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만료되었습니다 (4)
해골이 되었다 해서 감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바깥이 지나치게 조용해지지 않았냐는 내 도발에 바르한은 한 걸음 물러나서 존재하지 않는 귀를 기울였다.
“기이하군. 북소리가 들리지 않아.”
골제의 군단에는 병사들의 투혼을 일깨우기 위해 거대한 북을 울리는 군악대가 있었다. 그것은 6층 만골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식하지 않으면 깨닫기 어려운 백색소음처럼 그 북소리는 언제나 골제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막할 뿐이다.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어?”
북소리의 빈 자리를 채우는 건 아스라이 들리는 병사들의 육성이었다.
뭔가에 경악한 듯, 혹은 감탄한 듯 언어로 형상화되지 못한 원초적인 혼란이 담겨 있는 소리.
“궁금하면 내다보지 그래?”
골제는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모래를 물길처럼 타고 레어 입구로 날아가 버렸다.
그사이에 나는 모래기둥에 묶여 있는 아스티나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 어때, 알아냈어?
- 레나스의 연금술 덕분에 간신히. 골제의 자동결계에 걸려 있는 명령은 단순해. 단순할수록 깨트리기 어려우니까.
- 명령이 뭔데?
- 자신이 목적을 알지 못하는 모든 접촉을 차단하는 거야. 물론 반대쪽에서는 가능하고.
이러니 내가 골제를 만질 수 없었던 거였다.
그야말로 의심 많고 철두철미한 흑마법사가 조건으로 걸만한 결계였다.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물리적 공격은 여분의 시간으로 덧칠해 무용지물로 바꾸고, 혹시나 존재할지 모를 불의의 습격은 자동결계로 방어한다.
마법적 철옹성이나 다름없다.
르팔타커스 시온이 승부를 내지 못할 만했다.
하지만 나는 르팔타커스가 아니다. 그의 방식을 따라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내 방식은 이미 훌륭하게 작동하는 중이었다.
“저게…… 대체 뭣들 하는 거지?”
골제의 얼빠진 목소리가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꽁꽁 묶여 있는 입장에선 지금 녀석이 보고 있는 시점을 공유하기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보건대,
현재 해골 군단의 기강은 있는 대로 해이해져 있을 게 틀림없다.
“누구야, 저 여인은?”
골제는 바짝 긴장한 듯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자신이 오랜 시간 준비해온 불멸의 군대가 단 한 명의 존재감 때문에 대혼란을 일으킨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레나스? 바깥 상황은 어때?”
“관객님의 작전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관객님께서 예상하신 것의 180% 정도의 효율이 발생하고 있군요. 감정을 느끼는 기능이 없는 저로서는 저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기 어렵지만요.”
바깥을 휘젓고 있는 존재는 내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비밀병기,
7번 방의 스켈레톤인 비르카 리케우톤이다.
나는 녀석에게 딱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냥 멀리서 뚜벅뚜벅 걸어오라고?’
‘그래. 그거면 돼. 우리가 골제의 레어에 들어가면 싸움이 시작될 거야. 그동안 해골 병사들의 시야에 마음껏 노출되면 돼.’
‘켈켈켈. 춤을 춰도 되겠지?’
‘꼭 그럴 필요는 없어.’
춤에는 과격한 동작이 따르게 마련이며 조금만 무리하면 뼈와 뼈가 분리되는 비르카의 관절염을 생각해 자제시키려 했다.
하지만 골제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춤을 추면서 오고 있는 모양이다.
“병사들의 반응은 어때?”
“어떻게든 비르카를 가까이서 목격하기 위해 서로를 밀치며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있던 만철도시의 퍼레이드가 생각나는군요. 하지만 오직 퍼레이드를 위해 만들어진 오토마타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게다가 비르카는 혼자지. 훨씬 대단한 거야.”
“무기를 떨구는 병사들도 있습니다. 철저하게 훈련된 자들로 보이는데…… 저런 걸 넋이 나갔다고 보면 될까요?”
