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호심멸룡 (2)
쿠르르르릉.
세계수의 바닥을 통해 심상치 않은 진동과 폭발음이 전달돼왔다.
캉이를 살리기 위해 앞뒤 재지 않고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미처 주변을 살필 틈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바깥은 한 층의 명운을 건 전쟁 중이었다.
다행히 캉이가 무사히 ‘진명(眞名)’을 물려받아 부활했으니 서둘러 전선에 합류할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다.
캉이가 세계수의 영혼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위그드라실에게 영혼이 있고, 그게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한다고?”
교도관을 통해 전해 들었으나 종종 잊게 된다.
이 거대한 나무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환수들의 영혼을 흡수해 복제해내는 생물병기라는 것을.
병기 앞에 붙은 생물이라는 말.
당연히 영혼이 존재하며 의지를 품은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응. 이 나무가 내 영혼이 바로 깨어날 수 있도록 붙잡아주기도 했어. 기분이 아주 이상했어. 영혼끼리는 뭘 속일 수 없는지 이 나무가 엄청 간절하게 형아랑 연결되고 싶어하는 것도 느껴졌어.”
“하지만…… 바깥에선 친구들이 용들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고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위험한 상태일지 몰라.”
내가 망설이자 듣고 있던 호이란이 거들고 나섰다.
“등반죄수여, 그대의 친구들은 아직 무사하다.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강인하구나. 게다가 세계수와의 대화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거다.”
“그래요?”
말과 몸짓을 나누는 물리적인 대화가 아니다.
죄수의 영혼과 영혼이 서로 교감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과 몇 초의 시간만으로도 오랜 시간 한 장소에서 담소를 나누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게 호이란의 설명이었다.
‘영혼 상태일 때 내가 잊었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과 비슷한가.’
내가 빙설협곡에서 육신과 분리된 영혼 상태로 떠 있었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바깥 세상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었다.
[7층의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 등반죄수에게 망설이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세계수와의 접촉은 등반죄수 본인에게도 중대한 일일 것이라 장담합니다.]
이번 층에 있는 내내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교도관마저 조언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알았어. 어떻게 하면 되지?”
“나무가 이곳으로 찾아올 거야. 아니, 실은 벌써 와 있어.”
캉이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바닥에서 줄기 몇 가닥이 꽈배기처럼 솟아올랐다.
그 줄기 가닥은 말단으로 갈수록 얇아지더니 하이얀 꽃 한 송이를 피워올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꽃을 만지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잎에 내 해골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가 순백의 화원으로 바뀌었다.
*
나는 다시 세계수의 전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니, 바라본다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몹시도 기묘한 경험이었다.
은하계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온몸을 세계수가 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동시에 나를 전율시켰다.
- 채팅 신청을 수락해줘서 성은이 망극하다, 박상식.
온 우주의 꽃잎이 나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내가 곧바로 대꾸하지 못했던 것은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선택한 단어들이 무척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본명이 불린 것에 대한 충격은 덤이었다.
- ……뭐라 했어? 채팅?
- 이것은 영혼의 포자를 뻗어 내 단말과 그대의 단말이 강제 접촉. 이유가 여기. 당신의 기억에서 이 개념과 가장 적합한 단어를 골라냈지. 마음에 입회했나?
- 어, 응. 아…… 알겠어.
괴이한 단어 선택과 흉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맥락 파괴에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눈치껏 때워보자면 이 세계수는 내 기억에 기반해서 단어를 습득하는 듯 보였다.
영혼과 영혼의 대화이므로 낯선 이세계의 다양한 종족의 언어를 번역해주는 감옥의 권능과도 상관없는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마음에 입회했나라는 표현은 아마도 마음에 들었냐는 뜻이겠지.
- 대화가 반들반들하지 못해 송구. 이렇게 의지를 다른 존재에게 던지는 경험이 전무하옵니다. 그러나 계속 너의 것을 주면 나아질 거다.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요.
- 최대한 단순하게 말해줘. 그러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알았다. 고맙다고 혀를 놀리고 싶다.
- 감사인사는 그쯤 하면 됐고. 왜 나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거지?
- 채팅 수락보다 조금 더 곤란한 부탁을 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세계수와 내가 의지를 교환할 때마다 나를 둘러싼 꽃밭에서 따사로운 꽃바람이 일렁였다.
