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만료되었습니다 (5)
‘나는 골제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슈바인.’
비르카와 작별하기 직전 녀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왜? 스스로 제왕이라는 거창한 호칭을 붙여서?’
‘아니다, 켈켈. 그것보다 ‘골’자를 앞에 붙인 것이 기만적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본래 인간이었던 존재가 사자교령술을 받아 만들어진 합성생물이지만 내 몸이 뼈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에 단 한 번도 아쉬웠던 적이 없다. 늘 자부심을 갖고 있었어.’
그러고보니 비르카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툭하면 접합이 깨져버리는 불편한 몸을 갖고 있었어도 말이다.
오히려 7번 방의 다른 죄수들에게 ‘너희들이 스켈레톤이었다면 내 진가를 알아볼 텐데’ 하면서 반대로 우릴 한심하게 생각했다.
비르카 리케우톤에게 있어 자신이 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결핍이나 장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멋진 녀석.
‘그런데 골제의 병사들은 나완 다르다. 피부와 근육을 갖고 있었던 때를 기억하며 그리워하겠지. 목숨을 지켜준다는 미명 하에 불사자의 축복을 받았지만 전쟁의 장기말로 이용당했을 뿐이야.’
‘하지만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게 죽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그건 6층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일걸. 생각해봐라, 슈바인. 저들 군단은 용왕을 쓰러트리고 세계수에게 양분을 빼앗길 필요도 없는 7층 천공섬의 승자가 됐어. 엘프든, 드워프든 저들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군단은 승리 후에도 여전히 스켈레톤, 혹은 데스나이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골제 바르한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전쟁을 통해 저들은 길들여진 거야. 생사를 건 싸움 속에서도 적의 칼날에 찢겨져 나갈 피부도, 짓이겨질 심장도 없이 포효할 수 있다는 것. 불사의 마약에 취해버린 거지.’
‘그래서 골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아주 긴 시간을 들여 만들어진 세뇌지. 나는 골제가 용왕을 쓰러트린 후에도 어째서 승전의 기쁨을 자축하지 않았는지 뻔히 보인다. 군단의 병사들이 불사의 효과를 직시하게 되면 세뇌에서 깨어나는 녀석들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런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다음 층을 향한 전쟁을 선포한 건 영리한 거지.’
모든 죄수가 탈옥을 꿈꾸는 등반죄수가 되진 않는다.
그것은 지금껏 감옥을 오르면서 동료들을 하나씩 만나온 내가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다.
‘알겠어, 비르카. 전쟁이 사라지면 불사의 쾌감도 필요 없어질 테니 그 순간을 미루기 위해 골제는 자신의 탈옥에 군단 전체를 이용하는 거군. 외부의 적을 만들어야 내부가 단단해지는 건 증명된 이치니까.’
‘나는 그것이 정말 사악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네게 정신고문을 가했던 그 메르킨이라는 용보다 바르한이라는 흑마법사가 더 단계 높은 악당인 거야.’
‘비르카…….’
‘슈바인, 하나 물어도 될까? 만약 네가 이곳 천공섬으로 내 영체를 소환했을 때 내가 조력을 거부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일단은 서운했겠지. 하지만…… 내 등반여정에 너희를 강제로 동원할 수는 없으니 받아들인 후 다른 방법을 찾았을걸.’
‘켈켈켈. 바로 그게 너와 골제의 차이점인 거다. 너는 내가 본 화룡도의 그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하는 녀석이었다. 올쿠레 어르신은 바로 그 의지를 알아봤기에 르팔타커스가 너를 고른 거라고 말했어.’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이야기를 내게 해 준 장본인인 올쿠레 어르신.
그와 비르카가 이런 얘기를 나눴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해. 너는 그렇게나 바라는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결코 타인의 자유의지를 짓밟지 않지. 바로 그것 때문에 너는 파천황의 선택을 받았고…….’
비르카의 영체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나는 묘하게 달뜨는 기분이 되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우리 방장을 좋아하는 거다.’
‘……방금 사랑 고백 한 거냐?’
