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뼈에 사무치도록 (2)
[죄수 게브라둠 이그나시오가 사망했음을 알립니다.]
용왕에게 성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공식적인 사망이 선고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름 위에 떠오른 부유도의 집합체였던 천공섬.
용들의 둥지로 포화를 이루었던 7층은 이제 모래와 사막으로 뒤덮이게 됐다.
“끝났군.”
스켈레토마키아는 종식됐다.
6층과 7층의 공층전은 습격 진영인 만골사막 해골 군단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쟁의 승리에는 전리품이 따라오게 돼 있다.
골제는 가장 달콤한 복수를 이뤘다.
푸르가토리움의 역사가 생긴 이래 허락되지 않은 두 번째 등반을 달성하는 최초의 죄수가 되었다.
나는 어땠나.
캉이의 어머니인 호이란을 만났고 이 천공섬에서 기나긴 시간을 버텨온 그녀와 세계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위그드라실의 포자에서 태어난 베르단디라는 꽃을 친구로 삼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두 층의 열쇠를 쟁취했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왜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냐, 용사야?”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제르비어스의 말이었다.
“나 지금 해골 상태라서 표정이 없는걸. 넘겨짚지 마라.”
“풍기는 느낌이라는 게 있지. 내 눈은 못 속인다.”
나는 밤의 사막 위에서 거대한 부유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용왕의 드래곤 레어였던 호화로운 부유도엔 어느새 사막과 연결된 다리가 증축돼 있었다.
해골 군단을 지휘하는 거대한 덩치와 한 쌍의 뼈날개를 보아하니 2군단장 드라우카스인 것 같았다.
“말해 봐라, 용사야. 뭐가 마음에 걸리는 거야?”
“승전보가 없어. 축제도 없고. 이제 막 위대한 승리를 거둔 군단의 모습처럼 보이질 않아.”
“해골의 생리를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나는 폭렬마왕의 순진무구한 추측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생각엔 아니야. 저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저 삼엄한 경계가 설명이 안 돼.”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용들은 골제의 영역을 인정해 변방으로 물러났다.
용왕을 추격하다가 목숨을 잃은 죄수들도 있었다.
용은 더 이상 해골 군단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군단은 지금 어떤 세력을 ‘주적’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이럴 땐 나완 다른 시각을 가진 친구의 의견이 간절했다. 때마침 아스티나가 모닥불에서 떨어져나와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다 듣고 있었어. 엿들었다고 생각한다면 미안.”
“어떻게 생각해?”
“네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슈바인. 나는 이번 싸움에서 골제의 군단이 어떻게 싸우는지 옆에서 똑똑히 지켜봤거든. 그건 삼월초원의 삼촌들과 이모들이 사용하는 진법과도 완전히 달랐어. 마치 개체가 잔뜩 모여서 집단을 능가하는…….”
“곤충. 곤충들이 그렇게 싸우지.”
“맞아. 대수림의 야수들도 떼를 이뤄서 우리를 사냥하려 했지만 저들처럼 일사불란하진 않았으니까.”
자신들보다 강한 적을 섬멸하기 위한 전법을 그들은 호흡처럼 익히고 있는 것이다.
완벽한 지휘체계와 지독한 반복으로 이뤄낸 수준일 것이다. 어지간한 공격으론 병사를 죽일 수 없다는 점도 무시무시하다.
죄수들의 능력치가 성장할 수 없다는 감옥의 규제를 농락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저들이 노리고 있는 게 너는 아닐까?”
아스티나의 걱정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 많았으니까.
“이제 와서 골제가 나를 적대할 이유가 없어. 만약 그랬다면 내게 용왕의 열쇠를 넘기지 않고 공격했으면 될 일이야.”
“네가 가진 기원검을 탐내고 있는 거라면?”
“그것도 말이 안 돼. 애초에 골제는 파천황이 살아 있을 때조차 자신의 층에 기원검의 파편을 두고 가는 것을 거부했어. 세계수가 품고 있던 파편에도 관심이 없었고. 적어도 기원검은 그를 움직이는 동인이 아닐 거야.”
