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호심멸룡 (1)
모래 기둥 앞에 당도했을 때,
나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5분도 되지 않았다.
‘빠듯하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수관부에서 다시 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것은 선택지에서 배제했다.
본래 정체가 죄수라는 나무에게는 미안하지만 최단거리로 옆면을 뚫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했던 난관이 내 앞을 기다리고 있었다.
[흑마법으로 형성된 방어 결계입니다.]
[접근하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뭐라고?
단순한 모래기둥이 아니었단 말이야?
물러나라는 경고 메시지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스티나가 새로 개발한 마법 자이언트 포스 쉴드를 왼팔에 둘렀다.
그러고는 시야 전체에 가득 찬 초거대 모래 장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드드드드득!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호이란의 여우트림마저 받아낼 수 있었던 포스 쉴드가 침식되면서 중력 방어막이 갈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로 한 걸음만 더 내딛었다가는 미트그라인더에 갈려 나가는 소세지꼴이 될 판이었다.
‘버텨볼까?’
하지만 표면을 조금 갉아먹었을 뿐인데도 포스 쉴드는 내 뼈에 가깝게 줄어들어 있는 상태였다.
다급한 마음에 비어 있는 오른손에 SS급 성검 아론다이트를 소환했다.
그러고는 깊숙히 찔러넣자,
콰아아아아아아아!
마치 비명을 지르듯 모래기둥이 압력을 발휘해 나를 밀어냈다.
주르르르륵.
20여 미터나 뒤로 밀려나면서 내가 한 생각은 황망하다는 것뿐이었다.
항마의 권능을 가진 아론다이트가 흑마법의 정수가 담긴 결계와 충돌하면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반작용을 일으킨 모양이다.
모래를 털 시간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빌어먹을 골제 새끼. 왜 세계수에 이런 접근 불가의 결계를 쳐둔 거야?”
당장이라도 용왕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골제를 찾아가 두개골을 흔들어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자 본인만이 이 기둥을 해제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문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필사적으로 전장의 중심에서 달아나 이곳까지 왔는데 다시 그곳까지 돌아갈 물리적인 시간.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아론다이트를 겨누었다.
“교도관에게서 사정은 들었다.”
그것은 만신창이가 된 장신의 사내.
흐느적거리면서 걸어오는 이멜타스였다.
아스티나의 비행에 따라오지 못해 사막에 남겨진 줄 알았는데, 이 모래 기둥에서 배회하고 있었던 건가?
“난 이 안에 들어가야 해. 방법이 없겠어, 이멜타스?”
“이 천공섬의 기후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는 힘이 너의 뒤에 있다. 6층장 혼자만이 벌인 짓이 아니야. 일개 죄수의 흔적이 아니라는 거지.”
[7층의 교도관이 죄수 이멜타스의 말이 맞다고 확인해 줍니다. 6층의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의 권능이 이 결계의 근원이라고 전합니다.]
교도관의 권능이 근원이라니.
그렇다면 3층에서 만난 ‘증식하는 밀림의 뱀’처럼 일개 죄수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자물쇠가 걸려 있다는 소리였다.
그때, 이멜타스가 내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면 내가 자랑스럽게 죽었다고 전해다오.”
“뭐라고?”
용의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외양이 비슷할 뿐 이자의 진짜 정체는 용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이무기.
그리고 감옥 안에서 구미호에게 거둬지기 전까지 버려진 짐승이었다.
이멜타스의 앞발이 모래 기둥을 찢어발겼다.
쿠드드드득!
“이멜타스! 그러다간 죽어!”
모래기둥에서 흘러나오는 격풍이 이무기의 양 날개를 찢어버렸다.
날개의 피막이 무참하게 분쇄되면서 이무기의 질긴 근육,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하얀 견갑골이 훤히 드러났다.
