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뼈에 사무치도록 (3)
얼어붙은 사막에 먼동이 튼다.
“아침은 일상을 준비하는 자들의 것이고, 새벽은 일상을 뒤엎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의 것이다.”
역광을 받고 있는 아스티나의 표정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가 한 말이야?”
“아빠가. 자고로 무사라면 아침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새벽에 깨어나야 한다고 늘 잔소리를 했었거든.”
“하긴. 운기조식의 효율도 새벽이 훨씬 좋다고 하셨었으니까.”
“엄마의 생각은 정반대였어. 정오에 느지막이 일어나도 아무 상관없다는 쪽. 마법사는 육체가 아니라 두뇌로 싸우는 사람들인데, 숙면을 취하지 않으면 피로감에 짓눌려 술식 계산에 실수가 일어날 수 있다고.”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새벽에 일어나 아빠와 운기조식을 하고, 다시 엄마 품으로 가서 낮잠을 잤지.”
아스티나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2층에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슈바인, 이렇게 전투가 없을 때면 나는 매번 ‘이 시간선’의 나에 대해서 생각해.”
내 눈앞의 아스티나는 블랙홀이 만들어낸 무한루프에 휘말려 절망을 반복하던 회귀자였다.
나를 만나 설공의 그림자를 쓰러트리기 전까지 그녀의 삶은 피와 상실로만 점철되었었다.
“무사히 태어났을까. 그 아이도 내가 겪어온 길을 그대로 걷게 될까? 아니면 엄마와 아빠가 미래에서 온 나를 만났다는 사실이 변수가 되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자라나게 될까.”
“…….”
“내가 다음 층에 올라가 천마 설공을 쓰러트리게 되면 그 아이는 해방될 거야. 엄마와 아빠도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이가 들은 그 아이의 미래를 함께 걸을 수 있겠지. 영문도 모른 채 습격자에게 살해당하는 대신.”
평소 아스티나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낭창하다. 하지만 지금은 낮게 가라앉아 있다.
그것은 사막의 모래 때문일까.
그녀가 드래곤의 브레스도 막아낼 수 있는 마법사라는 점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 다짐을 할 때면 내 마음은 충만해져. 내가 수만 번 회귀를 반복하면서 단 한 번도 지켜내지 못한 가족의 행복을 지킨다는 사명을 이루는 거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지켜낸 행복 속에 내가 없을 거라는 사실에 걷잡을 수 없는 질투도 생겨. 기나긴 시간 동안 내가 꿈꾸었던, 원래는 나도 갖고 있었던 그런 평화를 정작 나는 누릴 수 없다는 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나. 이런 생각에 빠지는 건 정상인 걸까? 응? 어떻게 생각해?”
아스티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관두었다.
지금의 나는 그녀에게 조금의 온기도 나누어줄 수가 없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위선자라고 느끼는 게 아니라?”
“아니. 너는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야. 그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의지와 힘도 가졌지.”
말을 이어나가면서도 공허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스티나 류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다. 자신이 행복을 누리던 시간선에서 강제로 축출당해 영겁을 떠돌다가 복수에 사로잡혀 버린 여인.
내가 아니라 이 우주의 누구라도 아스티나가 지금 느끼는 감정의 편린을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할지조차 의문이다.
“아스티나, 이제 한 번의 포탈만 넘어서면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는 복수의 대상을 직면하게 될 거야. 그러니 평소보다 마음이 어지러운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래, 네 말이 맞아. 설공을 죽이게 되면 이런 번뇌도 사라지겠지? 그때가 되면 비로소 나는 악몽에서 잠 못 이루다 새벽에 깨어나는 걸 멈추고…… 안락한 낮잠을 청할 수 있을 테니까.”
아스티나가 나를 향해 뒤돌아섰다.
내가 보아왔던 평소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니까 이제 설명해 줘. 어째서 8층 진입을 목전에 둔 지금에 와서…… 층장의 열쇠도 없고, 사무치는 원한도 없는 골제를 적대해야 하는지.”
*
우리가 발견한 부유도는 단순히 골제의 아지트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른 것이었다. 다른 부유도에 비해 어두운 토양을 갖고 있다는 점도 은신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이 부유도는 나, 그리고 제르비어스와 무관하지 않은 장소였다.
