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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36화 (236/300)

#236. 만료되었습니다 (7)

“고백하지, 골제. 사실 이건 공평한 승부가 아니었어.”

원한다면 골제는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나와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반년?

골제가 악에 받쳐 발악한다면 지금보다 기싸움이 길어졌겠지. 이론상으로는 만년 가까이 나와 투닥거릴 수 있는 탄환이 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상이다. 빼앗은 시간을 덧칠하는 녀석의 마법은 유한하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차오르는 마력 같은 게 아니니까.

7층 천공섬에는 골제가 시간을 빌려올 죄수들이 없다.

용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용들이 존재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어지간해선 자연사하지 않는 종족에게 불사자의 축복은 아무런 유혹이 되지 못한다.

강제로 시간을 빼앗는 방법도 불가능. 상호동의의 전제조건이 골제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녀석의 금광은 언젠가 반드시 바닥난다.

이대로 무용하게 시간을 풀어내기만 하다간 아무 소득도 없이 힘만 약해질 것 같다는 공포.

그 공포가 스멀스멀 상대의 뇌리를 지배하길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당신이 나보다 몇 배의 시간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야.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유리해질 거란 믿음. 승리에 대한 확신. 그것의 유무가 이 싸움의 명운을 가른 거다.”

“……약속은 지키겠다. 네 말대로 세계수에 손대지 않고 다시 6층으로 내려가도록 하지.”

나는 발목까지 잠기는 뼈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골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종전의 악수인가?”

“그런 의미도 있고. 여기서 나가야 하잖아? 나는 접촉한 물건만 인벤토리에 넣고 뺄 수 있거든.”

골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을 내밀어 나와 마주 잡았다.

녀석에게 불사자의 축복을 받고 동맹을 맺은 순간과 동일한 구도.

하지만 상황과 장소는 정반대.

“이 지긋지긋한 인벤토리 속과도 작별이군. 아이템 소환!”

바로 다음 순간 질식할 것 같은 백색의 공간은 사라지고, 골제의 신전이 다시 우리 둘을 둘러쌌다.

*

“용사야, 뭘 수납한다는 거냐?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야.”

모래 기둥이 사라져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제르비어스가 멀뚱히 나를 보며 한 말이었다.

“형아, 잘된 거 맞아?”

캉이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인벤토리 속에선 시간이 정지된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가 골제와 사투를 벌인 63일의 시간은 바깥의 입장에선 찰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다들 정말 보고 싶었어.”

“……왜 몇 달간 떨어져 있었던 사람처럼 굴어, 슈바인?”

“실제로 그랬으니까, 아스티나. 나는 너희를 두 달 만에 만나는 거거든.”

사정을 설명하자 중력 마법사는 곧바로 상황을 깨달았다. 그리고 인벤토리를 전투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경탄했다.

“대단해. 네가 아공간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일종의 이율배반이거든. 사람이 자신의 위장에 들어갈 수 없듯이. 그렇다는 건 이 우주의 인과율로부터 자유로운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건데…….”

“잠깐잠깐. 너무 멀리 가지 마.”

그대로 놔두면 아스티나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 것 같았기에 나는 얌전히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그러자 아스티나는 여전히 나와 악수 중인 골제의 존재를 깨닫고 다시 적의를 드러냈다.

“골제 바르한 니칸드로스. 슈바인의 말이 맞아?”

“그렇다. 나는 그와 약속했다. 편법으로 등반하는 내 숙원을 포기하고 세계수도 건드리지 않기로.”

“진심이겠지?”

골제의 손이 내 손아귀로부터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의 붉은 망토가 다시 불길하게 넘실거리는 건 그 직후 일어난 일이었다.

“아니. 물론 거짓이었다.”

나는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뭐? 다시 한 번 말해볼래?”

“어리석구나, 슈바인 스트링거. 대체 뭘 믿고 내 항복 선언이 기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단 말이냐. 담보를 걸지 않은 종전 선언은 백지장이나 다름없다. 발카드!”

골제의 어조가 점점 커지더니 마지막엔 호통이나 다름없는 데시벨이 되었다.

꽈르르르르릉!

신전 천장에서 스켈레탈 드래곤인 발카드가 내려섰다.

불사자의 축복을 받은 지금 폭룡 발카드는 명실상부 골제가 꺼낼 수 있는 최강의 카드일 터.

“크하하하! 내 탈옥에 대한 집념을 얕본 것이 자네의 실수다! 그런 조잡한 꼼수로 날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느냐?”

해골용의 두개골 위에 올라탄 골제가 나를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웃었다.

“자네는 나와 동맹을 맺었을 때처럼 교도관의 공증을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겠지. 그 아공간 속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

나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이마를 긁었다.

“그야 그럴 수 없었지. 왜냐하면…… 그런 공증을 받았다간 내 거짓말도 들통나버릴 테니까. 헤헷.”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챈 골제가 멍하니 나를 내려다봤다.

“자네도…… 거짓말을 했다고?”

역시 나는 이런 순간이 제일 짜릿하다.

상대가 완벽하게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준비해온 마지막 카드를 테이블 위에 집어던질 때의 쾌감 말이다.

“골제, 당신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게 뭔지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뭣?”

골제는 황급히 자신의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지팡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때? 아주 귀엽지 않아?”

본래 골제의 지팡이 머리엔 염소의 해골이 달려 있어 위압스러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흑마법사의 상징이었던 염소 해골은 온데간데없이 지금은 앙증맞은 토끼 인형의 머리만이 대롱대롱 달려 있을 뿐이었다.