- 나는 그대와 친구가 드시고 싶다.
- 친구를 먹자고? 내가 알고 있는 그 개념을 말하는 거야?
- 네가 죄수 르팔타커스 시온의 도움을 받아 타인과 인연의 끈을 맺는 그 행위. 그것을 내게도 나눠주길 소망하는 것입니다.
초 단위로 맥락이 매끄러워지고 있다.
녀석이 장담했던 대로 이 나무는 아주 빠른 속도로 단어를 습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 물론 나는 이 감옥에서 여러 친구를 사귀었지. 그들의 기술을 빌려오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지금 네가 말하는 개념은 단순한 우정만을 나누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제르비어스 폰타인과 처음 맺었던 언약을 말하는 거겠지?
- 딩동댕입니다. 아카식 레코드를 관장하는 이 감옥의 절대자가 허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여정에 탑승하고 싶음이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감옥을 오르면서 친구를 맺을 때 먼저 손을 내미는 건 내 쪽이었으니까. 상대가 내 권능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제안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첫 번째 대상이 인간도, 요정도, 마족도 아닌 식물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본 것이다.
- 이유를 설명해주겠어?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이유가 뭐지?
-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선 죄수 호이란과 내가 함께 했던 시간이 무척 길고도 깊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 뒤로 친절하고도 긴 설명이 이어졌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신적인 존재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든 전술병기.
세계에 퍼져 있는 생맥(生脈)을 흡수해 연료로 삼고 환수의 영혼을 흡수해 군단으로 복제해내는 것이 이 나무의 존재이유였다.
당연히 영혼은 부여받았으나 자유의지는 제대로 발현될 일이 없었다.
그것이 싹튼 계기는 푸르가토리움에 소환당한 지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뒤 흡수한 구미호였다.
- 호이란의 마음과 공명했다고?
- 공명이라기보다는 공감이 더 어울리는 표현 같군. 물론 이것은 일방통행이었다. 호이란은 분명 본인이 내게 자유의지의 싹을 틔워주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거다. 그것은 ‘죽지 않은 채로 내게 흡수된’ 죄수였기에 가능했으며, 또한 목적 없이 내가 품고 있던 기원검의 파편 덕분에 증폭된 사건이거든.
영혼만 있던 존재에게 마음이 주어졌다.
그 어떤 죄수의 영혼보다 강렬한 소망을 지닌 어미 여우의 집념이 세계수의 잎맥을 타고 긴 세월 뻗어 나간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자각하게 되었다. 호이란이라는 개체가 자신을 장작으로 삼아 멀리까지 보내고 싶어했던 혈육에 대한 애정. 자신은 생이 다하여도 그 피붙이를 통해 의지가 이어질 것이라 믿는 신념도.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내 것처럼 느껴진다.
환수의 영혼을 복제하는 기능이,
환수의 숙원마저 복제하는 진화를 이룬 것이다.
- 그 뒤로 나는 자신의 죄업을 반성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목숨을 다한 영혼을 받아들여 복제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저지른 죄는 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 내렸다. 거기에 슬픔이나 통탄은 없다. 다만, 호이란이 그 자식에게 그러했듯이 나 또한 내게서 비롯되어 발아할 자식을 바깥세상에 내보내고 싶다.
- 본인…… 아니, 본목(本木)의 탈옥을 원하는 게 아니군.
- 그렇다. 나는 이곳에서 스스로 생명력을 고갈시켜 내 안에 잠재된 환수들의 영혼을 해방시키고 싶다. 그러함으로 그 영혼들을 응당 속해야 할 윤회의 고리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이제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대화에 전혀 지장이 없는 수준으로 나와 대화할 수 있었다.
나를 둘러싼 꽃바람이 잦아들더니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접촉했던 하얀 꽃 한 송이만이 눈앞에 떠올랐다.
- 너에게 부탁한다. 내 자식을 친구로 삼아 바깥세상에 심어주겠나?
- 이걸…… 데려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식에겐 환수들의 영혼을 흡수하는 힘도, 생맥을 탐하여 원기를 충전하는 능력도 없다.
그저 평범한 꽃 한 송이.
