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기원검의 주인 (1)
워낙 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7층이어서일까.
다음 층으로 건너가는 포탈을 열어젖히기까지 나는 예상치 못한 일과 맞닥뜨려야 했다.
먼저 골제의 지팡이에서 해방된 시간이 모든 군단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나와 골제에게 일어난 일이 수천 명의 해골 병사에게 똑같이 벌어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이건 내 비늘 색깔 같은데?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용왕의 부유도에선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살갗과 비늘, 털을 돌려받게 된 군단은 이제 더 이상 불사의 축복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벌벌 떨며 무기를 떨궜다.
골제는 오랜 시간을 들여 그들로 하여금 임전불사(臨戰不死)의 최면에 취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강제로 깨어졌으니 무서울 만도 했다.
휘이이이이잉.
동시에 세계수를 감싸고 있던 모래 기둥이 허물어졌다.
그것은 6층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의 권능으로 유지되던 것.
골제가 패하고 물러나자 장기말을 버리고 달아나버린 셈이다.
[6층의 교도관은 마지막까지 등반죄수를 노려보았습니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비겁한 놈아.
부여받은 이명의 뜻처럼 6층 교도관은 골제의 마음에 이끼처럼 스며들었다. 자신이 직접 타층에 개입하면 징계를 받게 되니 층장을 장기말로 이용한 거겠지.
자신 혼자서만 안전한 곳에서 유희를 즐긴 것이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라, 등반죄수여.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는 비슷한 시도를 결코 두 번 다시 할 수 없을 테니.”
세계수의 꼭대기에서 날개를 펼치는 익숙한 존재가 있었다.
7층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었다.
모래 기둥이 사라지자 비로소 내게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힘을 되찾은 모양이다.
“내가 세계수를 억제하느라 권능을 사용했던 것처럼 저자 또한 다른 층에 개입하느라 정도 이상의 권능을 소진했지. 머지않아 스스로 타천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러는 당신은? 권능을 소진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내 걱정을 해주는 것인가. 후후후. 괜찮느니라. 같은 교도관이라 하더라도 나는 용으로 빚어진 몸이니까. 그대를 다음 층으로 보낼 힘은 거뜬히 남아 있다.”
내게 호언장담하듯 말한 거룡은 곧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층 전체에 선포했다.
“전쟁은 이제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 불행한 싸움의 도화선이었던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스스로 죽어갈 것이며, 편법으로 등반한 죄수 바르한 니칸드로스는 패퇴하였다.”
교도관이 경고하는 대상은 자신이 관리하는 죄수들인 용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 용들로부터 복수의 대상이 되어버린 6층의 죄수들을 향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는 곧 완전히 말라서 사멸할 것이다. 그러면 아래층에서 올라온 그대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치가 될 터. 분노한 용들의 만찬 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 본래 머물던 층으로 돌아가라.”
이미 절반 이상 무기를 내려놓은 채 주저앉아 있던 병사들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터덜터덜 일어나서 세계수를 향해 걸어가는 자들이 대다수였으나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군단장을 비롯한 강력한 죄수들은 용왕의 부유도를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그때 비르카의 영체가 레나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봐, 예쁘장한 인형.”
“인형이 아니라 오토마타입니다. 이 둘은 용과 도마뱀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호칭입니다.”
“켈켈켈. 지금 발끈한 것 같은데?”
“그저 호칭을 바로잡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어쨌든 부탁이 하나 있어. 지금부터 내 말을 병사들에게 들리도록 해 줄 수 있겠나? 저 교도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수준으로.”
레나스가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이 오토마타 소녀는 만철도시에서 자신이 관객이라고 인정한 동료들의 부탁만 들어주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해줘, 레나스.”
곧 비르카 리케우톤의 일장 연설이 레나스의 확성장치를 통해 울려 퍼졌다.
“그대들의 사악한 우두머리는 내가 물리쳤도다! 죄를 묻지 않을 테니 냉큼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 이것은 우매한 그대들을 구원한 자의 자비로운 명령이다.”
놀랍게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비르카의 음성은 신령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오오오! 여신님이시다.”
“여신님이 우리를 굽어살피고 계셨어.”
“다들 여신님의 말을 따르자. 그런데 어째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는 거지?”
비르카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야 해골 상태가 아닌 놈들 앞에 서 봐야 다시 쭉정이 취급을 받을 테니까 그렇지, 켈켈.”
“너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 몰랐어.”
“내가 모셨던 대마도사께서는 사령술로 일으킨 병사들에게 높은 지능을 선물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선동과 지배엔 별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아랫것들을 다그치는 건 다 내 몫이었어.”
“……왠지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만.”
어쩌면 골제의 병사였던 자들이 전부 화룡도에 있었다면 비르카는 ‘켈켈교’라는 이름의 종교를 창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도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우리 방장.”
“고마웠어, 비르카. 네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별말씀을. 나 역시 꿈도 못 꿀 높은 층을 마음껏 유람했으니 감사는 내 쪽에서 해야지.”
비르카의 영체가 나를 포옹하듯 감싸 안았다.
물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비르카의 속삭임만큼은 오랜 친구의 다정함을 실감시켜 주었다.
“몸 성히 지내도록 해라. 다치지 말고.”
나를 꼭 껴안아준 상태 그대로 비르카의 영체는 스르륵 사라졌다.
여운에 취해있던 나를 깨운 건 골제의 신음 소리였다.
내 뺨 한 방에 기절했던 마법사가 어느새 깨어나 있었고 제르비어스와 캉이가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일어났나 보네.”
“……꿈이 아니었나.”
