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모래폭풍 (4)
“뭐지, 저놈들은?”
순백의 조각상에 날개가 달려 있다.
그것이 정체불명의 습격자들에게 받은 첫인상이었다.
매끈한 갑옷처럼 신체의 급소들을 방어하는 용의 비늘. 팔꿈치 아래로 일체화되어 있는 방패. 한 손에 들려 있는 드래곤 스피어.
무엇보다 이목구비가 없는 원형의 얼굴.
“용왕의 레어에서 봤던 녀석들과 닮지 않았나?”
제르비어스의 질문은 혼잣말처럼 들렸으나 토니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색깔이 달라. 느껴지는 생명력도 용왕의 병사들에 못 미치고. 문제는…….”
“까마득한 숫자이겠지. 지금도 계속 추가되고 있는데.”
그 숫자는 무려 일백에 가까웠다.
“연금술의 형태변환과 유사한 탄생 원리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레나스의 분석이었다.
위대한 연금술사 그룬덴 사니릭투스의 모든 정수를 체화하고 있는 이 오토마타에겐 저 병사들의 출몰이 낯설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를 복제하는 호문쿨루스와 비슷하군요. 하지만 저들을 빚어낼 수 있도록 한 원본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마도…… 용이겠지요.”
“전설 속에 나오는 용아병이군.”
백색 용아병들 사이엔 중간중간 검은 빛깔의 병사들도 섞여 있었다.
바로 용왕 게브라둠의 비늘로 만들어진 용린병이었다.
용린병 한 기가 십인대장으로서 수하에 열 기의 용아병들을 지휘하는 형국이었다.
“여기는 방어하기 좋지 않아. 교도관에게 돌아가는 게 좋겠다.”
제르비어스와 동료들은 잔뜩 긴장한 채 가지 끝에서 물러났다.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으나 자세가 사뭇 달랐다. 네 개의 다리를 꼿꼿이 세운 채 용아병의 무리를 노려보고 있던 것이다.
“내 예상보다 용왕이 빨리 움직였군.”
교도관이 슬쩍 고개를 내려 슈바인 스트링거가 뛰어내린 구멍을 내려다봤다.
수왕 후보인 등반죄수가 세계수의 일부가 된 호이란을 만나고 있다.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잠잠했던 용왕이 세계수에 용아병을 보낸 것이다.
우연일 리가 없다.
“교도관, 저들의 목적이 뭔지 알겠나?”
제르비어스의 질문에 교도관이 차분하게 답했다.
“지금 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아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터. 그러나 아무리 오만한 자라고 하더라도 저토록 많은 숫자의 용아병을 만들어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최소한 스무 마리의 용에게서 뼈를 적출해낸 것이다.”
“아무리 용이라도…… 그러면 죽지 않나?”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층의 죄수가 사망했을 경우 교도관인 내가 그걸 모를 수는 없어.”
자연히 끔찍한 상상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상태의 용에게서 뼈를 적출해낸다. 그리고 사술에 가까운 마법으로 가까스로 생명만을 유지시킨다.
목적은 단 하나.
습격의 전조를 교도관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것.
함정과 모략. 강자가 마음껏 발톱을 드러낸 순간 행해지는 폭력.
용왕 게브라둠은 차마 떠올리기 어려운 발상을 현실로 구현해냈다.
바로 용이라는 최강종의 도축(屠畜).
“지독한 자로다, 게브라둠!”
교도관의 목소리엔 은은한 분노마저 서려 있었다.
자신도 교도관이 되기 전에는 용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나 눈앞의 층장은 종으로서의 우아함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미치광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용아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의 운해에 거대한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용왕 게브라둠이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접근해온 것이다.
서로를 튕겨내는 용과 세계수의 제약을 피해서.
“이것은 선전포고 같은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그 그림자에서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용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병사들은 등반죄수를 잡아 오기 위해 지금부터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 따위 없다. 내 병사들을 막아서지 않는다면 너희 부스러기들 따위에게 볼일은 없으니까.”
살고 싶으면 도망쳐라.
너희에겐 손수 죽일 가치 따윈 없으니까.
확실히 선전포고에 속하는 발화는 아니었다. 상대에게 공포를 주기 위한 목적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사실을 읊고 있는 것뿐.
“가거라, 용의 병사들이여. 자르고, 부수고, 터트려라. 저 지긋지긋한 나무를 외피에서부터 뜯어버리고 오라!”
백 기의 용아병이 날개를 펼친 채 세계수 꼭대기를 향해 날아왔다.
스파아아아앗!
캉이의 전신이 빛나더니 어수룩한 소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늠름한 구미호가 전방을 주시했다.
용왕은 도주를 권고했으나 캉이는 이곳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이 오메가 위프를 허리춤에서 꺼내 들었다.
그러자 오토마타 레나스 또한 전투 모드로 신체를 빠르게 변환시켰다.
하얀 점들로 보였던 백 기의 용아병들은 어느새 지척까지 날아왔다.
발생할 수 있는 양상은 오직 전면전뿐이었다.
세계수 내부로 향하는 입구는 만천하에 드러나 있어 조금도 숨을 곳이 없었다.
“용 아저씨는 어떻게 할 거야?”
캉이가 교도관을 향해 물었다.
좌중을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체고가 무색하게도 현재 교도관의 화신체는 아무런 무력도 갖고 있질 않았다.
“도와줄 수 없어 유감이구나. 나는 지금 너희들을 지켜줄 수가 없다.”
애석한 일이었다.
