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뼈에 사무치도록 (4)
5층 빙설협곡의 층간 구역에서 나는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유해인 치아를 습득했다.
그때 분명 나는 텔레파시의 권능이 높은 단계로 진화했던 걸 기억한다.
[권능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가 한 단계 진화합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다른 층에 머무르는 친구와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연결된 친구는 반투명한 영체로 소환되어 교감할 수 있으며 그 어떤 물리력으로도 소환 중인 친구를 해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6층 만골사막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나는 정신없이 사건들에 휘말리는 입장이었다.
세계수의 뿌리가 생기를 흡수하는 바람에 생기는 상태 이상, 골제에게 받은 불사자의 축복, 용왕과 그 수하들의 추격, 붙잡힌 이후엔 광룡에게 받은 정신고문, 탈출 직후 호이란을 만났으며 곧바로 공층전에 휘말렸다.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뭐, 언제는 안 그랬겠느냐마는.
친구를 영체로 소환하는 권능.
그 영체는 아무런 물리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반대로 피해도 입지 않는다. 일종의 홀로그램 투사라고 해야 할까.
생사를 오가는 전투에는 사용할 일이 없는 권능이라고 생각해서 뇌리에서 잊고 있었는데,
그걸 이런 중요한 순간에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 친구 비르카를 이 천공섬에 소환하겠다.”
[권능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가 발휘됩니다. 당신의 친구 비르카 리케우톤의 영체가 소환됩니다. 유효시간은 48시간이며 종료 시 영체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시전자는 언제든 원할 때 소환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화룡도에 있었을 때도 비르카는 엉뚱한 녀석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에 저지를 행동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괴짜 스켈레톤.
이번에도 비르카는 마찬가지였다.
“비르카,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 너, 왜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있는 거야?”
모두의 눈앞에 번쩍하고 나타난 비르카는 바닥을 기면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감동의 상봉을 방해하는 요상한 포즈였다.
“우아아아악! 당신들 뭐야? ……나는 분명 침대 밑으로 굴러간 내 엉치뼈를 찾고 있었는데?”
비르카는 벼락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다.
“내가 지옥에 온 건가! 근데 이 감옥이 지옥이랑 뭐가 다르지? 잠깐만. 저 뿔에 보라색 피부…… 당신 전대 층장 베르비어스 아닙니까?”
제르비어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비르카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저렇게 가만히 놔두면 또 한참 동안 헛소리를 지껄이게 될지 모른다.
“비르카, 이쪽이야. 내가 너를 여기로 불렀어.”
“엇? 이 수려하기 짝이 없는 귀염둥이는 누구지. 그야말로 딱 내 취향의 비율을 가진 스켈레톤?”
나를 돌아본 비르카의 주변에서 갑자기 핑크빛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잊고 있었지.
이 녀석 여자였다는 걸.
“켈켈켈.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었군? 나를 만든 마도사께서 입이 닳도록 말했던 황금비율의 스켈레톤이 나 말고도 또 있었을 줄이야?”
“그거 지나친 자의식 과잉 아니냐, 비르카?”
“어라? 그런데 왜 내 친구 목소리를 따라하는 거지?”
“나야, 비르카. 너희 방장이었던 슈바인 스트링거라고.”
떨그럭.
비르카의 아래턱뼈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하여간에 놀랄 때도 언제나 만화적인 녀석이다.
*
“으흠, 그렇게 된 거로군. 우리의 방장 슈바인이 드디어 대마도사의 위대한 예술품인 나 비르카 리케우톤의 천재적인 안목과 따사로운 은총을 갈구하고 있다는 말인가.”
“과하게 너 편할 대로 해석한 것 같다만…… 일단 맞아. 태어날 때부터 스켈레톤이었던 네 도움이 필요해.”
단탈리온의 조언에 따라 비르카를 소환하기는 했으나 마음속 한구석엔 여전히 미심쩍음이 있었다.
상대는 최강 생물종이라는 용의 군대를 격파한 해골 군단. 그리고 그 군단을 만들어내고 지배하는 흑마법사다.
비르카는 최하층인 화룡도의 기준으로 따졌을 때도 뚠 아티르와 수위를 다툴 정도로 ‘허약한’ 죄수다.
과연 묘안을 낼 수 있을까? 차라리 빙결 마법을 쓰는 디멜을 소환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네 표정 다 읽힌다, 슈바인. 과연 이 허약한 친구를 믿어도 될까 하고 생각하고 있지?”
“허억, 어떻게?”
“말했잖아. 해골에 관해서라면 내가 전문가라니까. 네가 나와 함께 화룡도에 있을 땐 마법의 마자도 몰랐으니 내 식견을 모를 수밖에.”
