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기원검의 주인 (4)
깡깡깡.
망치가 모루 위에서 날붙이를 두들기는 소리가 천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태초에 가장 뒤틀린 신이 있었다.]
이게 뭐지?
목소리도 글자도 아닌 형태로 직접적인 정보가 내 뇌에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만인에게 사랑받기는커녕 단 한 명의 소년에게도 숭배받지 못했던 신이 있었다.]
위협적인 느낌은 아니었기에 잠자코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서 뒤틀린 신은 의지를 가진 생물의 욕망에 반응했다.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되,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룩해주었다. 그것이 신이 아니라 악마의 행사에 더 가까웠다는 점은 나중에 고찰된 일이다.]
나는 기원검 네메시스의 주인이 되기 위해 시험에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흘러들어오는 정보는 검의 이름에 응답한 일종의 답변이겠지. 녹음된 무언가가 재생되는 느낌에 가까웠다. 마치 어떤 물건의 사용설명서를 처음 접하는 기분이었다.
[이 검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칠 것이다. 그들의 소원이 세계에 파란을 불러올 것이나 개체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할 테니까. 뒤틀린 신은 확신했다. 모든 신이 종말 해 그들의 존재가 잊히는 시대가 오더라도 생명의 욕망은 종말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깡. 깡. 깡.
망치 소리의 간격이 잦아들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뒤틀린 기원을 담아 망치질을 했다. 언젠가 최후의 주인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면서.]
*
망치소리가 단정한 노크 소리로 어느새 변했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 난생처음 보는 사내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역사 속의 유명한 장수들을 데리고 와도 이 사내만큼 박력 넘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강해 보였다.
“누구시죠?”
“제가 대장군이 되었는데도 그리 놀리시는군요. 폐하께서 시종을 원치 않으셨기에 제가 직접 온 것입니다만 이리 잠이 덜 깬 모습을 보이시면 곤란합니다.”
예상대로 나는 기원검의 이전 주인이었던 르팔타커스 시온,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눈앞의 대장군은 분명히 나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던 내 몸을 만져보았다. 익숙했던 체격과 금발 머리카락.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의 육체 그대로다.
‘그런데도 이질감을 느끼진 못하나 보군.’
당장 신변에 위협적인 일이 생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머리맡에 놓인 의복과 갑옷을 챙겨 입고선 대장군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왔다.
내가 있던 곳은 거대한 평야에 설치된 야전 막사였다.
“이제부터 뭘 하면 되지?”
“설마 제게 물으신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대장군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 생전의 르팔타커스는 이런 식으로 부하에게 얼빠진 질문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등장인물과 대화도 나눌 수 있다. 그러니 이건 기록된 영상을 일방적으로 관람하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마도 ‘특정 목적’을 위해 차려진 무대에 가깝다는 게 내 추측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해선 주인공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다.
“폐하께서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평소와 꽤 다르시군요.”
평생 나를 모셔온 듯한 이 대장군이라면 내가 ‘진짜’ 르팔타커스 시온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충실하게 내 질문에 대답했다.
“폐하께서 두 번 다시없을 싸움을 대비하시는 특유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싸움?”
“네. 아홉 신이 강림을 예고한 날이 오늘이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수년에 걸쳐 그들에게 도전 의사를 보내었고 올해 봄에 응답을 받으셨지요.”
“내가, 아니 짐이 어떤 방식으로 신들에게 도전했지?”
대장군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수하의 정신 상태를 점검하는 황제의 모습으로 보이는 듯했다.
“대륙 전체에 있는 그들의 대신전을 모두 박살 내고 불태워버리셨죠. 그쯤 되자 신들 또한 폐하를 좌시할 수 없다고 여겨 도전을 받아주기로 한 겁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만 하나도 아니고 아홉이나 되는 신들을 때려잡겠다고 봉기한 인간이라니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내가 맡은 역할이 그 정신 나간 황제라니.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었지만 대장군이 너무 놀랄까 싶어서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군사의 진영은 급조한 듯 보였지만 인파의 숫자는 까마득할 지경이었다. 얼핏 보아도 만 명이 넘어 보인다.
“저 자들은 짐을 따라나선 것인가? 짐이 그렇게 명령했나.”
“폐하께서는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두 자발적으로 전장에 따라나온 신민들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곳곳에 군기가 바짝 잡힌 병사들이 많이 보였으나 전체에 비하면 오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숫자였으니까.
상인, 광대, 요리사, 무희 등으로 보이는 자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의 표정 또한 필사의 전투에 임하는 그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대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요. 저들이 준비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축제입니다. 폐하께서 싸움에 이기고 돌아올 때를 가장 먼저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선가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막사 쪽에서 들려오는 걸 보니 대장군이 말하는 축제 운운은 사실인 듯 했다.
“설마…… 그 아홉 신과 싸우는 게 짐 혼자인가?”
대장군은 뭐 그리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신들에게 왜 도전했는지 그 이유를 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다.
일국의 황제가 신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왜 혼자 싸움에 뛰어드냐고.
“신들의 유희에 피 흘리는 인간을 한 명도 만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시온 제국의 신민들은 대부분 노예나 패잔병, 핍박받던 왕국의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대장군의 말은 옳았다.
시야에 닿는 자들은 얼핏 봐도 인종 전시장이라고 해도 될 만큼 피부색, 눈동자, 체형 모든 면에서 다채로웠다.
