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스켈레토마키아 (1)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먼지가 안구를 향해 날아들면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눈을 가리게 된다.
모래에 상처를 입을 피부도, 눈썹도, 심지어 안구도 없는 해골인 상태인데도 말이다.
샤아아아아.
하지만 모래 폭풍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나와 호이란의 코앞에서 정확하게 쇄도를 멈췄다.
꿈틀대는 모래가 양옆으로 비켜서자 붉은 망토에 지팡이를 짚은 리치가 엄숙하게 걸어나왔다.
골제 바르한 니칸드로스.
감옥이 허락하지 않은 두 번째 등반을 처음으로 일궈낸 죄수이자 6층 만골사막의 층장이었다.
그를 직시하는 호이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슈바인, 아는 자인가?”
“네. 저에게 불사자의 축복을 걸어준 6층장입니다. 참고로 당신과 증오의 대상이 같습니다.”
“용왕 게브라둠에 맞섰다가 패하고 내려갔다던 해골 흑마법사로군. 그 용기에 합당할 만큼의 힘이 느껴진다.”
“……마치 초면인 듯 구시는군요. 설마 골제를 직접 만나신 적이 없습니까?”
“세계수의 뿌리를 타고 올라오는 병사들과만 반복해서 싸워야 했지. 지금 저자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해골 장수들 말이다.”
이건 분명 기이한 일이다.
골제 바르한은 본인의 입으로 내게 뿌리를 오르는 시도를 막아서는 ‘까다로운 관문’이 있다고 말했다.
아래층에서 직접 그 환수가 초대형 작살을 가루로 만드는 소리를 들려주기까지 했다.
분명 그 주인공은 내 옆에 있는 호이란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골제는 분명 호이란과 여러 번 싸웠을 텐데 왜 한쪽에는 그 기억이 없는 거지?’
용왕에 대한 복수를 갈망하는 골제의 성격을 반추해보면, 부하들만 출정시키고 자신은 호이란과 싸우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내 생각에 골제는 호이란과 분명 맞붙은 적이 있다.
그런데 한쪽만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르팔타커스조차 골제를 꺾을 수 없게 만들었던 기묘한 마법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당장이라도 단탈리온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이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눈앞에 상대가 있는 터라 부담스러웠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천공섬에 다시 오르게 되었구나.”
호이란과의 대화가 길어질 수 있었던 건 골제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격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골제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등 뒤에는 앙굴렘, 드라우카스 등의 군단장들이 완전무장을 한 채 따라오고 있었다.
“슈바인 스트링거, 그대가 기어코 내 숙원을 이뤄주었군. 문을 여느라 고생이 많았을 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 문을 열 것이라고 어떻게 미리 안 거지? 설마 몇 주째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본인의 흑마법으로 미래를 엿보거나 할 수는 없네.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의 도움이 있었지. 오래 전에 그가 이르기를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7층 교도관과 한 가지 언약을 했고, 그것이 수맥과 뿌리를 막고 있는 이 문과 연관이 있다고. 문이 열리는 순간 세계수는 더 이상 운해를 발생시키지 않을 거라고 말해줬다네. 나와 군단은 그 현상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7층 천공섬을 가득 메운 채 사망한 죄수들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운해.
그것이 문을 여는 일과 상관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내 짐작보다 골제는 세계수 위그드라실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해 줄 내게는 필요한 정보만을 건네준 것이다.
‘역시 완전히 믿을 순 없는 놈이야.’
그럼에도 지금 현재로선 골제를 추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단은 용왕이라는 공동의 적을 갖고 있다. 또한 용왕이 쓰러져서 7층의 열쇠를 내가 갖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
적대 의사를 보이는 순간 교도관이 공증한 계약에 따라 소멸하게 되니까.
“함께 용 사냥에 나서세.”
골제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띠링!
[연계 퀘스트 #1. ‘수맥돌파’를 완료하였습니다.]
[용사는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수심부에 존재하는 문을 여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시간부로 동맹군인 바르한 니칸드로스와 그의 군단이 자유롭게 천공섬을 누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상으로 무극참월공의 레벨이 1 오릅니다.]
[연계퀘스트 #2. ‘스켈레토마키아’로 연동됩니다.]
“용왕 게브라둠을 만났나?”
“그래. 당신이 말한 대로 정말 무지막지한 녀석이었어. 녀석에게 붙잡혔다가 말 그대로 뼈도 못 추릴 뻔했다고.”
“그래도 탈출을 할 수 있었다니 놀랍군. 그 과정을 물어도 되겠나?”
나는 이멜타스를 부축하고 있는 아스티나를 가리켰다.
“헤어졌던 친구들이 다시 돌아왔거든.”
“오호라.”
골제의 시선이 아스티나에게로 향했다. 같은 흑마법을 사용하는 동지의식 비슷한 걸 느끼는 걸까.
“자네가 말했던 마녀의 딸이겠군. 저런 어린 나이에 갖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타고난 마력 회로를 가졌어. 내구력만 더해진다면 이 전쟁에 큰 전력이 되겠는걸.”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골제의 시선에 담긴 말을 눈치채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친구들까지 해골로 만들 생각은 없어.”
이것은 진작 정해둔 사안이었다.
나는 탈옥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도박수에는 당연히 위험도 따른다.
친구들을 그런 위험에 몰아넣을 순 없다.
“내 축복이 전투에서 얼마나 유용한지 자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 정도는…….”
“나는 슈바인의 판단을 믿어.”
