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기원검의 주인 (2)
“호이란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데?”
“여기 남아서 엄마 옆을 지키면 안 되냐고 물었거든.”
캉이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 토니아가 뜨악한 얼굴로 구미호 소년을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캉이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러다가 엄청 혼났어. 제대로 된 이름을 받았다는 건 가족으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둥지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뜻이라고.”
“……그, 그래.”
“아주 따끔하게 얘기를 들었는데 무서우면서도 기분이 좋았어. 혼이 나면서도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거든.”
구미호에게는 구미호만의 양육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호이란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임부의 몸으로 흉악한 감옥에 잡혀 들어왔다. 그리고 하필 용왕이 폭정을 일삼는 층에 떨어져 곤욕의 날들을 보냈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장성해서 돌아올 아들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된 자식보다, 눈물을 머금고 자식을 아래층으로 내려보낸 엄마야말로 더 이상 떨어지기 싫었을 텐데.
“나도 호이란에게 말을 전할 수 있을까?”
“나한테 해. 그러면 엄마도 들을 수 있대.”
“고맙습니다.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할 시간이 없었군요. 덕분에 아무도 잃지 않고 다음 층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됐습니다.”
잠시 후 캉이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호이란의 인사를 대신 전달해 줬다.
“엄마가 그러는데 형아는 편도행 모험을 떠나는 사람이래.”
편도행 용사라.
맞는 말이었다. 나는 여행자가 아니다. 여행이라는 단어에는 먼 길을 떠나 언젠가 돌아올 것이란 뜻이 숨어있지만 내 경우엔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이 감옥을 벗어날 것이다.
내가 올라온 층을 다시 밟을 일이 없다. 내 등반을 도와준 소중한 죄수들과 회포를 풀며 술잔을 부딪힐 수도, 그동안의 묵힌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없다.
그런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잃지 않은 건 아니었구나.’
문득 이멜타스의 얼굴이 떠오르며 쓸쓸해졌다.
“그렇게 편도행을 떠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대. 그러니 오직 앞만 생각하면서 전진하래. 형아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를 잘 부탁한대.”
나는 먼발치에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세계수를 향해 목례했다.
그렇게 호이란과의 작별을 마치자 우리의 눈앞에 그토록 고대하던 푸른 포탈이 열렸다.
[7층의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 등반죄수의 여정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고룡의 가호를 받으며 우리는 포탈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호이란의 당부대로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
벌써 여러 번 보아온 터라 이층집 거실에 발을 내디뎠을 때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라?”
그런데도 모두가 놀란 것은 거실에 앉아 있는 거대한 곰인형 때문이었다.
“많은 일을 겪으셨군요,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아스티나의 품에도 쏙 들어갈 만큼 작았던 곰인형이 이번엔 천장에 닿을 만큼 몸집이 비대해져 있었다. 실물 크기의 북극곰을 바라보는 듯 위압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 곰인형 안에 있을 교도관장을 향해 물었다.
“덩치는 왜 그렇게 커진 거야?”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이 소파 밑에 있는 어떤 공간 때문이지요.”
곰인형이 소파에 앉은 채로 슬쩍 발을 굴렀다.
그러고 보니 본래 카펫 밑에 숨겨져 있던 맨홀이 활짝 열려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구멍과 이어진 사다리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시점이 무척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판단한 듯해요. 그가 내뿜는 존재감이 전례 없는 수준이라 저 역시 단말기를 키울 수밖에 없었어요.”
르팔타커스가 내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유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6층과 7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듣고 싶은 거겠지.
“당신이 지난 층들에서 벌인 일 때문에 제 업무가 무척 까다로워졌습니다. 일종의 전후처리 때문이죠. 이 감옥이 만들어진 이래 각기 다른 층의 집단이 서로 전쟁을 벌인 것도 초유의 사태인데 교도관까지 연루되어 있으니 보통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설마 나한테 책임을 물으려는 건 아니겠지? 세계수가 6층에 뿌리를 내린 것도, 그래서 6층장이 그것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내가 6층에 오르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야.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내 말에 돋친 가시를 읽었는지 곰인형은 한 발짝 물러섰다.
“당신 핑계를 대는 건 아닙니다. 이전처럼 투표가 열릴 상황도 아니고요.”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죄수 바르한 니칸드로스의 야망이 실현되었더라면 이야기가 달랐겠죠. 하지만 당신이 그를 저지했으며 6층 교도관 또한 그 불법인 후원을 거두었습니다. 교도관이 개입하기 직전에 소란이 불식된 거죠. 게다가 거대한 파도가 일었을 때 조개를 줍고 있을 순 없잖아요?”
골제와 용왕이 충돌한 대사건을 고작 조개 줍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나는 교도관장의 화법에 꽤 익숙해진 상태라 이어지는 말에 귀를 귀울여야 할 때라고 느꼈다.
“그 파도라는 게 뭔데?”
“짐작하실지도 모르겠지만 푸르가토리움의 최종층인 9층엔 단 한 명의 죄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있는지 알려드릴 순 없으나 단 한 명의 죄수도 없기에 당연히 층장 또한 없지요.”
베일에 싸인 9층을 제외하면 8층이 죄수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층이라는 뜻이다.
새삼 길고도 길었던 등반 여정이 절정을 향해 내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슈바인 스트링거. 이 감옥은 르팔타커스 시온을 가리켜 수왕(囚王), 즉 죄수들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자의 사망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호칭이 부활할 일은 없었지요. 왜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감옥의 특이한 구조 때문이겠지. 여덟 개의 층에서 여덟 명의 층장이 언제나 존재하겠지만…… 그들이 있는 공간이 철저히 분리돼 있으니까.”