“대체 내 지팡이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애초에 내 작전의 1순위는 당신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 게 아니었어. 환룡 메르킨의 마인드 스포일러라는 장치를 당신의 신체에 접촉시키는 것이었지.”

“마인드 스포일러?”

나는 친절하게 환룡에게서 넘겨받은 마인드 스포일러를 들어 보였다.

“물론 까다로운 작업이었지. 당신은 극도로 경계심이 높은 마법사였으니까. 마법사의 생명줄과도 같은 지팡이를 절대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했거든.”

그래서 그가 경계심을 푸는 유일한 순간을 노려야만 했다.

나와 인벤토리 바깥으로 다시 역소환되는 그때, 마인드 스포일러와 골제를 함께 끄집어내는 방법으로 이 세뇌 도구를 접촉시킨 것이다.

“언제부터 세뇌를 당한 거지?”

“당신이 발카드를 부른 그 순간부터.”

따악!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골제를 태우고 있던 발카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말도 안 돼.”

허망해하는 골제를 보며 아스티나가 속삭였다.

“이젠 정말로 끝난 거지?”

“응. 내가 이겼어. 골제가 항복 선언을 진심으로 하지 않을 거란 건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어. 진짜 지팡이는 여기에 있거든.”

나는 발아래의 뼈 무덤을 헤집어서 골제의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진품에 접촉하자 예상했던 대로 메시지가 떴다.

[주인이 있는 아이템입니다. 정당한 소유권이 없기에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

주인이 생존하는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이런 복잡한 작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골제의 시야에서 지팡이를 숨겨야 한다는 과제가 가장 까다로웠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지.

그래서 나는 모래 벌레의 위장에 직접 뛰어들어가 이렇게나 많은 죄수들의 유골을 모아왔다. 뼈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감쪽같이 숨기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63일. 그 정도면 모든 걸 수상하게 여기는 당신의 의식으로부터 이 뼈 무덤이 아무 의미 없는 배경으로 각인되는데 충분했지. 뭐, 당신이 기어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마인드 스포일러까진 쓰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네놈이, 감히!”

“그 세뇌 도구에 죽을 뻔했던 선배의 입장으로서 한 가지 알려줄까? 당신은 아마 계속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거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이 진짜일까? 어쩌면 아직도 마인드 스포일러가 보여주는 가짜 세계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질문.”

그야말로 생지옥의 시작이다.

나 역시 그 트라우마에서부터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지팡이를 내놔라!”

골제는 발악하듯 외쳤다.

어지간해선 언성을 높이지 않는 자가 저렇게 다급한 걸 보니 내가 완전히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이 실감 났다.

“미쳤다고 이 생고생을 해서 빼앗은 걸 돌려주겠어?”

나는 아스티나에게 지팡이를 넘겼다.

“해체시킬 수 있겠어?”

“나는 해당 술자가 아니니까 사용은 불가능하지만 망가뜨리는 건 간단하지.”

“안 돼에!”

골제가 황급히 나를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그 앞을 막아선 건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는 폭렬마왕의 눈빛이었다.

“이제부터 관절 하나 움직이는 것도 내 허락을 받아야 할 거다.”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골제의 지팡이에 가져다 댔다.

빛을 뿜는 월장석이 염소의 해골에 닿는 순간,

스파아아앗!

서로 다른 마력 회로끼리 충돌하면서 골제의 지팡이가 부르르 진동했다.

“제대로 된 거 맞아, 아스티나? 별다른 효과는 딱히 없는…… 어라?”

내 손바닥에 혈관과 피부가 다시 새살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얼굴을 만졌을 때 촉촉한 살갗이 느껴지고, 호흡에 따라 숨결을 내뱉을 수 있다.

이 당연한 걸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다.

골제가 내게 건 불사자의 축복이 강제로 무효화되면서 지팡이에 응집된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돌아왔구나, 슈바인.”

“형아! 다시 사람이 됐어!”

모두가 인간으로 돌아온 내 귀환에 기뻐했으나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에잉, 쯧쯔. 다시 못생긴 얼굴로 돌아와 버렸네. 나는 마음에 안 든다.”

“나는 더더욱 다행이란 느낌만 있는데?”

나는 혀를 차는 비르카에게 대충 맞장구쳐준 다음 골제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나와 정반대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안 돼! 나는 위대한 리치란 말이다!”

골제의 지팡이에 저장된 시간은 타인의 것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소유자인 바르한 니칸드로스의 그것도 당연히 품고 있었다.

그것이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왔다.

제법 키가 큰 갈색 머리의 사내가 붉은 망토를 거적때기처럼 걸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제발! 돌아와! 해골이 아니면 난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축복이란 미명 아래 자신에게 허락돼 있지 않은 시간들을 탐해 왔던 ‘시간 털이범’이 모든 것을 잃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게 당신의 진짜 모습이구나. 진짜 다행이야. 청순한 미소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뭐?”

“그렇게 풍채가 좋아야…….”

사뿐하게 힘을 담아 녀석의 뺨을 때렸다.

짜아아아악!

목이 부러질 정도의 충격으로 날아간 골제가 모래더미에 파묻혔다.

“마음 놓고 전력으로 때릴 수 있으니까.”

자고로 빌려온 것에는 대출기한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시간도 거기에서 예외는 없다.

“바르한 니칸드로스, 대출 기간 만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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