“아주 잠깐일 거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들어가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나는 이무기가 뚫으려 하는 장벽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무너질 듯 후들거리는 이멜타스의 다리 가운데에 서자 그의 음성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평생 나 자신이 용이 되고 싶다고 믿어 왔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출신을 저주했고, 그것을 벗어던지기 위해 무수한 업보를 쌓았지.”
이멜타스가 한 걸음 내딛었다.
나 역시 거기에 맞춰 보폭을 전진시켰다.
결계가 수복되려는 압력을 이멜타스가 가까스로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저 가족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군. 이토록이나 먼 길을 돌아서 알게 되다니.”
이제 이멜타스의 육체에는 전신의 피가 빨려 나간 고깃덩어리나 다름없었다.
모든 비늘이 깎여나가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준 꼬리를 그분의 진짜 아들에게 되돌려주는 것뿐이다.”
사방을 뒤덮고 있던 모래바람이 일순간 흐릿해졌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표피까지 걸어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더 이상 침입자를 밀어내는 마력이나 결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 왔어, 이멜타스! 조금만 더 버티…….”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온몸으로 나를 보호해주며 걸어가던 이무기는 언제 숨이 끊어졌는지 이미 호흡을 멈춘 상태였다.
어쩌면 죽은 채로 걸어온 건지도 모르겠다.
이무기의 몸이 머리 위로 와르르 무너져내리려던 순간, 세계수에서 뻗어 나온 이파리들이 그것을 부드럽게 받아냈다.
“이게?”
위그드라실의 이파리.
죄수들에게 다른 층으로 면회의 권능을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일곱 색채가 죽은 이멜타스의 몸을 휘감았다.
이파리들은 마치 나비처럼 날갯짓하며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무기를 위로해주는 듯했다.
- 전부 들었다, 이멜타스.
세계수의 내부에서 낯 익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래 전 죽음의 위기에서 한 번 이멜타스를 건져주었던 구미호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 너도 내 진짜 아들이다.
*
세계수의 가지를 아론다이트로 긁어낼 필요는 전혀 없었다.
두툼한 가지가 스스로 벌어지더니 수심으로 향하는 길을 내어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직선거리로 위그드라실의 가장 깊숙한 구역, 뿌리로 연결되는 문이 있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슬픈 눈빛의 호이란이 그곳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호이란.”
“재회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질 줄은 몰랐구나, 등반죄수야.”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이 구미호의 진짜 아들은 내 인벤토리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워있다.
두 번째 아들은 방금 나를 이곳까지 들여보내느라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호이란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아들의 시신을 갖고 있느냐.”
“네.”
“꺼내 보거라.”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본래 캉이는 당신을 닮아 해사한 외모를 갖고 있지만 지금은…….”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아들이 용의 브레스에 그을려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호이란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 앞에 가져다 댔을 뿐이다.
“괜찮느니라. 어물쩍대다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 아니냐.”
인벤토리를 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아이템을 꺼냈을 때도 지금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캉이의 시신이 호이란 앞에 소환되었다.
“내 예상보다 키가 많이 자랐구나.”
호이란은 절규하거나 울부짖지 않았다.
슬픈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구미호의 눈가에 걸려 있는 것은 오직 아들을 다시 만난 애틋함뿐이었다.
“너를 내려보냈을 때는 한 손으로 껴안을 수 있었거늘. 이제는 양손을 다 써야 품에 안을 수 있겠어.”
“호이란. 캉이를 다시 살릴 수 있겠죠?”
“이미 이 아이의 영혼은 내 곁에 와 있다. 천만다행이지. 세계수의 수액으로 만들어진 운해가 강제로 틀어막혔기 때문에 나처럼 흡수되지 않고 방치될 수 있었단다.”
그건 몰랐던 사실이었다.
골제 바르한이 자신과 군단에게 유리한 전장을 만들기 위해 교도관의 힘을 빌어서 끌고 온 모래가 세계수의 표면을 막았고, 그것이 환수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이 나무의 생태를 막아선 것이다.
