿐만이 아니었다.
[르팔타커스 시온이여. 방금 뭐라고 했느냐?]
“감질나게 한 녀석씩 튀어나오지 말고 전부 한꺼번에 덤벼보라고 했다. 여기 엄청 넓잖아?”
[우습구나. 필멸자를 상대로 우리가 동시에 덤비란 말이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하. 체면 때문에? 신씩이나 되는 주제에 인간을 다구리치면 쪽팔리니까?”
[그대가 말한 단어의 뜻이 불명확하군. 그것이 우리가 짐작하는대로 소수를 향한 집단 공격이라면 그대의 말이 옳다. 이 싸움에서 우리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확정된 사실. 이것은 대결이 아닌 징벌이다. 징벌이 단숨에 끝나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래? 그렇다면 들어봐.”
3회차에서 내가 택한 전법은 초단기전 승부였다. 총력을 펼치는 적을 상대로 몸을 불사지르는 한이 있어도 제한 시간 내에 목표를 달성하는 전략.
그러기 위해서 아홉 신들에게 끔찍한 모욕과 저열한 도발을 꾸준히 시전했다.
한꺼번에 덤비지 않으면 기원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찔러 자살하겠다는 협박도 했다.
다행히 신들의 인내심에도 한계는 있었다.
[기어코 신들의 분노를 동시에 체감하겠다면 청을 들어주도록 하지.]
아홉 손톱의 동시 개방.
곧 눈앞의 하늘이 새카매졌다.
그렇게 나는 무려 3천에 달하는 천사병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기원검을 뽑았다.
“좋아. 해보자. 이번에 성공 못하더라도 내가 도달해야 할 꼭대기는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어이없게도 전투는 2분을 넘지 못했다.
여덟 번째 신인 적막함의 천사병이 평원에서 소리를 지워버렸고, 아홉 번째 신인 땅거미의 천사병이 어둠을 내려 시각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4번째로 침대에서 일어나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도발을 너무 세게 해버렸나. 계산할 틈도 안 주고 진짜 총력전을 걸어올 줄이야.”
물론 소득이 없진 않았다. 아홉 신의 이름과 그 천사병들의 특기를 전부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튀어나오는 순서도 이미 외웠으니 이전보다 훨씬 눈이 밝아진 셈이다.
어두운 맵을 보며 막막하게 걸을 필요가 없다.
전체 지도가 주어졌으니 걸어가는 법만 정하면 된다.
“끄응. 문제는 적의 수가 너무 많다는 건데.”
천사병 하나 하나의 무력은 지금의 내게 있어 대단할 것은 없었다. 단순 비교해보자면 4층 만철도시에서 만났던 등반죄수들과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때보다 월등히 강해졌고 경험도 풍부한데다 최강의 무기인 기원검 네메시스까지 있다.
‘천사들의 숫자가 오백 정도였다면 가까스로 내 쪽이 살아남게 되겠지.’
하지만 적의 숫자가 내 전력보다 대여섯 배 많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한정된 장작으로 얼마나 오래 불길을 피워올릴 수 있느냐의 싸움이었다.
정석이 곤란하다면 말도 안 되는 변칙을 써볼까.
회차의 후반으로 넘어가면 파격적인 시도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8회차나 9회차 때는 반드시 먹힌다고 확신할 만한 전략을 짜내서 최종시험 단계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미친 짓을 해보자.”
아홉 신들과의 4번째 대결.
[르팔타커스 시온이여. 우리가…… 응? 어딜 가는 것인가?]
나는 신들의 음성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토목공사 수준의 스킬이 된 땅굴파기 스킬로 미리 만들어둔 땅굴로 뛰어내려갔다.
아홉 개의 손가락이 강림하니까 어쩌면 지하엔 그 손바닥이 있겠지.
‘핵을 부숴버려 천사들이 못 튀어나오도록 만든다면 어떨까.’
아홉 손가락이 교차하는 지하 수백 미터 지점에 별의 핵과도 같은 광원이 실제로 존재했다.
나는 환희에 찬 채 기원검을 찔러넣었다.
“전부 뒈져버려랏!”
물론 정정당당한 대결은 아니다.
상대 선수들이 탑승한 버스를 경기장 밖에서 불태워버리는 작전이니까.
콰아아아아아앙!
그리하여 생긴 거대한 폭발.
나는 이 방법이 맞았던 것인가 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으하하하! ……왜 또 침대 위지? 시발.”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읽지 못한 메시지가 야전 막사의 천막 아래를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추체험의 달성에 실패했습니다.]
[달성 전에 세계가 폭주하여 추체험의 무대가 소멸되었습니다.]
아홉 신 강림의 강제 중단이 어떤 과부하를 일으킨 듯 보였다.
“젠장. 이 정도로 심한 깽판을 부리면 안 된다는 뜻인가.”
아마 르팔타커스 시온이 내가 방금 저질렀던 짓을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면 신들은 죽지 않고 대륙의 인간들만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기원검이 시험 통과를 인정하지 않는 거겠지.
5회차의 전장.
나는 한술 더 떠서 이번엔 아예 자쿰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다섯 번째로 써먹어볼 전략엔 기원검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르팔타커스 시온이여. ……왜 빈손으로 나왔는가. 설마 항복을 하기로 마음먹은 건가.]
세계 붕괴로 실패해 보기 전엔 항복도 선택지에 있었다. 하지만 4회차의 결과로 미뤄봤을 때 기원검이 항복을 받아들일 리 없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준비해온 대사를 읊었다.
“먼저 한 가지 알려주려고. 너희가 강림한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야.”
[……무슨 소리지?]
“너희는 신도 아니지. 여기는 기원검의 권능이 만들어낸 일종의 가상세계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내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아홉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너희는 전부 종잇장 같은 가짜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