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모래폭풍 (5)
심장이 빠르게 뛴다.
우스운 일이다. 지금의 내겐 뼈만 남아서 오장육부 따윈 없으니까. 그럼에도 흥분이란 최면은 강력해서 오감이 몇 배로 살아 날뛰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나 머리는 명정하다.
[만전불패의 검술 Lv. 7]
손에 쥔다 한들 꿈쩍도 하지 않았던 아론다이트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스킬의 위력이 동조하고 있어서인지 오랫동안 신체의 일부였던 것처럼 따라와 주고 있다.
썩둑!
그렇게 호이란을 몰아친 끝에 그녀의 머리카락 몇 올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호이란이 해사하게 웃었다.
“좋구나.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힘내보거라.”
“입 좀 다무십시오. 죽자사자 싸우는 상대에게 격려를 받으니…….”
꽈아아아앙!
호이란의 주먹이 잔상을 남기며 내 안면을 후려쳤다. 뒤로 한참 날아가려는 몸뚱어리를 무영보의 묘리로 우뚝 다잡았다.
“정신 사나워진단 말입니다.”
“그러냐, 미안하구나. 너희들의 협공이 좋아지니 희망이 보여서 그랬다. 별 수 없잖느냐. 지금 내 육체는 내 통제를 벗어났느니라.”
탄환처럼 쏟아지는 아스티나의 그래비티 봄을 공중제비로 피해내면서도 호이란의 호흡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멜타스는 멀리 떨어져 빈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브레스를 내뿜을 기세였다.
하지만 호이란이 그것을 알고 나와 아스티나로부터 떨어지지 않은 채 근접전을 강제시키는 중이었다.
호이란이 여우의 형태로 변신하지 않고 싸운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영리한 선택이야.’
두 명의 상대는 검을 사용하고 있으며 원거리 마법도 퍼부을 줄 안다.
거대한 여우의 육체는 내구력이 좋아지겠지만 표적이 그만큼 커지는 효과를 낳는다. 파괴력을 손해 보는 대신 민첩함을 보장하는 전법을 택한 것이다.
나와 아스티나가 본격적으로 몰아붙이기로 하면 호이란은 후퇴를 택하기도 했다.
“주력 공격은 슈바인 그대가 하는 게 옳겠다. 그 검에 닿을 때마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아프거든. 요사스러운 것을 퇴치하는 항마의 기운이 있나 보지?”
“그런 말도 마십시오. 마음이 약해지잖습니까.”
“약해진단 것 치곤 방금 살초를 썼구나.”
“죽어도 안 죽는다고 하셨으니까요.”
대화를 하는 와중에 호이란의 후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아스티나가 나를 쳐다봤다.
저 애가 분명 전에도 비슷한 신호를 보냈었는데.
뭐였지?
기억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머리회전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만철도시의 오토마타 칸과 싸웠을 때!’
재빨리 아론다이트를 역소환시키고 마검 디아볼릭으로 교체했다.
지금 사용하게 될 술식은 ‘마검’과 더 궁합이 좋으니까.
호이란을 중심에 두고 나와 아스티나가 동일한 기수식을 취했다. 상대 또한 심상치 않은 기세를 읽었는지 힘을 모았다.
우리 셋이 뿜어내는 기파가 부담스러운지 세계수의 줄기들이 불길하게 꿈틀댔다.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초월식(超越式)]
[아수라대멸겁(阿修羅大滅劫)]
호이란의 전후로 여덟 개 팔을 지닌 두 파괴신이 폭포처럼 참격을 쏘아붙였다.
이 제한된 공간에서 모든 참격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내 아수라는 호이란의 도주로를 차단시켰고,
아스티나의 아수라는 오직 호이란의 본체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단 한 번의 시선 교환만으로 이것이 가능하다는 점에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인간의 육체를 하고 있을 때였다면 이런 무식한 샌드위치 전법은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스티나의 공격 범위에 나 또한 들어가게 되니까.
콰콰콰콰콰콰!
호이란이 피해낸 검파가 내 몸에 직격했으나 나는 버텨냈다. 즉사의 위력이 아니라면 내게 고통은 전달되지 않는다.
휘익!
몸을 빼낸 호이란의 상태는 결코 성하지 않았다.
분명히 몇 차례 공격이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어머니의 만다라에 주목해라, 슈바인 스트링거.”