누구든 가리지 않고 제국민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전에 르팔타커스가 내게 노예 검투사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늙은 검투사를 죽인 후 그가 다짐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 이름 모를 전사의 핏값을 묻겠다는 생각이었다. 짐을 지켜보던 그 숱한 관중들, 그 관중들의 위에 있는 국가의 제후들, 더 나아가 피조물의 아귀다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신들마저도 그 핏값의 대금 장부에서 자유로울 수 없도록 만들겠다 다짐했노라.]
그야말로 한 가지 신념으로 똘똘 뭉쳐 전진해온 자의 삶이라는 뜻이었다.
지구에서의 삶을 기억해 보려 했다.
내게 종교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신의 음성이 직접 들리고, 신력이 발휘하는 기적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왜 이 모양이냐고 골방에서 신을 원망하는 대신,
계급장 걸고 한판 붙자며 덤비는 인간이 튀어나올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의 전투력은 이웃 국가에 비해 어떤 수준이지?”
“대륙 통일을 이룩할 정도로 강력하지요.”
“짐이 없다는 전제하에.”
“……그렇다면 제국의 수명은 일주일이 되겠군요.”
“왜 하필 일주일이야?”
“보통 한 국가가 선전 포고를 하고 항복선언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이 일주일이니까요.”
사실상 르팔타커스 개인의 무력으로 이 거대한 국가가 지탱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면 군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잘 단련된 집단의 전투력이 뛰어난 개인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보적인 개인이 모든 군대를 혼자서 다 때려잡는다면? 군대가 있을 필연성이 약화된다.
혼자서 제국의 국방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게 지금의 르팔타커스 시온이었다.
“그런데 당신, 아니 자네는 꽤 강해 보이는데?”
제국의 군대가 전부 오합지졸은 아닌 듯 보였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으로 대장군의 얼굴에 홍조가 들었다.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에 폐하의 행진을 막아섰다가 두들겨 맞았으니까요. 저는 그때만 해도 어렸고 기운이 넘치던 때였습니다. 황제의 소문에는 과장된 구석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그를 때려눕히면 내가 대장이 되겠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였습니다.”
낭만적이기도, 어리석기도 한 급습. 그런데 르팔타커스는 왜 그런 자를 살려뒀을까?
“제 맷집에 감탄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도전해오는 녀석들을 매번 상대해 주긴 귀찮으니 저더러 근위병을 맡으라 하셨지요.”
뭐 그렇게 대충대충이 다 있어. 황제의 근위병을 누가 그렇게 막 뽑냐고.
대장군의 말을 듣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르팔타커스 시온이 세운 제국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착실하게 군대를 키우고 영토를 넓혀, 인재를 영입한 후 성장한 제국이 아니다. 하다못해 전략 게임에서 작은 나라를 경영하는 일만 하더라도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시온 제국은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기적을 일궈낸 르팔타커스가 죽어버린다면 와르르 무너질 모래성이란 소리.
‘어쩌면 지금 이 세계의 시온 제국은 흔적조차 찾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르팔타커스는 오늘 있을 아홉 신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푸르가토리움에게 유죄 판결을 받아 감옥에 잡혀 들어오게 된다.
유일무이한 황제가 실종되어버린 사건이었을 거다.
“짐에게 자식은 없나?”
대장군은 이제 내 질문 세례에 익숙해진 듯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기억하던 것만 해도 폐하께 덤벼드는 여인들은 셀 수 없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황후가 되고 싶어 하는 여인의 이름을 적는 장부가 있었고 그 장부를 따로 관리하는 직책도 있을 정도로.”
“그런데 어째서?”
설마 르팔타커스 시온은 씨 없는 수박이었던 건가?
“그 어떤 여인도 폐하와 동침을 버텨내지 못했습니다. 팔다리가 부러지는 정도는 다행이었지요.”
……한쪽의 육체가 너무 강해서 거사를 치르지 못할 정도라니.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딜 가고 있는 거지?”
대장군이 나를 안내하는 것은 황제의 침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외곽이었다.
“폐하의 검을 놔둔 곳으로 가는 겁니다.”
놀랍게도 거기에 있는 것은 집채만 한 사자였다.
아니, 저걸 사자라고 불러도 될까? 여우화를 마친 캉이보다 덩치가 더 큰데?
“쟤는 또 뭐야?”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반려수 자쿰입니다.”
자쿰은 웬만한 인간은 가뿐하게 눌러 죽일 수 있는 거대한 앞발로 뭔가를 덮고 있었다.
나는 그걸 알아보았다.
기원검 네메시스.
“폐하께서는 기원검을 얻으신 이래 빈번해진 암살 시도를 귀찮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무실 때는 저렇게 검을 자쿰에게 맡겨두시지요.”
대장군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내게 눈짓했다.
“자. 검을 가져오십시오.”
그제야 나는 대장군이 도통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황제를 왜 가만 놔두었는지 이해했다.
내가 만약 황제인 척하는 가짜라면 저 사자로부터 기원검을 가져올 수 없을 테니까.
감옥의 대기실에서 르팔타커스 시온의 영령과 처음 마주하고, 그와 계약했을 때 내 손에 새겨진 문신.
거기엔 용의 목을 눌러 죽이는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 사자의 이름을 나는 오늘 알게 되었다.
“크허어엉.”
거대한 사자 자쿰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