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만료되었습니다 (1)
골제를 쓰러트리기 위한 덫.
그것은 몹시 정교하고 섬세하게 작동하는 여러 개의 톱니바퀴를 필요로 했다.
준비할 시간도 촉박하기 그지없었다.
골제와의 회합 약속 시간은 정오. 그때까지 남은 시간은 4시간 남짓.
그 안에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쳐야 한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며 연습할 기회 따윈 없다.
캉이의 등 위에서 나는 자못 비장한 태세를 가다듬었다.
“그래서 어떻게 골제를 잡을 건데? 왜 우리한테 설명을 안 해주는 거야?”
“그러게. 용사 저놈은 항상 저게 문제다. 가끔은 집단지성의 힘을 믿고 겸손할 줄 알아야 하는데, 머리를 쓰는 일만 생기면 꼭 혼자서 끙끙대지.”
“맞아. 형아는 그게 문제야. 혼자 떨어지고 나서 더 심해진 것 같아.”
“슈바인 관객님이 해골이 되신 뒤 제가 바이오리듬을 체크하기 힘들어진 건 사실입니다. 과중한 정신적 압박을 받아 예민해지신 걸 수도 있지요.”
“내 요정술은 육체를 수복하는 것에 특화돼 있어. 어쩌면 고문의 후유증으로부터 아직 회복 못 해서 저러는 걸지도 몰라.”
문제는 뒤에서 정신 사납게 떠드는 녀석들이었다.
캉이의 등이 그리 넓지도 않거늘 설마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해서 소곤대는 건가?
나는 결국 버럭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으아, 시끄러! 말했잖아. 이번 상대는 6층 교도관이 찰싹 달라붙어서 지켜주는 녀석이라고. 함부로 내 계획을 입 밖으로 냈다가 그 교도관이 골제에게 언질이라도 주면 큰일이잖아!”
“…….”
“그리고 내가 언제 혼자서 끙끙댔다는 거야? 언제나 동의를 먼저 구하고! 충분한 상의를 한 끝에 작전을 짠단 말이야!”
“…….”
“게다가 이번엔 시간이 없잖아! 늘 그랬듯이 내 작전은 실패할 확률도 무척 크다고. 일이 잘못되면 안 된다고 스스로 마인드컨트롤을 계속해야 하는데 이렇게 등 뒤에서 초를 치면 되겠냐, 안 되겠냐!”
한바탕 쏟아붓고 나니 녀석들을 모두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고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반면에 영체로 따라오고 있는 비르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어대기만 했다.
“켈켈켈! 우리 방장이 구박당해서 혼쭐나는 건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는군. 너희들은 정말 사이가 화목하구나. 7번 방의 죄수로서 질투가 날 정도야. 화룡도를 떠나보냈을 땐 꼬마를 물가에 내보내는 심정이었는데 말이야.”
“누가 꼬마고 어디가 물가라는 거냐, 비르카 리케우톤.”
“참고로 그 표현은 내가 한 게 아니다. 뚠 아티르가 매번 그렇게 중얼거리지.”
아스티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뚠 아티르가 누구길래? 화룡도 친구야?”
“우리 방장 슈바인의 기둥서방이다.”
“뭐? 정말?”
아스티나가 화들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 무슨 망발이냐고.
“기둥서방이라니! 그 녀석은 수컷이라고!”
“동성끼리도 충분히 커플이 될 수 있지. 너는 해골이 되었으면서도 그런 편견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군, 켈켈.”
홧김에 비르카의 영체를 화룡도로 되돌려보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 녀석은 핵심 인원 중의 핵심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참는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것 같아, 형아.”
캉이가 내려선 곳은 백여 명의 해골 병사들이 모여 있는 야영지였다.
그곳에 내 첫 번째 타깃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찾았다.”
2군단장인 드라우카스.
익룡의 날개를 등에 단 비행형 데스나이트였다.
물론 저 녀석에게 개인적인 원한이나 앙금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내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걸 갖고 있을 뿐.
우리는 사구 뒷면에 숨어 한동안 상황을 지켜봤다.
드라우카스가 병사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틈을 타서 몰래 접근해 그의 소지품을 강탈하는 것이 내가 세운 계획이었다.
그를 위해서 레나스가 소음을 차단하는 연금술을 펴고, 아스티나는 군단장을 묶어둘 마법 결계를, 쉬고 있는 해골마들은 제르비어스가 정신지배로 접근을 막아서기로 했다.
그런데 비르카가 손사래를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건 너무 번거롭다, 슈바인. 골제만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민감한 녀석이 끼어들면 소란이 일어날 거야.”
“별달리 수가 없잖아?”
“절도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 있지. 내게 맡겨라.”
말릴 새도 없이 비르카는 사구 밑으로 뚜벅뚜벅 걸어 내려갔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부유도 쪽을 올려다보며 혹시 있을지 모를 용들의 습격을 경계하던 드라우카스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왔다.
사막을 뚜벅뚜벅 걸어오는 정체불명의 스켈레톤을 발견한 것이다.
타악.
드라우카스가 땅에 내려서며 비르카를 노려보았다.
“못 보던 자인데?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자신보다 덩치가 세 배는 큰 드라우카스 앞에서도 비르카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아 보였다.
그것이 영체라서인지 원래 담이 큰 녀석이어서인지는 모르겠다.
“…….”
비르카가 드라우카스에게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님에도 여기까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가까이에 있는 군단장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춘 것이다.
비르카의 말을 들은 드라우카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대체 뭐라고 한 건데?
그때 귀가 밝은 캉이가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 방법이 정말 통할까? 진짜로?”