“우리 일족은 본래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 자식을 낳기 위해 인간의 씨가 필요하지만 그저 이용의 대상일 뿐이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호이란이 자신의 남편을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지 않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이 감옥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정해놓은 것이다. 이 아이에게 내 지아비의 이름을 붙이기로.”
어미 구미호의 섬섬옥수가 캉이의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불타버린 귀를 쓰다듬었다.
환영일까?
달빛 정자 위에서 서로를 향해 웃는 장군과 여인의 모습이 향처럼 뇌리 안에서 피어올랐다.
“호월랑(狐月郎). 눈을 뜨거라.”
파아아아아앗!
아홉 개의 만다라가 캉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한 개의 만다라에 금이 가면서 먼지를 털어내듯 어린 구미호의 육체를 뒤덮고 있던 잿더미가 스르륵 사라졌다.
육의 곁을 떠돌던 영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
[교도관장이 모든 교도관들에게 알립니다.]
[이름 없는 구미호가 그 혈육으로부터 정당한 이름을 수여받았습니다.]
[안건이 무효화되었으므로 소집령이 해제됩니다.]
*
마치 이 우주에 그들만이 존재하는 듯,
호이란과 캉이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아들의 머리에 솟은 귀가 어미의 가슴팍에서 좀처럼 떨어져나올 줄 몰랐다.
“엄마, 엄마가 내 엄마구나.”
“그래, 이리 오래 기다릴 줄은 몰랐거늘. 미안하구나.”
눈을 감은 호이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 또한 물기에 젖어 있었다.
댐에서 흘러나오는 강줄기처럼 호이란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아들아,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느냐?”
“원망? 그게 뭔데?”
“어미를 잘못 만난 탓에…… 아무런 죄없이 이 감옥에 갇혀 있어서 내가 밉지 않았느냐.”
대답이 듣고 싶은 것과 동시에 그 대답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캉이는 처음으로 호이란의 품에서 머리를 떼어 그 어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괜찮아. 나는 아무도 원망한 적 없어.”
“…….”
“오히려 엄마가 이곳에서 나를 낳아줬기 때문에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걸.”
그러면서 캉이는 나를 쳐다보았다. 자연히 호이란의 눈빛 또한 멀뚱히 서 있던 나에게로 향했다.
“캉이야. 아니, 이제는 호월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러자 호이란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이 여우의 법도를 따를 필요는 없다. 그대가 어떻게 부르든 간에 이 아이를 가호하는 여우의 만다라가 흐트러질 일은 없느니.”
“응. 형아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캉이라는 이름은 대수림에서 이 구미호가 만들어낸 친구들이 서로를 향해 부른 이름.
사실 이름이라기보다는 ‘짖는 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짖음 덕분에 이 소년은 나를 만날 때까지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캉이의 등을 어루만졌다.
살아있다는 감촉.
넘쳐흐르는 환수의 생명력이 느껴지자 비로소 이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잘 돌아왔어.”
“응. 죽었다고는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어. 나는 계속 형아 옆을 맴돌고 있었거든.”
영혼의 상태로 내 곁에 있었다는 건가?
내가 놀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캉이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제르비어스 아저씨가 용으로 변신하는 것도 봤고. 이멜타스 형아가 모래기둥과 싸우는 것도 다 봤어. 나는 내내 그 옆에 있었어.”
“그러면?”
“이멜타스 형아와 작별인사도 했어. 나한테……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하면서 떠나갔어.”
가슴이 아파 왔다.
하지만 한켠으로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마치 바통터치를 하듯, 이무기는 배다른 동생에게 영혼의 상태로 유언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영혼은 세계수에 흡수되지 않고 윤회의 고리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캉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한테 말을 걸었던 영혼은 하나가 더 있었어, 형아.”
그 말에는 호이란조차 고개를 갸웃했다.
층에 머물며 떠도는 영혼이 또 있었단 말인가?
“이 나무 말이야. 이 나무가 나에게 전해달라고 했어.”
그러면서 캉이는 내 가슴을 가리켰다.
“이 나무는 형과 대화하고 싶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