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만료되었습니다 (2)
“친구 아스티나 류의 곁으로 순간이동!”
모래벌레의 뱃속에서 볼일을 마친 나는 순간이동의 권능을 시전했다.
마지막 준비물을 거두기 위해서.
“어라?”
당연히 환한 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도착한 곳은 거대괴수의 위장 못지않게 어두컴컴한 통로였다.
앞서 걷고 있던 아스티나가 내 기척을 발견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왔구나, 슈바인. 모래벌레는 ‘그걸’ 갖고 있었어?”
“응. 충분히 필요한 만큼.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통로의 양식은 익숙히 보아왔던 그것과 비슷했다.
규모나 화려함은 비할 바 없었으나 용왕의 드래곤 레어를 보던 것과 같은 기시감을 줬다.
일행의 선두는 캉이였다.
녀석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토니아의 날개가 찬란한 광휘를 내뿜고 있었다. 아마도 요정술을 발휘하고 있는 중인 듯 보였다.
그렇다는 건 이 레어가 햇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긴 지하야. 단탈리온이 알려준 좌표로 날아왔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고.”
“그래서?”
“설마 그 짧은 사이 도망쳤나 했는데, 다행히도 캉이의 코가 사막 밑을 가리켰어. 그리고 구미호로 변신해 여기까지 파고 들어온 거야.”
통로 벽면에는 날개가 없는 용이 다양한 포즈로 양각되어 있었다. 용 주변으로는 물결치는 파도가 묘사되어 있었는데 신전 주인이 바다에서 서식했다는 걸 가리키는 듯 보였다.
“수룡인가?”
“아니, 시 서펜트(Sea Serpent)의 둥지인 것 같아.”
시 서펜트라면 이무기였던 이멜타스처럼 용의 친척이되 용과 같은 막강한 힘은 없었을 것이다.
이 레어의 주인은 용들의 패악질로부터 숨기 위해 부유도를 가라앉혔을 가능성이 있었다.
“해골 군단이 천공섬에 올라오기 전엥 이 일대가 전부 운해의 밑이었겠징? 운해가 사라지공 모래폭풍이 층 전체를 뒤덮으면성 자연스레 지하엥 묻힌 꼴이 된 듯행.”
“……그런데 왜 코를 붙잡고 말하는 거야?”
“몰라서 묻는 거양? 너한테 나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는구낭?”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서는 아스티나를 보며 살짝 마음의 상처를 받을 뻔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여태껏 모래벌레의 위산 속에 하반신을 담근 채 적지 않은 시간을 헤매었다.
“형아, 좀 씻고 오면 안 돼? 냄새 때문에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
결국 캉이의 볼멘소리 탓에 나는 더욱 난감해졌다.
다행히 냄새를 맡지 못하는 오토마타 레나스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관객님의 갑옷과 뼈, 그리고 관절에 산성 물질이 달라붙어 악취의 근원지가 되고 있습니다. 제거해 드릴까요?”
“응, 부탁해.”
레나스의 양팔이 4장의 날개로 변하더니 거대한 선풍기 역할을 했다.
후우우우웅.
강력한 바람 때문에 몇 걸음 뒤로 물러서기까지 해야 했다.
레나스 덕분에 깨끗해진 나는 다행히 일행에 합류할 수 있게 됐다.
지하신전의 회랑에서 토니아가 캉이를 멈춰서게 했다.
“이 밑에서 용의 존재감이 느껴져. 아마 사용자만이 구분할 수 있는 어떤 개폐 장치가 있을 것 같은데.”
제르비어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나섰다.
“곧 정오가 된다. 어딨는지도 모르는 장치를 찾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어. 부숴버리지.”
마룡으로 변신한 이후라서일까.
폭렬마왕의 오른팔에 휘감기는 마기의 농도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나는 아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위험하진 않을까?”
“결계를 편 흔적은 없어. 용이 편 마법 결계라 하더라도 내가 존재조차 모를 리는 없잖아? 이 아래에 있는 녀석은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거야.”
콰아아아아아앙!
제르비어스가 회랑 바닥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러자 마왕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금이 가더니 잘려나간 당근 조각처럼 일대가 붕괴되었다.