“그럼 내일 해가 뜨면 우린 8층으로 건너가면 되는 거 아니야? 골제에게 너를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려달라고 요구하면 되잖아.”
“그렇지. 그러면 되는 문제지.”
골제와 내 동맹이 유효한 시점은 용왕을 쓰러트리고 내가 7층의 열쇠를 갖는 것, 그리고 그가 내게 건 불사자의 축복을 해제하는 순간까지였다.
그 이전에 서로를 공격하면 우리는 소멸된다.
서로를 믿기 위한 자구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수는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지.’
분명 위그드라실의 영혼은 내게 말했다.
- 조심하라. 바르한은 반드시 널 배신할 것이다.
세계수가 그 순간에 내게 거짓을 고했을 것 같지는 않다. 위그드라실은 분명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골제가 내게 어떤 행동을 취할 순간은 나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린 직후가 될 거라는 뜻일까.
그때, 모닥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캉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기분 나쁜 냄새가 나.”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캉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진명을 받아 각성하기 전에도 캉이의 후각은 우리 중에서 가장 탐지력이 뛰어났다. 만철도시에서 오토마타들을 추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녀석의 코 덕분이었으니까.
“캉이야, 어떤 냄새인데?”
“폭탄이 터질 때 맡을 수 있는 매캐한 냄새.”
화약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전투도 끝난 마당에 어디에서 화약의 냄새가 난다는 걸까.
잠시 후, 대답은 어두운 지평선 너머에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그것은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거대한 덩치를 갖고 있었다.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용.
우리가 그 용의 형체를 판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닥불의 불빛 때문이 아니었다.
용에게는 비늘과 살갗이 없었다. 오직 뼈로만 이뤄진 채 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르비어스가 그 용의 정체를 알아봤다.
“폭룡 발카드. 내가 물리쳤던 녀석이다.”
“……죽이지 않았던 거지?”
“그래. 용왕이 쓰러진 시점에 저항을 포기하고 내게 항복했거든.”
천공섬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세 용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폭룡 발카드. 그가 스켈레탈 드래곤(Skeletal Dragon)이 되어 날아오고 있었다.
“머리에 새 주인을 올려놓고 있군.”
발카드의 두개골 위엔 붉은 점이 올라가 있었다.
골제 바르한 니칸드로스.
그가 불사자의 축복을 발카드에게 주었다. 강제로 상대를 해골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호동의를 반드시 필요로 하니까.
발카드는 자신의 의지로 골제 밑에 들어간 것이다.
용왕의 심복이었으니 보호막이 필요하다고 여긴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해골 군단에 용까지 합류했으니…… 골제는 더더욱 무서울 것이 없겠군.”
제르비어스의 담담한 말에 토니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보고만 있어도 불쾌해. 생명을 저렇게 농락하는 건 정령의 세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토니아는 샴쌍둥이었던 크로톤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민을 끝내고 모두에게 말했다.
“부탁이 있어. 지금 당장 여기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부유도를 찾아봐. 거기에 몸을 숨겨줬으면 좋겠어.”
“너는?”
아스티나의 질문에 나는 새 주인을 맞이한 레어를 가리켰다.
“골제를 만나서 녀석의 꿍꿍이를 떠볼 생각이야.”
“너 혼자서? 요즘 들어 자꾸 혼자 행동하려는 순간이 많아졌다는 건 내 착각일까? 응?”
아스티나의 부리부리한 눈이 코앞으로 들이밀어졌다.
“말했잖아. 골제는 나를 건드릴 수 없어. 그건 교도관이 공증한 거야.”
“하지만 그 부하들에겐 아니겠지.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너를 묶어두려 들지도 몰라.”
“내겐 순간이동이 있잖아. 여차하면 몸을 빼낼 수 있어. 용왕에게 이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던 건 너희가 다른 층에 있었기 때문이고.”
“하지만…….”
“해골 상태인 나를 없애려면 일격에 죽여야 하는데, 그건 게브라둠도 못한 일이야. 걱정하지 마.”
*
“파천황 만세 만만세!”
신전 안에 들어서자 나를 알아본 군단의 해골 병사들이 주먹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했다.