지켜보던 이멜타스의 훈수가 귀에 꽂혔다.
오호라.
분명히 호이란의 등 뒤에서 회전하던 네 개의 만다라가 범상치 않았다. 그중 한 개의 만다라에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아스티나가 버럭 소리쳤다.
“이멜타스, 지금이에요! 시간을 벌어줘요.”
“좋다!”
숨을 돌렸던 이무기가 거체를 육박해 들어갔다.
환수 대 환수의 격돌로 국면이 전환될 때 호이란은 인간형 둔갑을 풀고 여우의 본체로 맞서 싸웠다.
곧 두 환수의 육탄전이 벌어졌고,
거의 동시에 아스티나가 귓속말을 걸어왔다.
굳이 귓속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호이란의 허를 찌르는 결정적 수를 쓰겠다는 것이다.
- 확신이 생겼어, 슈바인. 저 만다라를 붕괴시켜야 해.
- 본체를 두들기는 거 말고?
- 모든 만다라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킨다면 본체가 약해질 거야. 저건 마법진이 아니야. 겉으로 드러나 있는 마력 회로라고 봐야지.
- 하지만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호이란을 무슨 수로 잡지?
- 나한테 계획이 하나 있어. 들어볼래?
이멜타스가 호이란의 아홉 꼬리에 사지가 봉쇄당한 채 치도곤을 당하고 있었다. 시간은 결코 충분한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아스티나는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계획만을 속사포로 설명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 그게 되겠어? 무모한 도박을 거는 건 보통 내 역할이었는데?
- 가끔은 나도 도박을 걸 수 있지. 잊었나 본데 만철도시의 카지노를 뒤엎은 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
- 연습도 맞춰보지 않고 가능할까?
콰아아아아앙!
벽면에 처박힌 이멜타스의 체구가 맥없이 찌그러졌다. 동공이 풀린 것을 보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한 모양이다.
- 해야 돼. 안 그러면 이멜타스가 죽게 생겼어.
나는 대답 대신 디아볼릭을 창처럼 들어 이멜타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구미호의 머리를 노렸다.
까아아앙!
물론 그것은 맞지 않았으나 호이란의 시선을 나에게 붙잡아두는 데는 성공적이었다.
벽면에 맞아 나뒹구는 디아볼릭은 의식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아론다이트를 꺼내 들었다.
아스티나가 내 등 뒤에 내려서며 마법진을 키웠다.
“준비됐지?”
“마력이 간당간당해. 여러 번 시도는 못 할 거야.”
“나를 믿고 질러.”
아스티나의 음성에는 단순한 격려를 넘어선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 대기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이라면 어쩌면,
천마 류운학과 마녀 일레인이 우리 둘의 상대로 태그매치를 붙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사식 비천성검(飛天聖劍)]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술을 실전에서 처음 사용했던 상대는 폭주하는 캉이였다.
당시 캉이는 이 기술을 정통으로 맞고는 쓰러져 버렸다.
그것을 캉이의 어머니인 호이란에게 쓰려 한다.
쐐애애애액!
직선으로 뛰쳐나가는 성검을 피하기 위해 호이란이 땅을 박차려 했다.
하지만 아스티나가 혼신의 마력을 쏟아부은 리버스 그래비티가 그녀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 찰나의 봉쇄가 호이란의 기동력을 아주 조금 둔하게 만들었다.
“아스티나, 지금!”
은발의 마검사가 또 하나의 마법진을 소환했다.
“크윽!”
무리했는지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이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건 사력을 다하는 파트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니.
공간을 뒤트는 중력 마법이 되돌아오는 성검 아론다이트에게 부여됐다.
리버스 그래비티를 동시에 두 개체에게 시전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내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은 빌려온 스킬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술식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그 원리를 타인에게 설명할 수가 없다. 연구와 노력의 결정체가 아니라 권능의 위력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검의 주변 공간을 휘어서 피격 범위를 늘릴 거야.’
실시간으로 수정되는 아론다이트의 궤적을 마법 계산으로 따라붙겠다는 뜻이다. 차라리 맨다리로 달려서 레이싱카의 꼬리에 매달리는 것이 쉬울 지경.
호이란의 고개가 크게 젖혀졌다.
네 개의 만다라가 회전하는 중심 공간을 아론다이트가 관통해버린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무력하게 빗나간 공격이었겠지만,
까차아앙!
