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뼈에 사무치도록 (1)
“어떻게, 이런 일이…….”
목의 절반 이상이 터져나갔는데도 용왕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그녀의 혀끝에서 맴돌뿐 소리로 맺어지지 못했다.
“게브라둠, 너는 용의 본질이 질투라고 말했지.”
나는 아론다이트를 들어 그녀의 명치에서 빛나고 있는 드래곤하트를 겨누었다.
“그게 너의 사인이야. 품은 것을 돌보지 않고 탐욕에 미친 것이.”
콰지익!
성검이 용의 심장을 꿰뚫자 한 차례 둔중한 울림과 함께 용왕의 신체는 재가 되어 날아갔다.
[전투로 인해 7층장 게브라둠이 사망하였습니다.]
[7층의 열쇠가 주인을 잃었으므로 교도관에게 귀속됩니다.]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 시련을 관리할 의사를 포기했으므로 열쇠는 자유가 됩니다.]
등반의 열망을 가진 자를 유혹하는 붉은 빛.
잿더미 위에서 열쇠가 떠올랐다.
내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골제가 허공을 미끄러지며 다가왔다.
“왜 망설이는 거지, 슈바인 스트링거? 그 열쇠는 자네 몫이다.”
“……너무 쉬운 것 같아서.”
“7층의 통치자를 사살하는 일을 어찌 쉬웠다고 말하는가. 방금의 싸움도 치열하기 짝이 없었건만.”
골제는 애써 말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쉽다’고 말한 것은 용왕에게서 열쇠를 빼앗는 과정을 평가한 것이 아니다. 골제가 내게 순순히 양보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뜻한 것이다.
그는 이미 내게 6층의 열쇠를 넘겨준 전례까지 있다.
“일전에 말했듯 나는 열쇠에 미련이 없다네. 자네에게 그걸 빼앗으려 드는 순간 교도관을 공증으로 세운 우리의 동맹을 어기는 것이기도 하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열쇠를 자네가 빨리 갈무리해주길 바라고 있어. 실수로 접촉했다가 소멸당하고 싶지 않거든.”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가 열쇠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까 걱정되는 것은 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띠링!
[7층의 열쇠를 얻었습니다.]
붉은 반점이 일곱 개가 되었다.
이제 탈옥을 위해 남은 열쇠는 단 두 개.
[메인퀘스트 #2. ‘열쇠 수집’을 7/9 완료하였습니다.]
[6번째 열쇠에 대한 정산도 함께 이뤄집니다.]
[보상을 고를 수 있게 됩니다. 스탯 두 개의 x2 효과, 혹은 스탯 두 개의 한계돌파]
6층과 7층의 열쇠를 얻은 것에 대한 보상.
나는 아직 한계에 부딪혀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두 개의 스탯을 지정했다.
[HP 수치의 한계가 사라집니다.]
[민첩 수치의 한계가 사라집니다.]
[그동안 제한되어 있던 성장 수치가 반영됩니다.]
[HP의 한계치가 3,900 오릅니다.]
[민첩 수치의 한계치가 180 오릅니다.]
레벨업 효과로 체력과 마력이 순식간에 최고치로 회복되면서 전신에 활력이 돌았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지켜본 캉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리치인 골제는 경탄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대단하군. 열쇠를 얻을 때마다 능력이 성장하는 죄수라니. 교도관장이 자네의 배후에 있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던가. 자네의 뼈를 모두 마디마디 뜯어내서 실험해보고 싶지만…… 허락해주지 않겠지?”
“어리석은 질문이야. 나는 계속 등반을 해야 하니까.”
골제의 지팡이는 잠잠했다.
말은 살벌하게 건네왔어도 그에게선 아무런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장이 멈춘 자신과 계속 강해질 수 있는 내 차이에 대해 미약한 탄식만 느껴졌을 뿐.
나는 조심스럽게 내 상태창을 확인했다.
[HP: 13,899]
[MP: 14,199]
[근력: 1,485]
[민첩: 1,249]
단순 수치만으로도 천마 류운학의 경지보다 두 배에 달하는 스탯을 얻게 되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두 명.
8층에 있을 천마 설공과 뇌신 지드였다.
‘지금이라면 결코 닿지 못할 것 같았던 둘과도 제대로 된 승부를 겨룰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
층장이 쓰러지자 7층 천공섬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용아병은 이미 궤멸 상태였고 대세의 흐름은 일방적인 소모전으로 흐르고 있었다.
친구들이 귓속말을 통해 자신들의 승리를 알려왔다.
- 폭룡 발카드가 항복했다.
- 잘했다, 제르비어스. 대단한데?
-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변신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는 좀 고민해봐야겠는데.
- 심리적인 족쇄가 해결되면 되지 않을까? 캉이가 되살아났어. 지금 내 옆에 있지.
- 그게 사실이냐? 엇. 몸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오고 있다!
정직하기 짝이 없는 녀석 같으니.
캉이의 죽음이 트리거가 되었으니 그 문제가 해결되자 다행히 변신을 해제하는 감각을 알아챈 모양이다.
아스티나와 레나스 역시 무사했다.
- 뇌룡 간다르바는 죽은 것 같아. 그 모래벌레가 집어삼킨 뒤로 다시 올라오지 못했거든.
- 다친 곳은 없어?
- 안 다친 곳이 없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토니아가 있어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어. 레나스도 날 도와줬고.
골제는 부하들과 소통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 모양인지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승전보를 전달받았다.
“결착이 났군, 슈바인 스트링거.”
“아직 용들이 남아 있지 않아?”
“구심점을 잃은 용들은 우리 군단의 상대가 되질 못 하지. 남은 것은 전후처리뿐…….”