그들에게 있어 나 또한 전쟁 영웅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슈바인 스트링거, 만남은 내일 아침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뭔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골제 바르한은 거대한 스켈레탈 드래곤의 앞발에 걸터앉아 있었다.
마치 그것이 급조한 옥좌라도 되는 것처럼.
“내가 인내심이 그렇게 대단치 못해서. 당신과 차분히 얘기를 나눌 시간이 부족했잖아?”
나는 골제와의 거리를 30미터 앞둔 지점에서 멈춰 섰다.
골제는 지팡이에 삐딱하게 손을 얹고는 물었다.
“동료들을 놔두고 혼자 왔다는 건, 아직 내 축복을 거두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응. 어디까지나 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자리다.”
“받아들이지. 동맹의 마지막 날 밤에 내게 물을 것이란 뭐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파고들기로 했다.
“당신은 이제 복수를 이뤘어. 용왕은 죽었고 7층 천공섬의 주인은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이지.”
“글쎄. 이 층의 층장은 현재 열쇠를 갖고 있는 자네일 텐데.”
“나는 등반죄수니까. 내일이면 나와 친구들은 이 층에 존재하지도 않을 거야. 서로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빼도록 하자고.”
“좋아. 자네의 말이 맞아. 나는 복수를 이뤘다네.”
“하지만 조금도 기뻐보이지 않는걸? 당신뿐만 아니라 군단 전체가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아 있지 않아? 이제 막 숙원을 달성한 부대의 모습이라고는 어울리지 않아.”
골제의 어깨가 들썩였다.
웃고 있는 것이다.
“그야 그럴 수밖에. 우리의 숙원은 아직 절반도 달성되지 못했으니까.”
“절반?”
웃음을 멈춘 골제는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우리 군단은 멈추지 않고 올라갈 것이다. 당연히 다음 목표는 8층, 나아가서는 꼭대기인 9층이 되겠지.”
“당신에겐 층장의 열쇠가 없잖아. 설마 내 축복을 거둬간 다음 승부를 벌이자는 건가?”
“아니야. 그런 무뢰배 같은 짓은 하지 않아. 나는 그 증오스러운 용왕 게브라둠과 싸울 때조차 정정당당히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나. 자네의 등반 여정을 방해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다네. 나를 도와준 우정을 생각하면 오히려 탈옥에 성공하길 바라고 있어.”
골제는 분리시켜 놓고 있었다.
내 등반과 자신의 등반을.
그렇기 때문에 층장의 열쇠에는 미련이 없었던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감옥은 당신의 재등반을 허락해주지 않을 텐데. 어떻게 다음 층인 8층으로 갈 생각이지?”
“미안하지만 그걸 자네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는 것 같구만. 지금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교도관이 들을 테고, 내가 고안한 방법을 막을 수단을 준비할지도 모르니까. 그건 달갑지 않아.”
“괜찮아.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 어떤 건지 대충 알 것 같거든.”
골제가 발카드의 앞발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역시 파천황이 고른 죄수답군.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아.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 계획이 이 감옥에 통할 것 같나.”
거기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래. 먹힐 거라고 생각해. 아니, 그 방법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게 맞겠지.”
“의문은 풀렸나.”
“풀렸어. 내일 아침에 친구들과 함께 다시 찾아오겠어.”
“그래. 그렇다면 작별의 인사는 내일로 미뤄두지. 병사들이 자넬 배웅해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부유도를 빠져나왔다.
천마어기행공으로 날아오르자 거대한 부유도의 전경이 발아래를 가득 채웠다.
용왕의 둥지였던 곳,
나를 가두고 정신고문에 빠트렸던 장소가 이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래. 당신의 계획은 성공할 거야.”
내가 막지 않는다면 말이지.
사막의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나는 아스티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 볼일은 끝났어. 지금 돌아가.
- 무사해? 아무 일 없었어?
- 응. 원했던 대답은 얻어냈어. 미안하지만…… 너희들에게 조금 수고를 해달라고 부탁해야겠는데.
- 무슨 부탁?
나는 어느새 멀어져 작은 점이 되어 있는 부유도를 뒤돌아봤다.
- 골제를 사냥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