“으음. 좋은 표현을 습득했구나, 레나스.”
자신이 해골계의 뮤즈, 피그말리온, 슈퍼스타라고 늘 주장해온 비르카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입증됐다.
그래서 나는 그걸 적극적으로 써먹어 보기로 했다.
물론 비르카의 전투력은 0에 수렴한다.
저 바깥에 존재하는 해골 병사들 중 최약체인 자가 습격해도 비르카는 일격에 제압될 테지.
하지만 지금의 비르카는 영체 상태.
물리적인 공격도, 피격도 이뤄질 수 없는 안전한 방어막에 둘러싸여 있다.
결국 참다 못한 골제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지금 뭣들 하는 게냐아!”
골제의 음성은 지팡이의 마력을 통해 확산되어 층 전체를 울릴 기세로 퍼져나갔다.
삼월초원의 절정고수들이 간혹 사용했던 전투 시의 사자후에 비견될 만했다.
“뭐, 뭐지?”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내 창이 안 보여!”
병사들 사이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나는 듯했다.
내무반에서 몰래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를 단체로 감상하던 병사들의 등 뒤에 사단장이 방문한 셈이나 다름없겠지.
“저 여인을 당장 내 눈앞에 끌고 오라!”
골제는 소리쳤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미리 안배해둔 바가 있었다.
다행히 잊지 않았는지 비르카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어. 내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 바르한 니칸드로스.”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이름이 불렸다는 건 골제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줬을 것이다.
다음 순간 골제는 내 앞에 서 있었다.
어찌나 마음이 급했는지 누가 공격한 것도 아닌데 시간 마법을 시전할 정도로.
“슈바인 스트링거, 자네 짓인가?”
“뭐,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도 재밌겠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겠지. 맞아, 비르카는 내 동료다.”
“……스켈레톤 친구가 또 있는 줄은 몰랐는데.”
“원래 비장의 한 수는 감춰두는 거니까.”
골제가 내 속셈을 알기 위해 모래에 묶여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뻥 뚫린 눈구멍 속에서 루비 색깔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비르카가 레어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휴우, 이거 완전 난장판인걸? 왜 기둥이 다 무너져 있어.”
비르카가 목소리를 내자마자 골제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위협적인 모래칼날 네 개가 스켈레톤 주변을 감싸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목적을 밝혀라, 해골 병사.”
“난 네 부하가 아니야. 병사 따위라고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있던 세계에서 이 몸은 무려 천인장이었거든?”
골제가 모래발판을 타고 날아가 비르카 앞에 섰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여기서부터가 승부처다. 비르카가 골제와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에 따라 이번 각본의 성패가 갈린다.
당연히 골제가 비르카를 보며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리 예상하기 어려웠기에, 사실상 이 시점부터는 주연배우인 비르카의 애드립에 달린 상황이다.
“대뜸 목적부터 묻다니, 매너가 영 꽝이로구만. 숙녀를 영접할 때는 통성명부터 하는 게 순서이거늘.”
“병사들에게 매료 마법을 쓴 건가? 하지만 지팡이도 없이 마법을 쓸 정도로 강해 보이진 않는데.”
“마법 따위 쓴 적 없어. 그딴 잡스런 방법 없이도 수컷들은 나에게 굴복하게 되지. 흐흠. 아니야?”
“본인에겐 통하지 않는다. 이 몸은 오직 마법의 극에 다다른다는 욕망 말고는 모든 욕망을 거세한 지 오래니까.”
자신만만한 말투치고는 골제의 음성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래 대화를 나눠본 입장이 아니었다면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비르카는 말했다. 해골 상태로 보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자신의 아름다움에 혼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
그렇다는 건 녀석의 ‘미모’가 골제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봐야 한다.
“나는 비르카 리케우톤. 새로운 층의 지배자가 된 당신을 만나러 왔어.”
“이유는?”
“당신이 이 층의 황제라면서. 그럼 나는 황후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에엑?
대뜸 청혼이냐?