숨어 있던 녀석 입장에선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멀쩡한 천장을 주먹으로 때려 부수는 습격자라니.
하지만 제르비어스는 포획의 순간을 내게 양보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녀석에 대한 직접적인 원한은 역시 내 쪽에 있었으니까.
말라깽이 노인이 의자째로 넘어진 채 황망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에 숨어 있었구나, 환룡 메르킨.”
“……어, 어떻게 네가?”
“내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지. 원한은 가볍게 다루고, 은혜를 무겁게 생각해야 한다고.”
메르킨의 멱살을 잡은 후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런 말씀도 하셨거든. 마교도는 보통의 무인과 달리 공포로 천하를 거느리는 존재. 응당 은혜보다 원한을 갚는 일을 훨씬 중하게 생각하라.”
“사, 살려다오.”
“그건 너 하는 거 봐서.”
메르킨이 가진 파충류의 동공이 공포로 물들었다.
*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용왕은 이미 죽지 않았는가.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이 어떨지?”
날개를 잘린 용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너는 단순히 나를 고문만 했던 게 아니야. 여기 있는 내 친구들이 나를 데려가게 함으로써 서로 살육을 벌이길 조장했지.”
“저, 전부 게브라둠 그년이 시킨 일이다! 나는 신하로서 군주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야.”
“……군주가 죽자마자 년년거리면서 욕보이는 걸 보면 그렇게 충직한 신하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메르킨이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한 달 동안 묶어두고 괴롭혀주고 싶었으나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마인드 스포일러를 내놔. 요긴하게 쓸 데가 있으니.”
“……진작에 버렸다. 이제 와선 아무런 쓸모도 없으니까.”
“흐음. 그래?”
미안하지만 거짓말이나 기만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단탈리온.”
- 사실이 아닙니다, 용사님. 메르킨은 형태를 바꿔 마인드 스포일러를 소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는데?”
메르킨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냈다.
둔갑이 풀리듯 내가 알고 있는 형태의 마인드 스포일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것을 낚아챈 다음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내가 죽으면 마인드 스포일러는 무용지물이 된다. 내 마력과 연결돼 있으니까.”
“단탈리온.”
- 이 말은 사실입니다. 다른 층으로 가져가도 연결이 끊어져 평범한 잡동사니로 전락할 겁니다.
그렇군.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 물건은 오늘부로 사용가치를 다 할 테니까.
“그걸 왜 훔쳐 가려는 거지?”
“훔쳐 간다니, 표현이 잘못됐어. 나는 지금 너와 거래를 하고 있는 거야. 마인드 스포일러를 건네는 대신 너도 선물을 받았잖아?”
“무슨 선물을 주었다는…… 꽥!”
메르킨은 자신의 목 옆으로 날아와 박힌 성검 아론다이트를 질린 표정으로 흘겨봤다.
“나에게 아무 짓도 안 당하는 것. 내게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도 이렇게 얌전히 물러나진 않았을 거야. 운 좋은 줄 알아.”
그렇게 우린 신전을 빠져나와 다시 지상으로 나왔다.
웬일로 레나스가 내게 물었다.
“이대로 괜찮으신 겁니까, 관객님?”
“뭐가?”
“저자를 이대로 살려두면 위험요소가 관객님의 등 뒤에 남아있는 거니까요. 게다가 메르킨은 관객님께 막대한 정신적인 피해를 주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육체만큼이나 정신 건강은 소중하다고 배웠습니다.”
오토마타의 시선으로도 고문의 당사자가 시전자를 살려주는 것이 이상해 보였나 보다.
“원한을 푸는 것보다 골제를 사냥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복수를 포기한 건 아니야. 녀석은 내가 천공섬을 떠나고 난 뒤 혹독한 대가를 치를 테니.”
나는 아스티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청룡패웅검의 칼자루에 박힌 월장석이 대형 마법진을 그려냈다.
오래 걸리지 않아 결계가 완성되었다.
“누나, 방금 뭘 한 거야?”
“정확히 하루 뒤에 이 일대에 요란한 폭죽이 터질 거야. 아무리 멀리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비행이 가능한 존재라면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맞아. 용왕은 동족을 용아병으로 만들었다는 금기를 저지르는 바람에 추격당해 죽게 됐지. 메르킨의 죄도 용왕의 것에 뒤지지 않아.”