“토니아, 여기가 전부 고열에 녹아내린 흔적이라고?”
“응. 원래부터 단단한 재질이었기 때문에 암반이 붕괴되지 않을 수 있었던 모양이야. 불의 정령이 화신을 만들어내야만 이런 형태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그렇다는 건…… 화룡 이그니스, 용왕의 죽은 심복이 머물렀던 곳이겠군.”
화룡도에서 등반을 시작한 내가 우연하게도 화룡의 레어에 아지트를 만들었다는 건 무슨 운명의 농담일까.
상념에 오래 잡혀 있을 순 없었다.
신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폐허 속에서 나는 모두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골제는 6층 만골사막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계속 위로 올라갈 거야. 그것도 층장의 열쇠에 의존하지 않고.”
“그게 가능하냐, 용사야?”
“녀석이 이 층에 올라올 수 있었던 방법을 그대로 연장한다면.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있는 이곳의 주인이었던 화룡 이그니스의 죽음에서 시작되었어.”
세상에 인과 없이 단독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이그니스의 죽음이 용왕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은 죽은 죄수들의 영혼을 흡수하는 세계수를 제어하기 위해 화신체로 강림했다.
마치 야생동물 보호구역처럼 7층 천공섬은 인공 생태계가 조성되고 만 것이다.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서 이전처럼 양분을 끌어올 수 없게 된 세계수는 아래층인 6층 만골사막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골제 바르한에게는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을 것이다. 다시는 꿈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두 번째 기회가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해골 손가락으로 지면의 흙을 움켜잡았다.
“뿌리를 타고 올라와 한 층을 정복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다시 반복할 수도 있겠지.”
움켜쥔 흙을 놓은 채 이번에는 팔을 위로 뻗어 하늘을 향해 뻗었다. 이 단순한 동작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가 알아듣고 있었다.
“세계수의 가지를 더 높은 곳으로 뻗어…… 8층으로 향하는 사다리로 삼을 생각인 거야. 골제는 위그드라실을 자신의 공성추(攻城椎)로 다루려고 하고 있어.”
캉이의 귀가 쫑긋하고 세워졌다.
골제의 계획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수는 죽지 못하는 거잖아?”
“맞아. 생명력을 빼앗기는 저주로부터 죄수들을 지켜주었던 골제의 술법. 불사자의 축복을 세계수에 걸어 좀비처럼 이용할 생각이겠지.”
아스티나가 여기서 끼어들었다.
“그 불사자의 축복은 쌍방의 동의하에 이뤄진다고 하지 않았어?”
“한쪽에 지성과 의지가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베르단디를 만들어낸 뒤 위그드라실은 그것을 영원히 상실했어. 골제가 이런 상황까지 예견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분명 녀석에게는 유리한 판이 깔린 거야.”
세계수는 원래 나와 베르단디를 위층으로 올려보낸 후 서서히 죽음을 맞이할 계획이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지금껏 흡수해온 환수들의 영혼을 해방시켜 다시 윤회의 고리로 돌려보낼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골제가 세계수를 공성추로 이용하는 한 그 꿈은 박살 난 채 이뤄질 수 없다.
“안 돼. 엄마는 나와 약속했어. 언젠가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재회하자고. 그 해골 아저씨가 세계수를 움직이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6층에서 일어난 일이 8층에서 반복되겠지. 누군가 세계수의 수심에 접근한다면 호이란의 그림자와 싸워야 할 거고.”
8층에 있는 자들은 전원이 신격에 올라 있는 막강한 죄수들이다.
골제가 패배한다면 당연히 세계수 위그드라실도 멀쩡할 수 없다. 그 안에 붙잡혀 있는 영혼들마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이제 알겠지? 골제의 계획을 저지하지 않으면 캉이의 엄마는 윤회의 고리로 돌아갈 수 없어.”
이건 필요의 문제가 아니다.
골제가 8층을 상대로 다시 공층전을 벌이든 말든 우리가 등반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막아서는 건 아니니, 완전히 무시한 채 포탈을 소환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캉이의 소망은 짓밟힌다.
“나는 차마 그 길을 택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 너희들의 생각은 어때?”