“기절이란 것도 진짜 오랜만에 해보는 거 아냐, 당신? 해골의 몸이었을 땐 하고 싶어도 못했을 텐데.”
더 이상 황제의 꿈을 꿀 수 없게 된 마법사 바르한은 내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괴이한 제안을 했을 뿐이다.
“자네에게 물건 교환을 제안하고 싶네만.”
“뭘 교환한다는 거야?”
“내 지팡이를 주겠네. 그 대신 환룡의 세뇌 장치를 내게 넘겨다오.”
“마인드 스포일러를?”
어차피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순간 마인드 스포일러는 무용지물이 된다. 이런 세뇌 장치가 8층의 괴물 같은 죄수들에게 통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골제의 진의를 알기 전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왜지? 이 장치로 용을 굴복시켜보기라도 하려고? 아직도 뭔가 미련을 못 버린 거야?”
“아니다. 나는 환룡을 찾아가 그 장치를…… 나에게 사용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바르한의 형량은 4천 년.
등반이 좌절된 그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의 굴레에서 ‘도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환상이라고 인식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로.
[저 말은 진심입니다, 용사님.]
단탈리온의 확인이 꼭 필요하진 않았다. 표정을 지을 얼굴 근육이 있다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진의를 알 수 있으니까.
“좋아. 가져가. 당신에게 어울리는 종말이 되겠군.”
바르한이 마인드 스포일러를 품은 채 사막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혀를 찼다.
환룡 메르킨은 은둔해 있지만, 곧 내가 해둔 결계 덕분에 위치가 적발될 것이다.
어쩌면 바르한은 메르킨과 만나자마자 사이좋게 용들에게 쫓기는 몸이 될지도 모른다.
전범의 말로는 자살이거나 도피일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니네 뭐 하고 있냐?”
일단 골제의 지팡이를 두고 동료들이 입맛을 다신 일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굉장하다, 용사야. 이제 이 지팡이만 있으면 다음 층에서 강력한 적을 만나 즉사를 당할 위기에 처해도 시간을 되돌려 반격할 수 있는 것 아니냐!”
“…….”
“골제는 근접전에 취약했지만 너는 다르지. 그야말로 무적에 가까운 전사가 되겠어. 이 지팡이만 있다면 르팔타커스도 가지 못했던 최종 층까지 가는 것도 꿈이 아니……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나는 잠자코 제르비어스의 손아귀에서 지팡이를 빼앗았다.
“시간이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말이 있어.”
“…….”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가난했다. 지독하게도. 출세의 방법은 공부뿐이었지만 사고를 당한 이후 부양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동생을 뒷바라지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돈을 악착같이 벌어야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게임 속에서 살았으나,
결코 게임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사실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아.”
재벌가 3세의 한 시간이 가난한 소년 가장의 한 시간과 동일한 무게를 가질 순 없다.
“그러니까 환상이야. 시간이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것은. 기껏해야 잘 만들어진 사탕발림에 불과하지.”
지팡이에 달린 염소 머리를 붙잡았다.
빠가악!
그리고 그 뿔을 단숨에 박살 내 버렸다. 제르비어스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환상이 우리에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마법이니까.
“그런 대단한 무기를 폐기하다니. 후회하지 않겠냐, 용사야?”
“이게 정말 그만큼의 무기일까?”
골제 바르한은 이 지팡이를 얻어 시간을 다룰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르팔타커스에게마저 밀리지 않을 만큼 대단한 강자가 되었지만,
두 번 다시 지팡이를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되었다.
“녀석은 아마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누워있을 때도 절대 놓지 못했을 거야. 단 일 초라도 안심할 수 없었을 테니까. 때문에 더더욱 완벽하게 군단들로 하여금 자신의 둥지를 지키게 만들었겠지.”
혼자의 몸으로 등반을 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마법사가, 부하가 없인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 군주로 몰락해버린 것이다.
“다음 층에 올라갔다가 검을 빼앗기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그래서 고통도 느끼지 않고 잠 잘 필요도 없는 해골의 상태로 자신을 유지시켜놓았던 거라고. 이 지팡이의 가공할 만한 힘이 바르한 니칸드로스를 겁쟁이로 만들어 버린 거지.”
나는 두 동강 난 지팡이를 모래 위에 내던지며 말했다.
“이딴 무기, 난 필요 없어.”
무기 따위에 의지해선 절대 탈옥할 수 없을 거다.
내가 의지할 대상은 오직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녀석들뿐이었으니까.
……이렇게 멋지게 마지막을 장식하려고 했을 때.
“그럼 내가 가져도 돼?”
아스티나가 체통도 없이 모래를 주섬주섬 뒤져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염소의 눈에 박혀 있던 붉은 보석이었다.
“끄응. 그걸 갖겠다고? 불길하지 않아?”
“새삼스럽게. 나도 흑마법사야. 골제는 그 자체로 위대한 마법사는 아니었어. 하지만 ‘시간’을 덧칠할 수 있는 발상이 담긴 이 술식은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네 중력 마법과는 원리가 상극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아스티나는 생긋 웃었다.
“상극이니까 연구에는 더욱 도움이 되겠지. 백묘탑의 마법 서고에도 이런 마법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신선한 자극이 될 거야.”
“그래. 그렇게 해.”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독 캉이만은 잠자코 서 있었다.
제르비어스의 탄식에도, 아스티나의 물욕에도 반응하지 않고 침잠해 있는 건 이전엔 없던 일이었다.
“캉이야. 무슨 일이야?”
그러고 보니,
이 어린 구미호의 시선은 세계수를 향하고 있었다.
“응. 엄마랑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