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만료되었습니다 (3)
‘제자야, 또 뭐가 그리 궁금한 것이냐.’
‘예?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얼굴에서 다 티가 나느니라. 저번에 금강불괴라는 게 진짜 있냐고 물어볼 때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느냐.’
‘……실은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거든요. 사부님이 계시던 세계에도 ‘논검(論劍)’이란 게 있었나요?’
‘논검이라. 두 절정고수가 병장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입으로만 초식을 펼쳐 승부를 가리는 행위를 말함이군. 한 문파의 장문인이나 장로급 고수들 사이에선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도 하지.’
‘검을 쓰지 않고 무학의 우위를 논하는 게 정말 가능한 행위입니까? 저는 잘 감이 오지 않아서요.’
‘전부 개소리니라.’
‘개소리요?’
‘마교에서 어찌하여 허구헌날 목숨 걸고 서열전을 치르겠느냐. 직접 싸워보지 않고서는 강자존의 율법을 바로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니라. 제자야, 같은 초식을 익힌 동급의 강자라 하더라도 실전에선 무수한 변수가 생긴다. 본래 갖고 있던 부상의 여파, 심리의 동요, 타고난 신체조건, 맞부딪히는 병장기의 강도. 그 많은 요소들을 통제하면서 동시에 앗차 하는 순간 황천길을 건넌다는 압박감과도 싸워야 하지.’
‘듣고 보니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실전의 변수들을 돌파해내는 것 또한 실력이라는 거군요.’
‘옳다. 그리하여 논검이라는 짓거리는 본질적으로 허풍이다. 패하는 순간 잃을 게 많아지는 뒷방 늙은이들이 자기 체면 지키려고 만들어낸 허례허식일 뿐. 다만…….’
‘다만?’
‘쌓은 무의 경지가 워낙 까마득해 신선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면 그때는 진정한 논검이 가능할지도 모르지.’
‘어째서 그렇습니까.’
‘생사경이나 탈마지경을 이룬 고수라면 단전에 쌓은 내공은 의미가 없어지고 육체 또한 만독불침에 이른다. 그 정도의 고수가 서로를 제압하려면 자연법칙을 주무르는 상대의 ‘논리’를 깨부숴야 하지.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병장기의 강도와도 상관없이 진정한 ‘개념끼리의 사투’가 벌어진다는 뜻이니라.’
‘너무 어려운데요, 사부님.’
‘허허허. 그럴 수밖에. 본좌도 아직 이루지 못한 경지를 추측해볼 따름이니. 만약 이 감옥 위로 계속 올라간다면 그런 수준의 싸움을 겪게 될지도 모르지만.’
*
천마 류운학과의 해묵은 대화가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실체가 아닌 개념을 박살 낸다는 의미에서의 ‘논검’.
그것은 마치 상위 마법사들의 술식 토론과도 다른 신묘한 경지였다.
그때에는 예상할 수 없었지만 나는 7층에 올라서야 ‘논검’으로 박살 내야 하는 상대를 만나게 됐다.
골제 바르한 니칸드로스.
내 친구들의 살벌한 협공을 혈혈단신으로 상대하고 있는 흑마법사의 이름이다.
[마왕군 폭렬마법]
[4급 오의 오메가 플레어(Omega Flare)]
폭룡의 힘을 각성한 제르비어스 폰타인이 마기를 폭발시키며 골제를 밀어내보려 했다.
오메가 플레어는 본래 마수의 이빨이 땅 밑에서 지상의 존재를 집어삼키는 듯한 기술인데, 그 위력과 범위가 한층 강해져 있었다.
내 무영보로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플레어가 신전의 3분의 1을 휩쓸었음에도 골제는 멀쩡하게 걸어 나왔다.
“박력은 대단하지만 가진 힘을 효율적으로 분배하지는 못하고 있군. 마나흡수력에서 인간과 비교도 되지 않는 마족의 특권 때문인가.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자네의 힘만 빠질 뿐.”
게다가 요리대회의 심사위원인 양 제르비어스의 기술을 느긋하게 평가하기까지 했다.