비르카의 말에 따르면 녀석을 창조해낸 마도사의 수준은 그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수준의 네크로맨서였다고 한다.
리치인 골제와는 정반대의 길을 따라 정점에 오른 흑마법사였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의 지식을 모두 갖고 있지. 한 번 믿고 맡겨 보도록, 켈켈켈.”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나는 레나스가 보여주는 영상 기록을 비르카의 눈앞에 재생했다.
영상을 꼼꼼히 지켜보던 비르카는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골제라는 이 녀석, 리치인 척하지만 리치가 아니다.”
스켈레톤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연거푸 튀어나왔다.
“리치가 아니라고?”
“동일한 외양과 습성을 위장색으로 갖췄을 뿐 본질적으로 보면 드루이드에 가까워. 그것도 아주 변태적으로 타인의 생명력을 빼앗는 드루이드다. 사기꾼이지만 독창적으로 사기를 치는 예술가라고 볼 수도 있겠네.”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저자가 네게 불사자의 축복을 내려줬다고 했지? 그리고 다른 병사들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걸어 해골인 상태로 죽지 않는 상태로 변화시켰을 거야. 하지만 그건 생명을 넘겨받은 게 아니야. 한 생명체에게 허락된 ‘시간’을 양도받은 거다. 비슷해 보이지만 원리는 완전히 달라.”
비르카는 정지된 영상에서 내 등 뒤를 점한 골제를 가리켰다.
“이 싸움에서 네가 골제를 쓰러트릴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해. 저자가 공격당하기 직전 그동안 지팡이로 모아두었던 시간을 해방시킨 거다. 그렇게 풀려난 여분의 시간은 다른 시간을 폭력적으로 대체해버리지.”
“자기가 공격당하는 시간을…… 대체해버리는 거다?”
“올바르게 이해했군. 맞아. 공격을 피하거나 맞지 않았던 게 아니야. 맞았으나 그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대체해버린 거지.”
일종의 필름 편집이라고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은 필름에 기록된 장면들을 잘라서 이리저리 접붙이는 식으로 ‘편집’을 했다.
골제는 시간이라는 필름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컷은 지워내 버리고, 유리한 컷을 이어붙이는 식의 술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한 생명체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만큼 길 수 없어. 인간의 수명이 보통 백 년이라 치면 모두가 동일한 화살을 백 발 갖고 태어나는 셈. 그래서 이 녀석은 다른 존재로부터 그 시간을 꿔오는 거야. 자기 혼자만 화살을 천 발, 만 발을 채운 채 싸움에 나서는 거지. 그러면 궁수의 실력이 떨어지더라도 여간해선 이길 수 없는 강자가 된다. 물론 그렇게 편리하기만 한 술법이란 있을 수 없지. 분명 강력한 조건이 필요할 거다. 예를 들면…….”
“반드시 쌍방이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을 건다던가?”
“바로 그거야.”
그동안 찜찜하게 생각하거나 베일에 싸여 있던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골제가 사용하는 ‘불사자의 축복’.
말만 축복일 뿐 사실은 다른 생명체가 살아야 하는 시간을 양도받는 술법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 축복을 받으면 불사에 가까운 능력을 얻으면서도 ‘즉사에 이르는 일격’만큼은 무효로 돌릴 수 없는가. 골제의 술법이 편집할 틈이 없이 죽음이 고정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야 알겠어. 골제가 파천황 르팔타커스와는 무려 무승부를 일궈냈으면서도 용왕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고 되돌아가야 했는지. 세계수의 수심을 방어하는 호이란의 그림자를 어째서 극복할 수 없었는지.”
기본적으로 골제의 술법은 일대일 승부에서 거의 무적에 가깝다. 여분의 시간을 풀어내어 피해를 무효화시키니까.
문제는 상대가 까마득한 수명을 가진 용일 때다. 게다가 마법의 원류라 할 만큼 뛰어난 지성은 덤이고.
반드시 승부가 장기전으로 흘러갈 텐데 용왕에게는 자신을 도울 수하들이 잔뜩 있었다.
단신의 골제로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던 것이다.
호이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세계수가 복제해낸 그림자. 본래부터 육체가 죽은 상대다. 여분의 시간으로 ‘덧칠’하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고마워, 비르카. 네 말을 들으니 많은 것이 이해가 됐어. 아스티나가 직감적으로 파악했던 ‘시간’이라는 개념이 옳았던 거야.”
비르카의 설명에 홀린 듯 열중해 있던 아스티나는 순간 스켈레톤이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뭐, 뭐야? 나한테 무슨 볼일인데?”