아무리 임기응변으로 알아서 하라고 했건만 저렇게 파격적으로 나갈지는 몰랐다.
“……영문 모를 소릴 하는군. 망발을 일삼은 죄로 죽여버리겠다.”
비르카의 등 뒤에 떠 있던 모래칼날이 휘둘러졌다.
“으악!”
비명을 내지른 것은 비르카가 아닌 캉이였다.
양옆에 묶인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의 눈총을 받아 움츠러드는 하얀 귀.
영체 상태의 비르카는 건드릴 수 없다는 걸 미리 언질 받았음에도 반사적으로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골제도 캉이 못지않게 경악했다.
“건드릴 수 없어? 무슨 수를 쓴 거지?”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골제의 어지러운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차라리 참월의 마녀나 아스티나 수준의 뛰어난 흑마법사가 이런 짓을 벌였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심하게 뜯어봐도 비르카에게서 그 정도의 마법적 성취는 찾아볼 수 없을 테지.
자신의 마법에 대한 식견에 절대적 자부심을 갖고 있을 수록 지금 벌어지는 현상을 소화하기 어려울 테다.
결국 골제는 비르카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비르카의 두개골은 골제의 손을 그냥 통과시킬 뿐이었다.
“허상? 환영인가? 하지만 내가 파악하지 못할 환영 마법이 있을 리가. ……그렇다면 귀신이나 혼령? 세계수의 운해를 없애버리는 바람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건가.”
“에, 그러니까…….”
비르카가 난처한 듯 내 쪽을 쳐다 본다.
아무래도 준비해온 애드립이 다 떨어진 모양이다.
나는 싱긋 웃으며 바톤을 이어받았다.
“답도 안 나오는 걸 너무 궁리하지 마라, 골제. 비르카는 내 친구가 맞다니까? 다만 누구도 만질 수 없고, 거꾸로 만져질 수도 없지.”
골제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뜸 비르카의 왼손을 덥썩 붙잡았다.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다른 부위는 몰라도 이 왼손은 실체가 있어. 아마 이게 너의 본체인가?”
만질 수 없는 비르카의 신체를 골제가 어루만졌다.
기둥에 묶인 모든 친구가 나를 쳐다보았다. 회심의 미소를 띤 채.
걸렸구나, 이 새끼.
지금 골제가 만지고 있는 왼손은 비르카의 것이 아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내 왼손과 진작 교체해뒀기 때문이다.
물론 영체인 비르카에게 실체인 내 왼손이 접착제처럼 달라붙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비르카가 레어에 들어온 이래 나는 정신을 초집중해 ‘허공섭물’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 결과, 골제의 철옹성인 자동결계에 인식되지 않고 녀석과 접촉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순간 어찌 된 영문인지 골제 또한 눈치챈 모양이었다.
“슈바인, 자네의 손이라고? 왜 이런 짓을 벌였지? 이런 걸로는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을 텐데.”
“그래.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지.”
그 상태 그대로는 말이야.
기다렸던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띠링!
[용사가 새로운 물건을 만졌습니다. 주인이 없는 아이템이므로 인벤토리에 수납이 가능합니다.]
절대방어에 가까운 골제의 시간 마법.
그것을 공략하기 위한 유일한 한 수, 그 초석이 될 단계가 이제 막 시동을 걸었다.
“스스로 불사의 존재가 된 리치. 어지간해선 생명을 위협당할 리 없으니까 오만해진 채로 살아왔겠지? 그게 너의 약점이 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골제를 향해 꿈에 그리던 선언을 했다.
“지금부터 널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 줄 거다. 그곳에는 공간의 한계도 없고, 시간의 흐름도 흐르지 않는 무시무시한 곳이지.”
“……어딜 말하는 거지?”
어디긴.
내 인벤토리 속이지.
나는 지금껏 읊었던 그 어떤 마법 시동어보다 더욱 우렁찬 기세로 외쳤다.
“아이템 수납!”
그러자 모래기둥과 함께 골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