단호한 아스티나의 대응에 골제는 더 이상의 미련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 괜찮네. 내겐 이미 불사의 병사들이 수백이나 존재하니까. 후회할지도 모르네, 슈바인 스트링거. 육신이란 껍데기는 불시에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게나.”
골제의 말에 뭔가 반박하려 할 때,
제르비어스에게서 귓속말이 날아왔다.
- 용사야, 위쪽에 큰 문제가 생겼다.
- 문제?
- …….
- 뭐야! 왜 대답을 안 해!
- 날아오는 창을 피하느라 그랬다!
전투가 벌어진 건가?
하지만 용들은 이 세계수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 아니었나?
다급한 제르비어스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 용왕이 다른 용들을 죽여 그 뼈를 용아병으로 일으켰다. 우리 넷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 젠장!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실수다.
용왕이 내 기원검을 빼앗기 위해 다른 죄수들을 학살하는 무리수까지 둘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왜 그래?”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는지 아스티나가 다가와 내 팔뚝을 붙잡았다.
사정을 설명하자 아스티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면에 호이란과 골제는 명백하게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내 아들이 전투에 휘말린 것이냐?”
호이란은 자식에 대한 걱정으로 당황해했고,
“용아병이라. 용왕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거군.”
골제는 상대가 드러낸 이빨에 오히려 호승심을 보였다.
나는 호이란에게 사과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합니다, 호이란. 바깥으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과는 내 쪽에서 해야지.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나는 세계수의 수심에 속박된 몸. 이 나무의 바깥으로는 그림자를 뻗을 수 없다.”
세계수의 천장으로 뻗어 있는 통로를 올려다봤다.
전속력으로 날아서 내려오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왔던 방식으로 되돌아가면 늦을지 모른다.
아스티나가 내가 할 말을 짐작한다는 듯 짧게 외쳤다.
“먼저 가. 그리고 나를 소환해.”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다음 아론다이트를 꽉 쥐었다.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곁으로 순간이동!”
*
- 젠장!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슈바인의 마지막 귓속말을 들었을 때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은 아찔한 속도로 비행 중이었다.
두 기의 용아병이 날이 바짝 선 창을 들고 추격해오고 있었다.
다행히 어떤 각도에서도 적을 파악할 수 있는 든든한 오토마타를 등에 부착 중이었다.
“대응사격합니다.”
프즈우우우웅!
제르비어스의 양어깨에 부착된 포신에서 두 줄기의 초전자포가 쏘아졌다. 추격해 날아오던 용아병은 날개에 포격을 맞이하곤 비틀거렸다.
그 틈에 정면에서 한 용아병이 직접 창을 찔러왔다.
날아오는 창을 덥썩 붙잡았으나 돌진해오는 관성 덕분에 제르비어스의 어깨에 창이 푸욱 박히고 말았다.
마왕은 울부짖는 것보다 반격을 택했고,
[마왕군 폭렬마법]
[2급 오의 ‘지옥파쇄포(地獄破碎砲)’]
마기에 휩싸인 용아병은 창을 놓친 채 추락했다.
공중에서의 싸움은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모든 각도에서의 습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
당연히 공격 범위의 절반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지상에서 발을 붙인 채 싸우는 게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미끼 역할이라도 해야 하니까.’
제르비어스가 아스티나라는 날개를 얻어 시선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모든 용아병이 지상의 캉이에게 집중되었을 것이다.
덩치가 큰 구미호는 더 큰 표적이 된다.
다행인 것은 제르비어스가 든 무기가 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날개를 단 창병을 상대로 리치가 짧은 검으로 맞서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왕의 오메가 위프는 바로 채찍.
자유자재로 길이와 공격 궤적을 비틀 수 있다는 변칙성이 가까스로 용아병들의 쇄도를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요소였다.
그럼에도 제르비어스는 초조했다.
“대체 뭐가 문제지?”
대기실에서의 수련 당시,
아스티나와 캉이는 0층의 교도관인 나태에 짓눌린 쥐에 맞서면서 분 단위로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제르비어스는 아니었다.
그는 분명한 죄수의 제약에 걸려 있었다.
층에 입소한 순간의 능력치에 봉인되는 것.
사력을 다해 싸워도 힘에 부치는 것이 느껴졌다.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질 못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레나스의 협력이 아니었다면 결코 지금의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거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동료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자괴감.
그것이 이런 중요한 싸움에서 더욱 부각이 되고 있어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어째서…… 지금도 변신이 되지 않는 거지?”
단탈리온은 말해주었다.
폭렬마왕 제르비어스는 변신을 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힘이 숨겨져 있었다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어느 때보다 그 힘이 절실할 때가 아닌가.
‘극한의 분노나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이 와야 변신을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다른 마족이라면 그것이 트리거가 되겠으나…… 그대의 경우라면 다르다.’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 또한 제르비어스에게 잠재된 변신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성을 애써 부인하거나 거스르지 말라’는 아리송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 아리송함이 지금 마왕을 격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변신의 조건이 대체 뭐냔 말이야?”
마왕이 중얼거렸을 때,
멀리 떨어진 세계수의 꼭대기에서 붉은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캉이의 여우트림이 보이는 광채였으나 그 규모가 범상치 않았다. 그와 비등한, 혹은 그를 웃도는 힘과 충돌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파동.
“으아아아악!”
뒤늦게 비명소리가 마왕의 고막을 때렸다.
어린 구미호, 캉이의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