“흐음. 내게는 목석같던 우리 방장이 충심을 다해 지키려고 하는 여자가 누구일지 궁금했는데. 너구나? 나는 살갗과 혈관이 있는 여자가 뭐가 그리 좋다고 화룡도에서 그 난리를 피웠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비르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슈바인, 정말로 인간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어? 해골도 편하고 좋잖아. 그 상태로 일 년만 있어 봐. 나 비르카 리케우톤이 얼마나 매혹적인 피조물인지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길걸?”
비르카의 징그러운 소리는 일축하고 우리는 골제를 쓰러트릴 방법에 대해 몰두했다.
제르비어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골제가 사용하는 술법의 원리를 알면 일이 쉬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난공불락인 건 마찬가지 아니냐? 네가 검을 찔러넣어도 그 시간을 덧칠해버린다는 거잖아.”
캉이는 다른 세력의 도움을 염두에 두자고 했다.
“세계수에 있는 환수들이 있잖아. 엄마에게 부탁해서 골제를 쓰러트려 달라고 하면?”
“위그드라실은 이제 자유의지가 없어. 부탁이 통하는 상대가 아닐 거야. 게다가 골제도 환수의 그림자가 까다로운 상대라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이 층에 올라오자마자 교도관의 도움을 받아 모래기둥으로 세계수를 감싸버린 거야.”
보면 볼수록 영리하고 치밀한 녀석이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전쟁과 등반을 준비해온 걸까.
“공격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암살을 시도한다면 어떨까.”
내 발상에 제동을 건 것은 아스티나였다.
“우리는 예전에 골제를 물러나게 했던 용왕과 상황이 달라. 당시의 골제는 혼자서 등반했지만 지금은 군단이 그의 곁에 있지. 충직한데다 공포를 모르는 강력한 군단이.”
“어찌어찌 개고생을 해서…… 군단의 눈을 속여 골제에게 접근한다면?”
“불가능할걸. 토니아의 말에 따르면 골제와 병사들은 신진대사가 멈춘 해골들이야. 잠을 잘 필요도 없고 질병에 걸리지도 않아. 암습을 허용할 빈틈이 없는 암살 대상인 거지. 게다가 그 정도로 뛰어난 흑마법사라면…… 자동 결계를 걸어놓지 않았을 리 없어.”
“자동 결계?”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각도에서의 공격이 들어왔을 때 자동으로 발동하는 마법이야. 당연히 보통의 마법사들은 쓸 수 없는 방식이야. 그런 걸 평생토록 유지하려면 엄청난 마력을 대가로 소모해야 하니까.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골제에게는 문제가 아니겠지.”
“그래, 골제의 병사는 수천이야. 그들의 남은 시간을 50년씩으로 계산해도 이십만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이 나와.”
이십만 년의 시간을 덧칠할 수 있는 마법사.
어떻게 공략해야 하지?
베일에 싸인 골제의 진면목을 알게 됐으나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우리들은 한층 강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에 상대가 얼마나 까다로운 적인지 파악하는 능력도 같이 상승해 버렸다.
오히려 비르카 리케우톤만이 내게 희망적인 소리를 했다.
“풀죽은 얼굴 하지 마라, 슈바인. 화룡도에서 매번 무시당했던 우리 7번 방이 마그마 볼에서 우승할 거라고 믿었던 죄수는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우리들도 마찬가지였어. 네가 성공할 거라 진심으로 믿었다기보단 워낙 의지가 강렬하니까 응원했을 뿐이야. 올쿠레 어르신은 네가 죽을 거라 믿고 수인병단의 장송곡 가사를 되짚고 있었어.”
“……그런 줄은 몰랐네.”
“켈켈켈. 너 스스로를 더 믿어보란 말이다. 그때에 비해 너는 훨씬 강해졌고 나나 뚠 아티르처럼 비실거리는 녀석들과 달리 강력한 동료들도 생겼잖아. 무엇보다 너는 목표가 정해지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녀석이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풍랑이 한순간 마법처럼 가라앉았다. 파문 하나 일지 않는 고요한 호수처럼.
그래.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마법을 사용하고 찌를 만한 빈틈이 없어 보인다고 주저앉아 있을 순 없다.
애초에 내 선언이 무엇이었는가.
골제를 죽이거나, 쓰러트린다거나, 굴복시키는 게 아니었다.
“맞아, 나는 놈을 사냥할 거라고 했지.”
사냥은 전투와 암살과는 다르다.
뛰어난 사냥꾼이라면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사냥감마저 거꾸러트릴 수 있다.
충분한 전략과 준비물이 있다면.
“가자. 구해야 할 준비물이 뭔지 깨달았어.”
내가 얼마나 집요하고 무모한 녀석인지,
골제의 뼈에 사무치도록 새겨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