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기원검의 주인 (3)
의미심장이란 말이 있다.
지금 막 교도관장의 입을 통해 내가 들은 말이 딱 그랬다.
그런데 의미심장하다는 표현은 결국 속 시원히 진실을 들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쓰이곤 한다.
“좀 더 속시원히 말해줄 순 없는 거야? 이제 8층이잖아.”
“당신이 저지른 죄를 아직 기억해내지 못하셨잖습니까. 말했듯 남아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을걸요. 제가 왜 당신을 ‘우주 최악의 죄수’라고 부르는지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이제 더 이상 퀘스트 같은 건 주지 않는다면서? 바빠 죽겠는데 네가 낸 수수께끼도 풀어야 한다면 이쪽도 짜증이 나지 않겠냐고.”
“후후후후.”
곰인형 속의 교도관장은 냉소했다.
“맞아요. 당신 말대로 이것은 수수께끼입니다. 답을 알아내기 전에는 막막하고 아리송하나, 정작 답을 알게 된 시점에선 왜 그걸 맞추지 못했나 당황스러워지는 종류의 수수께끼지요. 하지만 오래전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제기랄.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난 기억이 없다고.”
“그 기억을 찾아내십시오. 그 순간이 오면 솔직히 전 많이 즐거울 것 같군요.”
곰인형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교도관장이 이 층간 구역에 머무르는 시간이 이제 끝나가는 듯했다.
“그때가 오면 우리 둘 중 하나는 상대에게 사과하게 될 겁니다.”
내가 더 이상 따져 묻기 전에 곰인형은 본래 우리에게 익숙했던 사이즈로 돌아왔다. 내가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내리쳤던 그때의 그 모습으로.
“가 버렸군, 쳇.”
한 발짝 물러선 채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아스티나가 다가왔다.
“그 수왕이라는 게 탄생하면 뭔가 달라지는 걸까? 교도관들이 왜 거기에 관심 갖는지 짐작되는 게 있어?”
“그 호칭을 최초로 받아낸 자가 떠오르는 거겠지. 르팔타커스는 유일무이하게 9층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등반죄수였잖아. 두 번째 수왕은 첫 번째 수왕이 끝내 성공 못 한 탈옥을 성공시킬지 궁금한 거겠지.”
내가 저층에서 허우적댈 때만 해도 교도관들은 진지하게 이런 상황을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겐 힘이 없었고,
믿음직한 동료도, 풍부한 경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꾸준히 레벨업하고 친구들을 모아오면서 여기까지 왔다.
치열하게 쌓아온 스탯이 그걸 증명해준다.
[HP: 13,899]
[MP: 14,199]
[근력: 1,485]
[민첩: 1,249]
“이젠 아무도 날 무시할 수 없을걸. 감옥의 제어기능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힘을 잃어버렸던 때보다 지금의 내가 더 강해.”
내 말에 제르비어스가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추리했다.
“너는 이 감옥의 대기실에서 본래의 능력치를 빼앗겼다고 얘기했지?”
“응.”
“그 주동자로 강력하게 의심되는 건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교도관장이고.”
“맞아.”
“그렇다면 그가 왜 그랬는지 짐작해보는 건 쓸데없는 일은 아닐 거다. 나는 아마도 교도관장이 너를 지키기 위해서 내린 선택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거든.”
“나를 지켜? 저 녀석이? 그 반대가 아니고?”
아랫배에서부터 뜨거운 분노가 미터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만큼 제르비어스의 말은 그냥 흘려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능력치가 깎이지 않았다면 직선거리로 마그마볼을 주파했을 거다. 화룡도의 여러 방장들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됐을 거고, 너도 묵사발이 났을걸?”
발끈할 줄 알았는데 묵사발이란 단어에도 마왕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 넌 거침없는 기세로 우리가 만났던 층장들을 때려눕히면서 등반했겠지.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그렇게 되면 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견제를 받았을 거야.”
“견제?”
“교도관들의 견제. 나는 골제의 배후에 있었던 6층 교도관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그 녀석과 비교해보면 화룡도의 교도관인 꼬리에 불꽃을 담그는 삵은 착해 보일 정도였어.”
“불꽃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겠지.”
“……어쨌든, 네 힘이 온전했다면 층을 배정받는 그 순간부터 모든 교도관들이 네 힘에 지레 긴장해서 싹을 밟아놓으려 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삼월초원의 교도관도 네가 시련을 망치니까 다른 시간선에서 아스티나를 소환하는 대형사고를 쳤어. 어쩌면 그런 일이 매 층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지.”
이 폭렬마왕은 진지해질 때면 의외로 날카롭다. 그리고 이 진지모드에 들어선 녀석의 조언은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교도관 녀석이 그걸 예상했기 때문에 내 힘을 깎았다? 마치 굶주린 짐승들 앞에서 맛없는 음식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는 거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제르비어스의 추론은 두 가지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는데 둘 모두 썩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다.
첫 번째는 교도관장이 내 탈옥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세심하게 성장시키고 양육해왔다는 것.
두 번째는 이제 그런 위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8층의 교도관이 나를 충분히 위협요소로 경계하고 있을 거란 뜻이었다.
어느 쪽이든 순탄하지 않은 여정을 예고하고 있다.
그때, 캉이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토니아가 맨홀을 가리켰다.
“슈바인, 저 밑에서 강고한 존재가 너를 부르고 있어. 교도관장이 사라진 후로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그랬다.
르팔타커스 시온의 영령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이번에도 혼자 갈 거냐, 용사야?”
“그래야지. 이전보다는 조금 더 오래 걸릴지도 몰라.”
*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르팔타커스 시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도통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숨 막히는 존재감이 발현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꽁무니를 빼고 싶어질 만큼.