“왜? 비르카가 뭐라고 했는데?”
캉이는 자신이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게 맞는 건지 혼란스러워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가진 걸…… 다 내놓으라고 했는데?”
모두가 뜨악 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필이면 사구에 숨어있는 것이 들킬 뻔할 정도로.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드라우카스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주머니를 주섬주섬 풀더니 모래 위에 툭 하고 내려놓은 것이다.
그러고는 비르카에게 꾸벅 절을 하고는 뒤뚱거리며 사라졌다.
“슈바인, 끝났어. 이제 와도 된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비르카에게 다가갔다.
비르카의 발아래엔 내 주먹보다 조금 작은 주머니에 녹색 가루가 담겨 있었다.
6층 만골사막에 서식하는 거대 전갈의 피를 굳혀 만든 가루였다.
정확히 내가 드라우카스로부터 훔치려는 물건이었다.
나는 의기양양해 있는 비르카에게 따져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야?”
“설득하지 않았다. 꼬셨을 뿐이지.”
“꼬셨다고?”
“가진 걸 내놓으면 내일 하루 동안 데이트를 해준다고 했거든.”
설명을 들을수록 더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통한다고?”
“동서고금을 통틀어 미인계는 무조건 통하는 법이지, 켈켈.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어? 나는 스켈레톤들 사이에서 추앙받을 정도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라니까.”
분명 화룡도에 면회를 신청한 뒤 채석장에서 비르카와 뚠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비르카는 이렇게 말하며 으쓱거렸었다.
‘들어 봐라. 왕년에 이 몸이 스켈레톤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말이지…….’
설마 그게 허풍이 아니라 진짜였다고?
어쩌면 이 녀석은 해골계의 스칼렛 요한슨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
비르카 리케우톤의 일장연설을 들으며 향한 곳은 격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막이었다.
아침 해를 받아 이글거리는 모래 위에서 나는 동료들과 멀찍이 떨어져 홀로 남아 있었다.
- 슈바인, 정말 거기서 그걸 쓸 생각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자살행위 같은데.
- 괜찮아, 아스티나. 모든 준비물 중에서 지금 내가 벌이려는 게 가장 위험도가 떨어지는 짓이니까.
- 난 모르겠어.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여기서 널 말리지 않으면 크게 후회하는 것 아닐까 두려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지 않았을 때 내가 뭘 해냈는지 봐 왔잖아. 한 번만 더 믿어봐.
동료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히 이해가 갔다.
내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다만 지켜봐달라고 당부할 수밖에.
“좋아, 그럼 녀석을 불러볼까.”
드라우카스에게서 넘겨받은 주머니를 하늘로 던졌다. 그리고 손에 든 아론다이트로 일격에 그것을 잘라냈다.
녹색 가루가 마치 독구름처럼 주변을 자욱하게 메웠다.
쿠르르르르릉.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사막을 진동시키며 한 생물이 내게로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해골 병사들 사이에서 재앙신으로 불리는 모래벌레.
뇌룡 간다르바조차 물리치지 못했던 거대생물이 내 앞에서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처음 마주했을 때 이빨이라고 생각한 기관이 주둥이 안쪽에서 공명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마음과 싸우면서,
나는 아론다이트를 인벤토리에 다시 집어넣었다.
‘다들 내가 무슨 꼴을 당하더라도 절대 다가오지 마. 알았지?’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내 계획은 이 모래벌레와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녀석을 내 편으로 꼬드기거나 길들이려는 것도 아니었다.
터어어어업!
바로 지금처럼 잡아먹히는 것이었으니까.
순식간에 주변이 새카맣게 변했다.
모래벌레에게는 혓바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 역할을 하는 기관이 따로 있었다.
축축한 촉수? 어쩌면 돌기?
그런 것들이 내 전신을 휘감고 미끄덩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일단 계획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모래벌레의 소화기관 중에서 더욱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첨벙첨벙.
충분히 깊게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때쯤,
나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에 업화의 쌍장을 일으켰다.
그러자 마치 동굴에서 손전등을 켠 것처럼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크구나.”
오른손을 횃불 삼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허리춤까지 잠겨오는 액체는 모래벌레의 위산이었다.
평범한 생물이었다면 이 위장에 떨어지는 순간 살갗과 내장이 순식간에 녹아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불사자의 축복이 걸린 해골 병사였고,
이 위산 속에서도 멀쩡히 걸어다닐 수 있었다.
“찾았다.”
마치 동산이라도 이룬 것처럼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둔덕.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백골들이었다.
인간의 형태뿐 아니라 아인종의 것으로 보이는 기묘한 형태를 가진 뼈들이 위산의 호수 곳곳에 폐기물처리장처럼 쌓여 있었다.
보통 아무리 흉폭한 육식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위산이 뼈를 녹일 수 있는 수준은 되지 못한다.
뼈마저 녹일 정도로 산도가 강력한 액체를 내분비 기관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럴 경우 위산이 소화물뿐만 아니라 위벽까지 녹여버릴 테니까.
이 압도적인 숫자의 뼈.
나는 그것을 서둘러 주워 담기 시작했다.
언젠가 들려올지 모른다고 생각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6층의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가 등반죄수를 주시합니다.]
[등반죄수가 벌이는 일련의 행위에 의구심을 표합니다.]
내가 자진해서 모래벌레의 입속으로 뛰어든 것, 그리고 이 무수히 많은 뼈들을 보고 행복해 하는 하는 것 전부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어디 마음껏 훔쳐보도록 해. 그래도 내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꿈에도 상상 못 할걸?”
6층의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
“내가 골제를 사냥하고 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층장을 고르는 너의 안목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