오토마타인 레나스를 제외한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가 호이란과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
결의는 다져졌다.
문제는 실행 방법이다.
“좋아. 골제를 쓰러트린다 치고. 슈바인, 계획은 있는 거야? 그와 일전에 맞붙었을 때는 스치지도 못했다면서.”
“맞아.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경고는 사실이었어. 녀석의 술법이 어떤 원리로 행해지는지 알아내지도 못했지.”
“내가 그 대결을 지켜봤다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는 흑마법을 사용하는 리치고, 나는 흑마법에서 정점에 오른 마녀의 딸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그 순간을 너에게 보여주지? 제르비어스가 다시 나한테 정신 지배 마법을 걸면 어떨까?”
“아서라, 용사야. 말했듯 내 정신지배 마법은 동물을 다루는 것에 특화돼 있다. 그때는 네가 정신고문에 시달리다가 자폐적인 상태로 봉인돼 있을 때니까 가능했던 거야.”
모두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레나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관객님들. 잊고 계신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슈바인 관객님이 바르한 니칸드로스와 대결했을 때의 실황이라면 제 메모리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널 잊고 있었구나, 미안.”
“그럼 재생시켜 볼까요?”
레나스의 오른쪽 동공이 푸른색으로 변하더니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대형 스크린이 펼쳐진 것처럼 영상이 재생되었다.
금발벽안의 용사와 붉은 망토의 리치가 대치하고 있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저렇게 꼴사나울 데가 없었네.”
공격이 먹혀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골제는 이미 내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치 내 패배는 이미 확정되어 있고 나 자신은 그 각본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가 된 듯한 무력감.
아스티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골제에게 도전했던 장면을 예의주시했다.
뭔가 깨달은 바는 있었을까.
“완벽하게는 모르겠어. 하지만 대전제가 뭔지는 알 것 같은데.”
골제의 술법에 대해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내게는 희소식이었다.
“그게 뭔데?”
“엄마의 마도제국학파는 중력 마법에서 시간과 공간을 함께 다루고 있어. 보통의 사람들은 그 두 개를 따로 떨어트려 놓고 생각하지만 중력 마법사가 연구를 거듭하다 보면 결국 ‘시공간’은 같은 개념이라는 것에 도달하게 되거든.”
아스티나는 영상 속의 골제를 짚었다.
“하지만 골제의 술식은 그와 정반대야. 오히려 철저하게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킨 후 지엽적인 형태로 시간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아.”
“나와 싸울 때 시간을 멈춘 다음…… 움직였다는 거야?”
“바로 그걸 확신하지 못하겠어. 내가 대전제만 알겠다고 한 이유도 그거야. 그가 너와 싸웠을 때 마법진을 발동한 걸 본 적이 있어?”
“아니. 그냥 맨몸처럼 싸웠지.”
“그건 불가능해. 너 정도의 전사를 마법사가 육탄전으로 제압한다는 건 술법을 구사하지 않고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반드시 공간에 마법진이 그려져야 해. 아니면 캉이의 만다라처럼 다른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뭔가 발견돼야 한다는 거지.”
“어쩌면…….”
“그래. 나는 골제가 ‘마법진을 그렸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마법진을 그린 시간 자체가 모종의 원리에 의해 ‘삭제’된 거야.”
하지만 레나스가 채집한 기록은 겉으로 드러난 순간을 녹화한 것을 넘어설 수 없었다.
나는 막다른 벽에 부딪히면 소환하는 또 다른 친구를 꺼내었다.
- 단탈리온, 네 생각은 어때? 골제의 술법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어?
- 용사님이 대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젠장. 이제 내 마력이 꽤 높아졌는데도?”
- 정보제한이 걸려 있는 거지요. 대신에 정면돌파만 답이 있는 건 아닙니다, 용사님. 용사님의 다른 친구분에게 조언을 구해보는 건 어떨까요?
“누구를 말하는 거야? 아스티나보다 더 흑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라면 참월의 마녀?”
- 아닙니다. 해골의 일은 해골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탈리온이 적은 이름은 내 예상과는 완전히 빗나간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골제와 비교한다면 터무니없이 전투력이 약한 존재.
기묘한 웃음소리를 가진 화룡도 7번 방의 소중한 친구.
“비르카 리케우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