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호심멸룡 (3)
[기원검 네메시스가 새로운 파편을 흡수했습니다.]
[파편을 양도한 죄수 위그드라실은 이 순간부로 지각을 잃고 본래의 병기로 돌아갈 것입니다.]
[기원검의 남은 파편은 이제 단 하나뿐입니다.]
*
“엄마는…… 여기서 죽는다고요?”
“예정된 일이다. 작별을 슬퍼 말거라, 아들아.”
현실로 돌아오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캉이를 부둥켜안고 있는 호이란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교도관의 설명을 통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언질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위그드라실의 선택을 존중한다, 등반죄수여. 이 층에서 죽음을 맞이한 후 세계수의 병사가 된 죄수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 응당한 일이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따라와야 하는 것이야.”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것.
하지만 캉이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엄마의 존재를 알자마자 불과 하루 만에 작별을 해야 하는 거니까.
호이란은 이런 상황을 아주 오래전부터 그려 온 자답게 차분했다.
“이 어미에겐 이제 여한이 없단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종말을 유예했을 뿐. 호월랑아, 이 우주가 사멸하지 않는 한 우린 다른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응. 그때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났으면 좋겠어.”
두 구미호는 잠시동안 그렇게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마주 펼쳐진 열여덟 개의 꼬리가 마치 만개한 수선화 두 송이를 보는 듯했다.
마음 같아선 며칠 정도 저렇게 놔두고 싶었으나 상황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호이란?”
“세계수는 이제 뿌리부터 죽어갈 것이다. 뿌리가 생명력을 다하면 다음은 줄기의 차례가 될 터. 차례대로 영혼들이 해방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마지막 차례는 수심에 얽매여 있는 호이란이다.
“나무는 워낙 거대하니 단말마를 내뱉는 순간 또한 평범한 생명체와는 다를 거다. 나흘 이상은 걸릴 터. 그러니 지금은 너희 친구들에게 돌아가라. 아직 매듭짓지 못한 싸움이 있지 않느냐.”
호이란의 해방에도 며칠의 유예가 주어진 것인가.
신속하게 용왕을 쓰러트린다면 호이란의 배웅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감사했습니다, 호이란.”
그녀는 캉이와 나 둘 모두를 살렸다.
진심을 다한 감사에 구미호는 마주 웃어 주었다.
*
수심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졌다.
세계수는 자신의 가지를 터주어 바깥으로 향하는 일직선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캉이의 등에 올라타 쾌속으로 그 길을 질주했다.
그러자 곧 매캐한 모래바람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세계수 전체를 감싸고 있는 흑마법 결계.
“여기서 이멜타스 형아가 죽은 거지?”
“……그래.”
캉이는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거대한 수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코를 들이대며 몇 번 킁킁대더니 하늘을 향해 한 번 목놓아 울었다.
가족을 떠나보낸 짐승의 의식일지도 모른다.
“여길 뚫고 가야 해.”
나 혼자라면 언제든지 원하는 친구 곁으로 날아갈 수 있다. 순간이동의 권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캉이가 이곳에 남겨지게 된다. 소환의 권능으로 캉이를 이 층에 불러온 게 아직 하루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으니까.”
진명을 되찾고 진정한 구미호로 성장한 캉이는 자신감을 보였다.
곧 캉이의 허리둘레를 회전하는 만다라가 생성되었다.
그 숫자는 총 세 개.
아직 호이란의 만다라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요력이 느껴졌다.
[여우트림 극(極)]
세 개의 만다라에서 동시에 발사된 붉은 광선포가 모래결계를 때렸다.
그러자 구미호 한 마리가 뛰어들 수 있을 만큼의 균열이 생성되었다.
“간다, 꽉 잡아!”
캉이의 뒷발이 사막을 걷어찼다.
이무기인 이멜타스조차 이 모래폭풍을 돌파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다 소진해야 했다.
출구까지 절반 정도 남았을 때 결계는 수복을 위해 다시 우리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접촉하는 순간 생명체를 공격하는 죽음의 모래다.
다음 순간, 나는 캉이에게 여우로서의 기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떠올리게 됐다. 캉이는 대수림에서 둥지를 만들어낸 건축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땅굴 파기 Lv. Max]
모래폭풍이 나와 캉이를 덮치기 직전,
구미호의 앞발에 요력이 모여 지면을 파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시야가 새카매지고 마치 굴착기의 드릴이 된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푸하아아아악!
다시 바깥으로 뛰쳐나온 캉이가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뒤를 돌아보자 모래폭풍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조금의 피해도 없이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누구한테 먼저 갈 생각이야, 형아?”
사막 위는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내가 떠나기 전에는 그래도 가지런한 두 진영의 충돌이라 평원의 회전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대형이나 방진, 측면 돌파 같은 개념들이 모래만큼의 가치도 없는 혼돈의 장이었다.
‘용은 집단전을 익힐 필요가 없지. 전술이라는 건 약자가 강자를 쓰러트리기 위해 만들어낸 것. 포식자로 군림해 왔을 용은 혼자서 싸우는 것에 익숙해.’
그렇다면 이것은 해골 군단이 노린 바일 것이다.
사막에서의 운신이 훨씬 자유롭고 치명적인 대미지를 입지만 않으면 죽지 않고 싸울 수 있다.
자신들의 수적 우세를 이용한 장기전을 획책했을 것이고 전황은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캉이야, 더 높은 곳에서 볼 수 있겠어?”
“응.”
세 만다라가 회전하며 수직 이륙하듯 날아올랐다.
이제 캉이는 아홉 개의 꼬리를 회전시켜 헬리콥터처럼 부력을 만들어내는 단계를 뛰어넘었다.
순수하게 구미호의 요력만으로 비행마법을 달성한 것이다.