‘마음대로 생각해라, 켈켈켈.’
‘이 망할 녀석이!’
‘미안하다, 슈바인. 네가 스켈레톤인 내 도움이 필요하다길래 나는 저들 역시 나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마도사에게 이식받은 사자교령술로 훨씬 적극적인 도움을 줬을 거다. 어쩌면 골제의 병사들을 전부 너의 편으로 바꾸는 기적도 가능했겠지.’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런 큰 힘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어. 화룡도에서 평화를 즐기고 있던 널 강제로 데려온 내가 미안해하는 게 맞지.’
‘원래 친구란 게 그런 거 아니겠나, 켈켈. 도움을 요청하는 쪽의 미안함보다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무능한 친구의 미안함이 더 무거운 법. 그게 우리의 우정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
나는 울컥해서 비르카에게 다짐했던 것 같다.
‘너는 결코 무능하지 않아. 반드시 작전을 성공시켜서 그걸 증명하겠어.’
‘부탁한다, 슈바인 스트링거. 타인의 자유는 물론 그 시간마저 강탈해 본인의 것으로 삼는 저따위 흑마법사에게 지지 마라.’
‘암, 반드시 이겨서 돌아올게.’
*
반드시 이기겠다고 호언장담은 했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난 골제와 직면하게 되는 순간 살짝 오금이 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명해라, 슈바인 스트링거. 대체 날 어디로 데려온 거냐!”
자신의 마력을 전부 해방시킨 골제가 내뿜는 박력은 실로 대단했다. 용왕과 맞서 사투를 벌일 때도 보여주지 않은 광기가 해골 안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여긴 내가 가진 물건들을 수납해 넣는 아공간 주머니 속이다. 어디 마음껏 둘러 봐봐. 아주 오랜 시간 여기 갇혀 있어야 할 테니까.”
골제의 머리가 홱홱 돌아가는 꼴은 우스꽝스러웠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사실 나도 인벤토리 안을 제대로 둘러본 것은 처음이니까.
보는 이의 정신을 짓눌러버릴 것 같은 백색 공간이 무한히 펼쳐져 있고 투명한 박스 안에 현무패웅검, 드래곤하트 플레이트, 아론다이트 같은 아이템들이 둥둥 떠 있었다.
심지어 화룡도에서 내가 갖고 온 채굴용 곡괭이도 보였다.
“신기하지, 골제? 원래 생명체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어. 하지만 지금의 너는 스스로를 ‘무생물’의 기준에 넣어버린 탓에 아이템 취급을 받고 있는 거다. 물론 네게 불사자의 축복을 받은 나도 마찬가지고.”
골제는 바닥을 가리켰다.
“이 많은 뼈들은 뭐지?”
시야가 닿는 거의 모든 곳에 모래처럼 깔려 있는 것은 각양각색의 크기와 형태를 자랑하는 흰 뼈들이었다.
“너무 삭막한 공간에 널 가두면 미안하니까 갖고 온 거야. 전부 한때 죄수의 육체였던 뼈들이지.”
“……재앙신의 뱃속에서 챙긴 거로군. 그래서 그 모래벌레에게 스스로 잡아먹혔던 건가.”
내 예상대로 골제는 날 지켜보던 6층 교도관과 모종의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듯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모래벌레의 위장에 뛰어들었던 사실을 알 방법이 없지.
“6층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 그 녀석이 네 뒤를 봐주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어디 한 번 그놈을 불러보지 그래? 여기서 널 꺼내 달라고 말이야.”
분한 듯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는 골제를 보니 내가 생각하는 바가 맞는 듯 보였다.
“응답이 없지? 당연해. 이 인벤토리 속엔 시간이 흐르지 않거든. 게다가 내게 이 공간의 사용권을 준 주인공은 무려 교도관장이야. 이 권능을 깨트리는 건 우주의 그 누구도 불가능할걸?”
“여기가 너의 전용 마법 공간이라면, 어째서 너도 여기에 기어 들어온 거지? 그냥 나만 가둬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내 소중한 보물 창고에 시한폭탄을 달고 다닐 생각은 없거든. 이 안에서 네가 소중한 아이템들을 훼손시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달그락.