캉이가 여우화를 마치는 것과 동시에 여덟 마리의 분신을 만들어냈다.
각각의 구미호가 품은 만다라가 요기를 빨아들인 직후.
[여우트림 극(極)]
아홉 개의 붉은 빛줄기가 골제를 태워버리기 위해 십자포화의 광경을 연출했다.
콰아아아아앙!
하지만 신전 바닥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겼을 뿐, 골제는 그 중앙에 망토 하나 그을리지 않은 채 우뚝 서 있었다.
“용의 입김과는 다른 희한한 공격법이군. 파괴력도 대단해. 하지만 지속력에서 약점이 있다네. 자네가 모친 호이란 정도로 자라난 성체였다면 심각한 위협이 되었을지도.”
이렇게 긴 설명을 하면서도 골제의 시선은 구미호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면서부터 자신만의 마법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아스티나 류를 주시했을 뿐이다.
아스티나는 청룡패웅검을 아예 허공에 띄워놓고 술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난 이제 마검사보다 마법사에 훨씬 가까운 존재가 될 거야. 그게 천마 설공을 이길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거든.’
감옥 안에서 수많은 적을 베어온 청룡패웅검의 검신은 이제 월장석을 지탱하기 위한 지팡이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골제는 확실히 아스티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을 테니 어디 한번 공격해 보게나. 괜히 서둘렀다가 회심의 술식에 어긋남이 있으면 마법사로서 속상하지 않겠는가.”
“……걱정해줄 필요는 없어. 내가 계산을 잘못할 일은 없으니까.”
아스티나의 마법진은 이미 북극곰도 집어삼킬 만큼 커져 있었다. 마법진 안쪽에서 회전하는 육망성이 어느 순간 멈춰 섰고,
그 순간 신전의 공간이 통째로 잡아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스티나가 펴진 손바닥을 꽉 쥐는 순간 골제의 망토가 우드득하고 찢겨나갔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그라비타스 컴프리메레(Gravitas Comprimere)!]
또 하나의 새로운 중력 마법.
극한의 중력 압축을 시전하는 위압적인 기술이었다.
이 한 방을 위해서 아스티나가 갖고 있는 마력 수치의 절반을 소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먹혔나?’
골제를 통째로 집어삼킨 공간은 마치 탁구공 크기로 줄어들어 회전하고 있었다.
그 안에 빨아들인 모든 물질을 갈아버리겠다는 듯이.
쩌적.
하지만 구슬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더니 다음 순간 골제는 허공에서 튀어나와 사뿐히 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절망감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딱딱딱.
하지만 골제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뼈만 남은 그의 손바닥 덕분에 마치 악어가 이빨을 부딪히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오싹했다.
“정말이지 대단하군! 갓 성인이 된 나이에 어찌 이런 성취를 이뤘단 말인가. 노력형 천재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어.”
“…….”
“질투가 날 정도로군. 사실 나는 평범 이하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였거든. 한때는 자네처럼 보기만 해도 눈부신 재능을 타고난 친구들의 물병에 독초를 집어넣기도 했지.”
태연하게 악행의 추억을 말하는 골제를 바라보며 모두가 움찔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었다.
“물론 치기 어린 사춘기 시절의 이야기야. 지금은 인간이었던 시절이 멀게만 느껴질 정도가 되었지. 어떠한가. 자네, 불사자의 축복을 받아 내 옆에 남을 생각은 없나. 분명 자네의 마법 인생에 완전한 전환점이 될 터인데. 이 감옥 바깥에서도 나 정도의 스승은 만날 수 없을 것이야.”
내가 아는 아스티나라면 저딴 유혹에 넘어갈 일이 없다. 마법 성취는 그녀에게 있어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이니까.
그런데 아스티나는 단박에 거절하는 대신 골제와 대화를 더 이어나갔다.
“어떻게 탈출한 거지? 힘으로 빠져나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자네의 술식은 완벽했네. 시공간을 제어하면서 블랙홀로 넘어가기 전에 멈춰서는 정밀함은 예술의 경지였지. 하지만 그 완벽함은 술자의 세계 인식에 영향을 받아.”