“짐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후인이여.”
“네?”
“그대의 수준이 높아졌기에 짐이 갈무리하고 있는 힘의 진짜 크기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거지. 그러니 이전과 달리 짐이 거북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솔직히 그대의 성취에 짐은 기쁘다.”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리송했다.
“짐을 다시 만나러 왔다는 것은 짐의 우려를 덜어내고 6층장을 꺾었다는 이야기겠군.”
“네. 솔직히 말해서 고생 좀 했죠.”
상대의 모든 공격을 절대방어로 무력화시키는 골제를 제압하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꼼수를 동원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실패할 뻔했다.
파천황은 온몸이 꿈틀대는 근육으로 이뤄졌음에도 의외의 말을 했다.
“겸손할 필요 없다. 태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괴력만이 전사의 미덕은 아니니까. 기만과 속임수, 전략과 전술 또한 그만큼 값어치가 있다.”
“그러면 당신도 전략이란 걸 짠 적이 있습니까?”
호기심을 못 이긴 내 질문에 르팔타커스의 영령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생전에는 없다. 전략이란 힘으로 꺾지 못할 상대를 마주했을 때 고려하는 것. 짐은 용력으로 부수지 못할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군요.”
잠시나마 이 전설적인 죄수 앞에서 위안을 얻어보려 했던 내가 멍청했다.
르팔타커스는 곧 엄숙한 표정이 되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짐에게 네메시스를 보여다오.”
그의 말에 따라 인벤토리에서 기원검의 칼자루를 꺼내었다.
4층의 교도관 그룬덴 사니릭투스로부터 처음 칼자루를 얻었을 때 이후로 두 개의 파편을 더 모았다.
그래서 지금의 기원검 네메시스는 제법 무기로 휘두를 수 있을 만큼의 검신을 회복한 상태였다.
“이만하면 충분하겠군. 해볼 만하겠어.”
“이전에 말했던 기원검의 시험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파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어째서 짐이 짐의 애병을 무참하게 깨트려서 여러 층에 흩뿌려 놓았는지 아는가?”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으셨겠죠. 하지만 정확히 짐작 가는 바는 없네요.”
“짐에게는 앞날을 내다보는 재능 같은 것은 없었다. 후일을 안배했을 때 어느 정도의 죄수가 짐의 유지를 물려 받을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 때문에 기원검의 힘을 분산시켜 놓을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대가 온전한 상태의 기원검과 접촉했다면 이 검은 그 즉시 주인의 자격을 시험하려 들었을 터.”
“기원검의 칼자루를 쥘 자격이란 게 그 정도로 까다롭나요?”
“짐은 본래 병장기에 의존하는 편이 아니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거수와 용들을 때려눕힐 때조차 평범한 날붙이로 그 위업을 이룩했었지. 하지만 아홉 신과 대면하고 그들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기 위해선 보통의 무기가 아니라 뛰어난 보구가 필요했다.”
일개 검투장의 노예 검투사에서 대륙의 황제가 되었던 르팔타커스 시온은 그래서 역사 속에 존재하는 무기들 중 가장 뛰어난 무기를 수소문했다.
기원검 네메시스가 그의 손에 들어온 경위였다.
“이 무기는 마검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스러운 축복이 담겨 있는 성검도 아니다. 짐이 칼자루를 쥔 순간 마주쳤던 것은 완전히 다른 시대의 전장이었다. 고대 생물들이 날뛰고 있던 지옥도였지.”
“지옥도요?”
“그래. 짐은 그것들의 목을 전부 베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쓰러트린 것은 환상이었어. 네메시스의 이전 주인이 싸웠던 상대. 아마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적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네메시스라는 무기가 르팔타커스에게 낸 자격시험이었다.
새삼 내 손에 들려 있는 기원검의 무게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제가 이 시험에 도전하게 되면…….”
“그래. 짐작컨대 그대는 짐의 걸어온 길 중에서 가장 고된 순간을 체험하게 되겠지.”
“만약 시험 중에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알 수 없다. 까다롭긴 했으나 짐은 단번에 시험을 통과했으니까. 이 부분에 관해서는 그대에게 조언을 줄 처지가 못 되는군.”
르팔타커스는 조용히 시선으로 묻고 있었다.
겁이 나면 돌아가도 된다고.
기원검의 시험에 응하지 않으면 위험한 처지에 스스로를 몰고 갈 필요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본능적으로 나는 이 순간을 피해선 안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8층의 죄수 중 세 명을 마주쳤다.
절반으로 깎인 힘으로도 삼월초원 전체를 죽음으로 몰고 갈 만큼 공포스러웠던 천마 설공.
움직이는 벼락 그 자체였던 뇌신 지드.
시간을 멈춘 채 혼자서 움직일 수 있었던 톱니바퀴의 여신 벨리오나.
한 명 한 명이 상식을 초월하는 권능과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층장이 아니었어.’
쉽게 말해서 8층에 군림하고 있는 층장은 그런 죄수들보다 더 우위에 있을 만큼 대단한 녀석이라는 소리였다.
“당신도 아홉 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 검을 쥔 것이잖아요? 그때의 당신처럼 제게도 이런 무기가 필요합니다.”
“좋은 각오다. 그 표정을 그대에게서 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되죠?”
“그 검의 칼자루를 쥔 채 무기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된다.”
나는 파천황의 말에 따랐다.
심호흡을 한 채 기원검의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는 선언했다.
“네메시스, 너의 주인이 되고 싶다.”
그러자 검신이 맥동하듯 빛나면서 주변을 물들어갔다.
“한 가지만 명심하도록.”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나를 쳐다보고 있던 르팔타커스가 말했다.
“짐은 그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대 역시 짐이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에 파천황은 이미 내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시대에 홀로 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