아스티나의 중력 왜곡으로 네 만다라에 정확히 동일한 충격량이 전달됐다.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뻗은 손바닥을 향해 아론다이트가 날아와 달라붙었다.
만다라가 깨진 충격에 비틀거리는 호이란.
“미안합니다.”
환히 열린 가슴을 향해 성검을 내리꽂았다.
푸우우우우욱!
여인의 가슴을 관통한 성검에서 황금빛 광채가 비산했다.
그래서 호이란의 웃음 또한 황금빛이었다.
“훌륭한 한 수였다. 또 보자.”
현무가 사라졌을 때처럼 호이란의 육신은 검은 먼지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탈진해 쓰러질 것 같았으나 오히려 나보다 먼저 다리에 힘이 풀린 아스티나를 부축해야 했다.
“괜찮아?”
“응. 서둘러. 문을 열어야 하니까.”
“이멜타스에게 가 줘. 문을 열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지금 깨워두는 게 좋겠어.”
아스티나가 쓰러진 이무기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얼핏 봐선 만취한 취객 같은 걸음걸이지만 방금 구미호를 한 차례 제압한 대마법사의 등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문으로 다가갔다.
이번엔 아무런 방해 없이 세계수의 수맥을 열어젖히기 위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위그드라실의 수맥이 죄수와 동조합니다.]
[남은 시간: 29초]
“휴우.”
자연스레 한숨을 내쉬게 된다.
공기를 내뱉을 폐 따위는 없지만. 흠흠.
[남은 시간: 18초]
불사자의 축복에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지만 이 해골의 모습에 익숙해지는 것은 양가적인 감정이 들게 했다.
빨리 골제 바르한을 만나서 다시 본래의 육체로 돌아가고 싶다.
[남은 시간: 11초]
그런데 생각해보면 용사의 육체 또한 내 본래 모습은 아니었다. 인간 박상식은 금발벽안도 아니고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미남의 얼굴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용사의 몸을 처음 받았을 땐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지.
[남은 시간: 7초]
어쩌면 해골 모습에 대한 거부반응은 단순한 외모지상주의적인 발상일 뿐인 걸까,
라는 잡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슈아아아아악!
익숙한 색채를 지닌 기운이, 그것도 압도적인 요력을 가진 여인의 형태가 등 뒤에서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멀끔한 모습의 호이란이 눈을 떴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돌격해 들어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 어머니? 부활을?”
아스티나가 어떻게 깨운 모양인지 이멜타스가 중얼거렸다.
젠장.
삼월초원의 사신수들은 한 달에 한 번 강림했다.
화룡도의 마그마 엘리게이터도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같은 그림자인 호이란 역시 부활할 때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 믿었다.
[남은 시간: 3초]
또 보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30초도 안 걸릴 거라고 누가 생각하느냔 말이야!
“넋 놓지 말고 막을 생각을 해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호이란의 얼굴은 다급했다.
하지만 말과 달리 요력을 잔뜩 담은 손이 내 얼굴을 향했다.
남은 마력을 쥐어짜 내며 나는 지금 무엇이 통할지 빠르게 판단했다.
[친구 아스티나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자이언트 포스 쉴드(Giant Force Shield)]
다행히 발동되었다.
아스티나가 새로 만들어낸 중력 마법의 비기, 그것 또한 파천황의 권능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콰지이익!
하지만 불완전해서일까, 호이란의 다섯손가락이 포스 쉴드를 뚫어버리며 내 두개골을 향해 다가왔다.
그때, 등 뒤의 문이 활짝 열리는 느낌과 함께 호이란에게 살기가 해제되었다.
결국 30초를 채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해, 해냈습니다, 호이란.”
“…….”
호이란의 표정은 넋을 놓고 있었다. 마치 해괴한 자연현상을 목격한 것처럼.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네 등 뒤로 오고 있는 저것이…… 대체 뭐냐?”
뭐가 오고 있다는 거지?
호이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문 바깥과 동일한 너비의 경사면 통로.
그것을 통째로 진동시키면서 몰려오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쏴아아아아아!
“파도소리?”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세계의 파도도 저렇게 불투명하지 않다. 액체와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물질임에 틀림없었다.
“모래?”
도저히 피할 길 없이 통로를 가득 채우며 몰려오는 모래폭풍이 나와 호이란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