아스티나의 세계 인식에서 방금의 공간 압축엔 결점이 없었다.
하지만 골제는 시간과 공간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자신만의 세계 인식으로 그것을 격파해낸 것이다.
마녀의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유추해낸 지점에 아스티나가 도달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군. 방금 일어난 건 마법 대결이 아니었어.”
“암, 아니지. 술자의 세계가 충돌하여 내 것이 승리한 셈이라네.”
“패배를 인정하지. 그리고 제안은 당연히 거절하겠어.”
골제는 분노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더 달콤한 말을 생각해낼 수도 있겠으나 상대의 의사가 확실해진 만큼 구태여 애원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았다.
다만 전투가 일어난 이래 처음으로 지팡이를 휘둘렀을 뿐이다.
지이이이잉.
나는 골제의 마법진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지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완벽한 원형인 보통의 마법진과 달리 중간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모래시계의 형태? 아니, 우로보로스인가.’
숫자 8에 가까운 마법진은 내부에서 마나스트림을 일으키며 태세를 마쳤다.
“일단 쓸데없는 짓을 못 하도록 만들어주지.”
푸화아아아아악!
골제를 둘러싼 기둥 중 네 개의 기둥이 순식간에 내려앉으며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모래로 만들어진 뱀이 동료들을 덮쳐갔다.
가장 먼저 기민하게 반응한 것은 레나스였다.
오토마타는 수검 형태로 변환해 모래뱀을 잘라내었으나 그것은 두 마리로 분열하면서 레나스의 팔다리를 옥죄었다.
다른 세 친구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방어도, 반격도 무효화시키는 모래기둥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직, 아직은 아니야.’
나는 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모든 순간을 지켜봐야만 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골제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그럴 경우 모든 것은 끝장이 난다. 나는 스스로 동맹을 어겨 소멸될 테니까.
“이런 상황에 와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군, 슈바인 스트링거. 자포자기한 건가? 아니면 친구들에 대한 과한 믿음 때문인가?”
골제가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내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조건을 무슨 수로 극복할 심산인가. 내 궁금증이 풀리기 전에 친구들이 전부 모래에 집어 삼켜져 죽어버리면 곤란할 텐데.”
골제 바르한의 육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무영보나 워핑을 시전하지 않고도 손만 뻗으면 서로가 닿을 수 있는 위험한 거리까지.
“당연히 자포자기는 아니야. 널 굴복시킬 비장의 작전이 있지.”
죄수들로부터 넘겨받은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풀어쓰는 골제.
이 녀석은 힘으로 제압할 수 없다.
마법 대결로도 누를 수 없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러니 나는 애초에 녀석이 마법을 시전할 수 없도록 봉인시킨다는 전술을 들고 왔다.
이 작전의 가장 어렵고도 결정적인 단계는 바로 지금부터다.
나는 벼락처럼 골제의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격을 하는 행위가 아니다. 단순히 상대를 만짐으로써…….
“나를 만짐으로써 뭔가 수상한 짓을 하려는 거겠지?”
덜컥.
내 손은 골제의 몸을 둘러싸던 모래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분명 의식 못 했을 텐데.’
아스티나가 경고했던 일종의 자동결계가 방금 내 접근을 막아섰다.
“상대가 뭔가 노리고 있는 게 뻔한데, 스스로 걸어 들어가 줄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저 친구들과는 달리 자네는 6층까지 층장들을 쓰러트리며 올라온 등반죄수. 내 쪽에서도 여유를 부릴 수야 없지.”
나는 미련 없이 손을 거두었다.
어차피 플랜A가 손쉽게 이뤄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어쩔 생각인가? 순순히 포기하고 다음 층으로 꺼져줄 텐가.”
“아니. 아직 내가 준비한 수가 남아 있거든.”
“그건 언제 펼쳐볼 생각이지?”
“사실은 이미 펼쳐둔 지 오래야.”
골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신전 바깥을 가리키며 플랜 B의 시동을 예고했다.
“이 둥지 바깥 말인데. 지나치게 조용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