전장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순간,
나는 용아병과 해골 병사들의 난전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자 실질적인 승부처라 할 수 있는 세 개의 전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폭룡 발카드와 마룡 제르비어스의 정면충돌이었다.
사막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저 두 용이 서로에게 화력을 뿜어내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비할 데는 아니었다.
꽈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무식하게 한 대씩 때리고 있는 건가?’
발카드와 제르비어스는 서로 물러서지도, 비틀대지도 않은 채 브레스와 마법을 갈겨대고 있었다.
“어디서 용의 껍데기를 훔쳐 와서 덤비는 게냐!”
“껍데기를 훔쳐 온 게 아니라 껍질을 벗은 것이다!”
“한낱 마족에 불과한 네 녀석이 폭발의 미학을 알겠느냐?”
“내 혈관 속에 흐르는 것이 폭렬이다!”
누가 우세한지는 한눈에 알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제르비어스의 안위에 대해 조금도 걱정이 들지 않는다. 폭룡 발카드가 얼마나 엄청난 공격력을 가진 녀석인지 몸소 체감한 적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제르비어스는 계속 능숙해지고 있어.’
처음엔 자신이 용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에 당황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캉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분노에서 한 단계 초탈한 것도 느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카드가 불리해질 것이다.
용이 가진 자존심과 층장의 오른팔로서 품은 오만함 때문에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이었으나, 제르비어스에게는 화염 면역이 있다.
폭룡의 브레스에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저기는 맡겨둬도 되겠어.’
전쟁의 화신처럼 날뛰고 있는 제르비어스를 도우러 가는 것은 묘책이 아닌 것 같다.
본래 녀석의 성정은 저렇게 날뛰는 것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캉이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걸 목격하면 오히려 발카드를 몰아붙이고 있는 지금보다 전투력이 약화될지도 모른다.
기감을 펼쳐 다른 곳을 파악해 보려 했다.
전장 반대편에서는 벼락이 자연법칙을 무시한 채 사방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뇌룡 간다르바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아스티나와 레나스가 콤비를 이뤄 간다르바를 상대하고 있었다.
폭룡과 마룡의 충돌이 무식한 힘 대결이었다면 여기는 턴제 게임처럼 정밀한 공략이 벌어지고 있었다.
“너희는 이곳에서 먼지가 될 것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당장이라도 날개를 펴고 도망치지 그래?”
“용은 죽음 앞에서도 후퇴하지 않는다. 이전처럼 네놈들을 놔줄 일도 없다. 동료들이 도와주길 바라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스티나가 중력 마법으로 간다르바의 벼락을 무효화시킨다.
그러면 레나스가 빈틈을 노려 뇌룡의 비늘을 조금씩 깎아 내려가고 있었다.
큰 마법을 사용한 아스티나가 후열로 물러나면 레나스는 원거리 저격 형태로 변신해 간다르바의 현혹시키기 위해 비행했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그사이에 토니아가 요정술로 아스티나의 마력을 회복시키는 전략으로 보였다.
‘위태위태한데.’
결국에는 아스티나와 간다르바의 마력 싸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용의 몸에 박힌 드래곤 하트는 인간의 마력 회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용량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작은 돛단배로 해일을 상대하는 꼴이다.
출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도와주기 위해 뛰어들어야 하나?’
내가 아론다이트를 쥔 채 그곳으로 날아가지 않았던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전장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낯익은 해골 병사 하나가 아스티나 옆에 내려앉았다.
“물러나시오! 저 용은 우리가 맡겠소이다.”
해골마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갑옷의 사내.
누구인가 했더니 골제 휘하의 3군단장 앙굴렘이었다.
만골사막에 막 떨어진 나와 레나스를 구출해주었던 해골 군단의 군단장.
앙굴렘이 석궁으로 간다르바를 향해 화살을 내쏘았다.
‘저게 무슨 무모한 짓이지?’
저런 구식 냉병기로 뇌룡을 공격한다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미련한 짓으로 보였다.
간다르바 역시 화살을 피할 생각도 없는지 주변을 날아다니는 레나스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포오옹!
그때 간다르바의 가슴팍에서 초록색 연무가 피어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쥘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 녀석을 불러오려는 거야?”
뇌룡 간다르바가 고개를 갸웃하며 어리둥절해 했다. 앙굴렘이 투척한 것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다.
‘저건 분명 대형 전갈의 피 색깔이잖아?’
이전에 그걸 목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레나스 또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스티나 관객님! 달아나십시오!”
오토마타 소녀가 아스티나의 허리를 덥썩 붙잡은 다음 빠른 속도로 전장에서 벗어났다.
아스티나의 얼굴을 보아하니 당황하며 따지는 듯했으나 그 소리는 내게 전달되지 않았다.
사막이 비명을 내질렀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구릉을 만들어내며 빠른 속도로 간다르바를 향해 접근해오고 있었다.
앙굴렘이 다시 해골마에 올라타며 외쳤다.
“우리가 사막을 끌어온 것은 너희 용들과 지상전을 펼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골제와 해골 군단은 자신들조차 오랜 시간 사냥하지 못했던 생물재해를 위층까지 끌어오고야 만 것이다.
우르르르르르.
“재앙신의 제물이 되어라!”
앙굴렘을 태운 해골마가 날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만골사막의 재앙신이자 나와 레나스를 집어삼키려 했던 모래벌래가 사막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뇌룡 간다르바는 반사적으로 돌진해오는 상대를 향해 벼락을 뿜어냈다.
하지만 사막 밑에서 긴 시간 버텨온 모래벌래의 가죽에 그것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콰드드드득!
마치 아나콘다가 도마뱀을 사냥하듯,
모래벌래가 간다르바의 몸통을 휘감은 채 조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