그때였다.
골제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내 갑옷 안에 넣어두었던 세계수의 꽃잎이 빛을 뿜어냈다.
[베르단디가 당신에게 위협을 경고합니다.]
이 꽃잎에겐 아무런 전투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감지하지 못한 어떤 신호를 읽어냈다고 하는 것이다.
베르단디는 영혼을 흡수하는 병기였던 위그드라실에서 피어난 자손.
뭔가를 느꼈다면 그것은 ‘영혼’의 형태였을 것이다.
파아아아아앗!
열역학 제2법칙이 붕괴되었다.
역전될 수 없는 엔트로피가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되돌려진다.
잿더미가 공중에서 다시 응집되더니 용왕 게브라둠의 거대한 형체를 빚어냈다.
“이대로 끝난 줄 알았더냐?”
환상이나 속임수가 아니었다.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용왕의 존재감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진짜였다.
“분명히 죽어서…… 열쇠까지 토해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난 거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용왕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는 캉이의 입에서 나왔다.
“엄마의 꼬리. 그걸 갖고 있어서 부활한 거야.”
용왕은 오래전 호이란에게서 두 개의 꼬리를 강탈했다.
즉, 용왕 게브라둠을 소멸시키려면 앞으로 두 번 더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골제가 곤란하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군.”
“크하하하! 놀랐느냐, 바르한 니칸드로스! 죽음에 기생해 연명하고 있는 무지렁이야!”
용왕 주변으로 다시 막대한 마력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드래곤하트 또한 내가 깨트렸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멀쩡했다.
그런데 골제의 태도가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용왕이여, 내가 말한 예상외의 일은 당신의 부활이 아니었다.”
“……아니라면?”
“부활한 당신이 이런 꼴을 당하게 될 줄 예상 못 했던 거지.”
꽈아아아아아앙!
골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왕의 몸에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원거리에서의 포격.
그것도 그 숫자가 수십에 달한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용왕은 큰 충격에 비틀거렸다. 자신을 노린 적의 정체를 알고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너희들이?”
용왕을 포위하고 있는 것은 오십 마리가 넘는 용의 무리였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으로 컨디션이 멀쩡해 보이는 용은 한 마리도 없었으나 용왕을 노려보는 적의만큼은 매서웠다.
용왕의 호통은 사막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뭐 하는 짓들이냐! 지금 누구를 공격해야 하는지 망각한 것이냐! 정신 나간 것들아.”
“우리의 정신은 멀쩡하다, 게브라둠. 전쟁을 패배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중일 뿐.”
같은 용에게서 이름을 불렸다.
‘용왕이시여’ 같은 존칭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그 태도 또한 경멸에 가까웠다.
바로 그 점이 용왕을 더욱 격분시키는 듯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층장인 내가 여전히 살아 있거늘! 당장 저 해골들을 쓸어버려도 모자랄 판에…….”
“당신은 이제 층장이 아니다. 열쇠를 잃어버렸으니까. 우리의 우두머리조차 아니지. 폭룡과 뇌룡을 불러보라. 아마 오지 못할 테지만.”
용들이 용왕을 향한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그들의 입가에 불길이 일렁이는 것을 보니 다시 한번 브레스의 포화를 쏟아부을 기세였다.
“이런 하극상이 용납될 것 같으냐? 감히 너희들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가!”
덧없는 발악이었다.
공포로 천공섬을 지배했던 용왕이었으나 단신으로 오십의 용을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군주의 실각이 이렇게 이뤄지는구나.’
쿠데타를 원하는 용들은 권력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들이 바라는 핏값은 다른 곳에 있었다.
“먼저 금기를 어긴 것은 당신이다, 게브라둠. 탐욕 때문에 다른 죄수들을 척살해 용아병을 만들어낸 죄. 그 대가를 달게 받으라!”
“으아아아아! 닥쳐랏!”
순간 하늘이 뒤집혔다.
용왕이 순식간에 최대한의 전력을 발휘해 용들을 향해 브레스를 퍼부은 것이다.
하지만 배후에서 덤벼드는 용들의 습격마저 피해내지는 못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두둑 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비가 아니었다.
“피?”
캉이의 새하얀 털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격전을 벌이는 용들의 피가 만천화우처럼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씹어먹을 것들이!”
일순간 마력장을 폭발시켜 몸을 빼낸 용왕이 하늘 저편을 향해 달아났다.
지금 놓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다른 용들이 그 뒤를 바싹 추격했다.
골제가 해골마를 소환한 뒤 그 위에 올라탔다.
“어쩔 생각이야?”
“용왕의 최후를 지켜봐야지. 내버려 둬도 살아남진 못할 테지만 후환을 남길 생각은 없다네.”
“당신도 집요하군.”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불사자의 축복을 해제해줘야 할 테지만…… 잠시만 기다려주겠나?”
그 말을 끝으로 골제 바르한은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용왕이 날아간 쪽으로 향했다.
패잔병의 끝에 남은 것은 비참한 최후뿐이다.
“형아, 우리도 쫓아가야 하지 않을까?”
캉이의 눈빛에는 아직 용왕에 대한 증오가 잔불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면서 달랬다.
“지금은 친구들을 추스르는 게 먼저야. 열쇠를 모두 얻었으니 우리가 이 천공섬에서 해야 할 일은 다 마무리된 거니까.”
나는 용왕과 골제가 사라진 쪽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여전히 세계수 전체를 휘감고 있는 불길한 모래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캉이에게 한 말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퀘스트도, 시련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7층에서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골제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저 모래기둥이 감싸고 있는 세계수처럼,
골제의 심중에 있는 진짜 목적을 파헤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