햇빛을 밭아 뿌리를 내렸다가 겨울을 맞이하면 사멸하게 되는 생화 한 떨기.
- 그러니 너의 탈옥 여정에 전투력으로 도움이 되진 못할 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대가 거부한다 하더라도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영혼끼리의 대화에서 서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캉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혹여 이 꽃을 지구에 데려갔다가 벌어질 파장을 걱정하는 나의 우려도, 부탁을 받아주지 않으면 실망할 준비를 하고 있는 위그드라실의 초조함도 모두 꽃 한 송이가 풍기는 향기처럼 숨길 방법이 없었다.
- 그래, 내가 데려가 줄게. 반드시 탈옥해서 이 꽃에게 자유라는 비료를 선물해주겠어.
- 고맙다. 용사가 아닌 인간 박상식의 영혼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내가 위그드라실의 꽃잎을 만지려 했을 때, 세계수는 주저하듯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 이름을 붙여주겠나?
- 이름?
- 그래. 내가 호이란에게 배운 것은 적지 않았는데, 자식에게 진정한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의 숭고함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지식은 한정되어 있으니…… 네가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잠자코 감옥이 번역해준 세계수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러자 자연히 이 꽃에 붙일 이름이 툭 하고 머릿속에서 굴러나왔다.
- 베르단디(Verðandi).
- 으흠, 베르단디라. 좋은 이름이다. 네가 있던 곳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이로군.
- 맞아. 너와 이름이 같은 세계수를 돌봐준 여신의 이름이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 고맙다. 네가 탈옥의 꿈을 이루기를, 그 순간에 나의 베르단디 또한 함께 할 수 있기를 소망하겠다.
내게서 이름을 부여받은 순백의 꽃이 손바닥 위로 날아왔다.
띠링!
그러자 이번 층에서는 볼 것이라 기대한 적 없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세계수의 꽃 베르단디가 새로운 친구 목록에 등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빌려 쓸 전투용 스킬이 없습니다.]
[차후 베르단디가 성장하여 스킬이 생길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영혼끼리의 교감이 곧 끝나게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시 호이란과 캉이가 기다리고 있는 현실로 돌아갈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도 될까?
- 무엇이든 대답하겠다.
- 호이란을 오래 관찰한 것과 달리 너는 나에 대해서는 잘 몰랐잖아? 그런데 어떻게 베르단디를 내게 맡길 생각을 했지? 무엇을 믿고?
잠시의 침묵 끝에 위그드라실이 말했다.
- 말했듯이 나는 기원검을 품고 있다. 바로 네가 품고 있는 칼자루와 한 몸이었던 보구의 파편. 그것을 통해 나는 너의 ‘기원’을 읽어냈다.
- 내 기원이라면…… 탈옥?
- 아니. 탈옥은 너에게 있어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내가 기원검으로 들여다본 너의 기원은 탈옥 그 자체가 아니었다.
- 그렇다면?
- 너의 심중엔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던 꽃이 있었다. 꽃을 피워서 바깥세상으로 날려 보내고 싶은 나와, 바깥세상에 남겨두고 온 소중한 이에게 주지 못한 꽃을 건네주고 싶은 너의 기원은 통하는 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 하하, 생각지도 못했던 곳을 찌르네.
옳은 말이었다.
탈옥, 탈옥하고 부르짖었지만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자유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로 ‘돌아갈’ 자유지.
- 보답의 의미로 나도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알려줘도 될까?
- 뭐지?
- 아래층의 죄수 바르한 니칸드로스에 관한 것이다.
- 골제?
-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천공섬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수인 나에 대해서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를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그드라실은 골제 바르한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다.
- 하지만 알고 있어? 그 녀석은 나와 동맹을 맺었는데. 그 동맹은 함께 용왕의 숨통을 끊는 것이고, 용왕이 토해낼 열쇠 또한 내게 양보하기로 했어.
- 그 또한 알고 있다. 문제는 그 동맹이 끝나는 순간 일어날 테지.
이 세계수는 아래층에 뿌리를 뻗었으며, 그걸 계기로 골제 바르한은 두 번째 등반 기회를 얻어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골제와 그의 해골 군단과 싸워왔다.
그러니 충분히 믿을 만한 경고라 할 수 있었다.
- 조심하라. 바르한은 반드시 널 배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