내일이면 메르킨은 분노한 용들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자신이 모시던 군주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아마 지금 내가 죽이지 않은 걸 원망할 정도로.
“태양이 머리 위에 떠올랐군.”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골제와 결판을 지으러 갈 때다.
*
용왕의 드래곤 레어는 내게 악몽의 장소였다.
이곳의 주인에게 패배해 붙잡힌 뒤 끔찍한 고문을 당했으니까.
광룡이 만들어낸 허상 속에서 헤맸던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좌절을 반복해서 체험했던 장소다.
하지만 주인이 바뀐 레어에 발을 내디디면서,
나는 이번만큼은 주저앉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골제 만세 만만세!”
“골제 만세 만만세!”
신전으로 향하는 광장에 무수한 해골 병사들이 당장이라도 출정하는 병사처럼 도열해 있었다.
머리 위로 창병기를 세운 그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얼핏 보면 군주의 동맹을 환영하는 것 같지만 기류가 달랐다.
‘더 이상 파천황의 이름에 만세를 붙이지 않는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해골 병사들이 나와 일행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전에 없던 경계심이 굳게 자리 잡아 있었다.
하룻밤 새 내가 무슨 일을 벌이고 다녔는지 교도관이 골제에게 언질을 줬을 것이다.
즉, 이제부터 만나게 될 골제는 더 이상 내게 발톱을 숨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어서 오게. 군단의 은인들을 한 번에 모시게 되어 기쁘군.”
골제의 태도는 이전과 다름없어 보였다. 양손을 활짝 편 채 우리를 맞이했다.
바로 옆 아스티나가 속삭였다.
‘진짜로 혼자 있네? 그 해골룡도 어디로 치워버리고.’
‘안심하지 마.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거니까.’
골제가 두른 붉은 망토에는 황금색 자수가 둘러져 있었다.
자수가 그리는 무늬는 용.
용의 신전을 정복한 자의 오만함이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맹약에 있어 마지막 절차를 밟을 시간이네.”
“그래. 당신이 불사자의 축복을 거두어가면, 나는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가겠지.”
“그리고 이 몸은 자네의 탈옥을 응원하면서 다음 차례를 준비할 테지.”
골제가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바닥에 망토가 스르륵 끌리는 걸 보면 그사이 길이마저 늘인 모양이다.
“불사자의 축복은 상호 동의하에 이뤄지고 그 축복을 거두는 것 또한 마찬가지. 시전자인 나는 축복의 해제에 동의하네. 자네 차례일세.”
“응. 나는 불사자의 축복 해제에…….”
잠시 이어나가던 말에 뜸을 들였다. 골제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서.
하지만 리치의 얼굴에선 아무런 전조도 읽어낼 수 없었다.
“동의하지 않겠다.”
“……진심인가? 설마 계속 해골 병사가 된 채로 다음 층에 오르겠다는 소린 아니겠지.”
“물론. 하루빨리 내 잘생긴 얼굴을 다시 거울에 비춰보고 싶거든.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어.”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가 골제의 좌측에 섰다. 캉이와 레나스는 그의 우측에.
자연스레 다섯 방위가 포위되었음에도 골제는 오직 내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할 일이란 게 뭔가?”
“당신으로 하여금 세계수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는 것. 위그드라실이 자연스럽게 수명을 다한 뒤 환수들의 영혼을 해방시키게 만들 거야.”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등반을 영원히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모르는가.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말을 들어줄 때까지 두들겨 팰 거다.”
“크하하하하하!”
골제의 웃음소리가 레어 전체를 울릴 정도였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 축복을 몸에 걸고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괜찮아. 여기에 싸울 줄 아는 게 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파아아아아앙!
제르비어스의 오메가 위프가 파공음을 내며 골제의 두개골을 노렸다.
하지만 마치 허상처럼 사라진 골제는 다음 순간 멀리 떨어진 자신의 옥좌에 앉아있었다.
처음으로 적의를 드러낸 골제 바르한의 살벌한 시선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거기 멍하니 서서 구경하게나. 자신의 선택이 친구들을 하나씩 죽음으로 몰고 가는 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