골제가 뼈들의 섬을 헤치며 내게로 걸어왔다.
“내게 뭘 원하는 거냐, 당장 말해라!”
“꽤나 평정심이 흐트러진 모양이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걸 보니. 이런 건 당신 스타일이 아니지 않아? 기껏 시간이 멈춘 곳으로 데려와 줬더니 말야. 내 쪽은 더 담소를 나눠도 되는데 말야.”
“닥치고 꿍꿍이를 밝혀!”
“아마 당신도 짐작하고 있을걸. 세계수가 그냥 죽게 내버려 둬. 그리고 더 이상 감옥을 오르는 걸 포기하고 다시 6층 만골사막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약속하면 널 여기서 꺼내줄게.”
30미터 거리에서 골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노려본다. 어깨에 걸쳐진 망토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보니 울분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듯 보였다.
“4천 년이다.”
“뭐라고?”
“이 감옥에서 내가 받은 형량. 본래는 2천 년이었으나 한 번의 등반 실패로 이 지경이 되어버렸지.”
“쯧쯧. 안 됐네. 월드컵을 500번이나 치를 시간을 벌로 받게 되었으니.”
“그런데 감히! 네깟 놈이 내게 8천 년의 시간 동안 이 감옥에서 고통받으라는 거냐? 그것도 세계수를 건드리지 말라는 알량한 목적 때문에?”
“알량하다고 말하지 마. 세계수엔 호이란의 영혼이 있어. 내 소중한 친구의 혈육이 그 나무의 수맥에 구속돼 있지. 너의 전쟁도구로 이용되도록 놔둘 순 없다.”
“거부하겠다, 슈바인 스트링거. 너는 여기에서 죽게 될 것이다.”
골제의 등 뒤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일렁였다.
구부러진 뱀의 형태를 한 기묘한 문양.
그곳에서 강고한 흑마법사의 마나스트림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내 분노를 그대로 받아들여 보라!”
오래 전 모래벌레에게 씹어 먹혀 죽은 어떤 죄수의 팔목뼈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골제의 공격 같은 건 아니다.
그저 그가 마력을 해방시킨 여파 덕분에 날아오는 파편일 뿐이었다.
나는 맨손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S급 마검 디아볼릭도, SS급 성검 아론다이트도 불러오지 않았다.
그러자 골제가 내 무저항 상태를 비웃었다.
“너를 공격하면 언약을 어기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하지만 네 말대로 이곳은 교도관과의 연결도 통하지 않는 아공간. 언약을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라면 오산이다.”
골제가 불러낸 마기의 칼날이 내 가슴을 꿰뚫었다.
파아아아악!
나는 한참을 나가떨어졌다.
“아, 얼굴 근육이 남아 있었다면 썩소를 날려줬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네.”
뼈의 잔해 속에서 비틀비틀 일어선 후 나는 멀쩡한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상태창에 표시되는 내 체력바를 살폈다.
[HP: 13,899/13,899]
대미지가 1도 박히지 않았다.
“잊었어? 네가 걸어준 불사자의 축복 덕분에 나는 일격에 즉사 당하지 않으면 죽지 않아.”
“……내가 축복을 걸 때만 해도 너의 내구력은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그야 그랬겠지. 하지만 네가 선심 쓰듯 내게 넘겨준 층장의 열쇠 덕분에 ‘스탯 레벨업’을 했거든.”
리버스 그래비티.
나는 뼈들의 바다에서 솟구치는 물방울처럼 날아올랐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저렇게 얼빠진 모습의 골제를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싶었을 뿐이다.
“바르한 니칸드로스. 너는 다른 죄수들을 물건 취급했다. 너의 탈옥에 강제로 끼워 넣기 위해 고장 날 일 없는 부품으로 취급했지.”
성검 아론다이트가 투명한 상자에서 해방되어 내 손으로 날아왔다.
공중에서 기수식을 취한 해골 병사가 지상의 해골 흑마법사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어디, 네가 만든 부품에게 당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