왕으로 추대되기 위해선 전쟁이 필수적이다.
여러 개의 부족장을 꺾고 국가를 세우기 위해선 다른 일곱 부족의 최강자를 쓰러트리는 단 한 명이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감옥은 층이 분리되어 있다. 각기 다른 맹수가 사는 정글이지만 호랑이와 사자가 만날 일은 없다.
단, 등반죄수의 존재가 있다.
“르팔타커스가 수왕이라 불린 것은 그가 1층에서부터 8층에 이르기까지 맞닥뜨린 모든 층장에게서 열쇠를 넘겨받았기 때문이겠지. 죄수들의 왕이란 그런 의미였을 거다.”
“맞습니다. 모든 등반죄수가 수왕이란 호칭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오직 최하층인 1층에서부터 9층까지 오른 자만이 수왕이란 이름에 걸맞습니다.”
즉, 르팔타커스 시온 이후로 그 업적을 이룬 죄수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착실하게 그의 뒤를 따라온 내가 있다.
“이제 그 어떤 교도관도 당신을 무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1층에서 등반을 시작한 죄수가 8층까지 오른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당신이 8층의 층장마저 쓰러트린다면 푸르가토리움은 두 번째 수왕의 탄생을 맞이하겠지요. 그러니 교도관들에게 있어 공층전이란 커다란 사건도 금세 관심사에서 멀어지게 된 거랍니다.”
“나는 그 수왕이란 것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두 번째로 수왕이 된다 해서 무슨 금관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곰인형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녀석은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높이가 나와 동일했다.
“나는 이 감옥 최초의 탈옥수가 될 거야. 오직 그것만이 내 관심사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뭐, 어쨌든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이게 본론이 아니니까요. 저는 선언을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선언?”
곰인형은 지나가는 말투로 여상하게 말했다.
“이 시점 이후로 저는 당신에게 더 이상의 퀘스트를 내어주는 일이 없을 겁니다.”
“…….”
“……놀라셨나요?”
“왜지?”
“당신이 7층을 기점으로 모든 스탯에서 한계돌파를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인즉슨 대기실에서 능력치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기 전의 당신보다 더욱 완벽한 육체가 되었단 뜻이지요. 여기에서 당신을 더 성장시켰다간 교도관장의 월권이 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가 있다고 말씀드리진 않았는데요.”
“있을 거잖아.”
“더 이상의 퀘스트가 무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택했던 건 당신에게 가장 익숙한 시스템을 흉내 내고 있던 것이죠.”
온갖 게임의 알파 테스터였던 나.
그런 나를 감옥에 끌고 오면서 가장 친숙한 시스템을 골랐다는 뜻이었다.
내가 만약 중세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말 그대로 천사의 계시 같은 걸 흉내 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퀘스트 시스템의 진정한 목적은 플레이어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플레이어가 이탈하지 않고 게임을 완수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위해서지요. 그런데 이제 당신의 의지는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해졌습니다. 당근도, 채찍도 무의미한 수준이 되었으니까요.”
“마지막 이유는?”
“이유가 세 개인 걸 어떻게 아셨죠? 혹시 미래를 읽는 능력이라도 생기셨나요?”
“경험에서 유추한 거야. 너는 숫자 3을 좋아하니까.”
“이제부터는 당신의 선택에 아무런 개입도 하고 싶지 않은 게 제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코치석에 앉아 있었다면 이제부턴 관중석에 앉아 있겠단 뜻이죠. 당신이 8층에서 만날 죄수에게 사망한다 하더라도 저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의 퀘스트는 없다.
퀘스트 안내문을 빙자한 은근한 힌트도 제공되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이 곰인형의 탈을 쓰고 당신 앞에 나타나는 일도 지금이 마지막이 될 거예요.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제 본래 모습을 갖고 나타나겠지요. 그것을 감당할 정도로 당신이 진실에 한층 다가섰으니까요.”
등 뒤에서 누군가가 아쉬워하는 탄식이 들렸다.
아스티나겠지. 예전부터 이 곰인형을 갖고 싶어 했으니까.
“줄곧 궁금한 게 있었는데 네가 이렇게 비장하게 구니 지금 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네.”
“물어보십시오.”
“너는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라고 했지. 거기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전부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어. 그렇다는 건 내가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내 탈옥 여정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전부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잖아.”
내 인벤토리에 있는 마도서 단탈리온은 스스로를 ‘불완전한 전지’라고 말했다. 일어난 일을 알고 있을 뿐, 미래에 대해선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녀석은 완전을 이룩하기 위해 아카식 레코드에 편입되고 싶어 한다.
그 말인즉슨 교도관장은 ‘전지’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이 녀석은 다른 교도관들과도 다르다. 유희를 위해 죄수들의 몸부림을 관람하는 교도관들과는 본질적으로 격차가 있다.
모든 걸 아는 존재가 유희를 논할 수 있을까.
모든 영화의 결말을 아는 사람이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을까.
“맞아요. 저는 당신이 내릴 선택의 모든 가짓수를 알고 있습니다. 편의를 위해 만 개라고 해두지요. 저는 만 가지로 뻗어 나갈 당신의 결괏값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이 너에게 대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전부 너의 예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일 텐데.”
“재미를 위한 게 아니니까요. 의미를 위한 겁니다.”
곰인형의 표정엔 미동이 없었지만 녀석은 왠지 웃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내릴 선택이 제겐 큰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