동족을 지키기 위해서 수백 년 동안 화신체를 억지로 강림시켜 왔으나 정작 그 수혜를 입은 용들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예상하고 있던 바였으나 제르비어스의 얼굴은 더욱 흙빛이 되었다.
“이 입구에는 제약이 걸려 있다고 했잖아. 용이되 용이 아닌 것만 들어갈 수 있다며?”
“저 병사들에겐 자격이 있다. 용의 비늘이나 뼈로 빚어졌으나 용의 본체는 아니니까.”
전투의 포문을 연 것은 레나스의 양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전자포였다.
[연금무장술 살상기능 해금]
[형태변환 B: 저격 특화형]
프즈우우우웅!
레나스의 단발 머리카락이 반동에 의해 크게 치솟았다.
푸른색 초전자포가 삼각편대를 이뤄 날아오는 용아병 무리의 첨단을 향해 날아갔다.
터어어엉!
선두의 용아병이 방패로 초전자포를 막아냈고, 미리 약속한 동작처럼 두 기의 용아병이 등 뒤를 받쳐 팔랑크스의 효과를 냈다.
그 세 용아병이 충격을 상쇄시키느라 주춤한 사이 다른 용아병들은 오히려 속력을 높여 날아왔다.
“조심하라. 용왕은 기원검을 탐낸 나머지 층장으로서의 통치기반마저 전부 버렸다. 지금까지는 장난감처럼 너희를 갖고 놀듯 대했겠지만 이 순간부로 용왕에게도 물러날 곳이 없게 된 거지. 원하는 것을 쟁취할 때까지 전력을 다할 것이다.”
캉이의 눈빛이 분노로 타올랐다.
어린 구미호에게 있어 용왕 게브라둠이야말로 지금껏 만나온 모든 죄수들을 통틀어 가장 ‘나쁜 존재’였다.
이멜타스는 복수를 위해 차가운 심장을 가질 것을 주문했으나 지금의 캉이에게는 통하지 않는 조언이었다.
아홉 마리의 분신으로 나뉘어진 구미호가 지대공 미사일처럼 여우트림을 내쏘았다.
콰아아아아아!
여우트림의 궤적에 포착된 대부분의 용아병들이 날개를 움직여 회피를 선택했다.
하지만 두 기의 용아병은 방패로 막아내는 어리석은 길을 택했고, 세계수의 수관에 볼품없이 처박혔다.
여우트림의 순간 파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날아오는 백 개의 화살을 화살로 떨굴 수는 없는 법.
곧 상륙에 성공한 용아병들은 날개를 접은 채 입구를 향해 질주해 들어왔다.
제르비어스가 마기를 폭산시키며 뛰쳐나갔다.
[마왕군 폭렬마법]
[4급 오의 오메가 플레어(Omega Flare)]
마기의 파도가 용아병들을 휩쓸며 운신에 제약을 걸었다. 근접 전투형으로 변환한 레나스가 용아병에 맞섰다.
오토마타는 마치 무대 위의 무용수처럼 아름다운 동작으로 용아병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그러나 용의 뼈가 얼마나 단단한 물질인지 레나스의 수검은 균열이 생길 뿐이었다.
레나스 뒤를 덮치려던 용아병의 목에 휘리릭 채찍이 감겼다.
그것을 끌어당기려던 제르비어스는 순간 계산이 크게 어긋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격을 정지시키는 데엔 성공했으나 용아병의 괴력은 제르비어스의 완력을 웃돌았던 것이다.
그 용아병은 목표물을 바꿔 이번엔 마왕의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제르비어스는 혀를 찬 다음 오메가 위프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업화의 쌍장으로 용아병의 드래곤 스피어를 받아쳤다.
꾸우우웅!
그야말로 용의 돌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제르비어스가 창의 추가타를 피해내며 뒤로 물러섰다. 힘 대 힘에서 상대를 짓눌러버리는 유형인 폭렬마왕에게는 불편한 상황이었다.
곧바로 사각에서의 협공이 찔러 들어왔다.
‘숫자가 너무 많아.’
일전에 용왕의 레어에 소환되어 슈바인을 빼내 왔던 것과는 그 난이도에서 궤를 달리하는 상황이었다.
그때는 용왕의 허를 찔러 최대한의 속도로 몸을 빼내는 것이 지상목표였다.
오랫동안 준비할 시간도 주어졌다.
지금은 아니다. 도주를 선택지에 넣을 수도 없을 뿐더러 상대는 도발이나 심리전도 통하지 않는 무언의 전투기계들이었다.
전황을 지켜보는 고룡,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의 심정은 참담했다.
“뒤를 생각하지 않나 보구나, 층장.”
교도관의 음성이 찌르는 방향에는 용왕 게브라둠이 숨어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오래 참은 것 아니던가, 교도관이여. 용의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하나 결코 무한하지는 않아.”
“너희와 세계수의 불가침은 어느 한쪽만을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한들 용이란 태생적으로 고고한 존재. 그런 용들로 하여금 형량이 끝나기 전에 영혼 없는 그림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준 것이다.”
“금단의 영역이라는 것은 애초에 용의 서식지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보호’를 요청한 기억이 없다.”
교도관과의 대화가 용왕의 미세한 심기를 건드려서인지, 공중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열 기의 용린병들이 전투에 가세했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나마 반격을 할 수 있었던 전황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캉이의 목덜미에 숨어 있던 토니아가 이를 악물었다.
“캉이야, 너의 요력을 키워줄 수 있어. 하지만 고통이 따를 거야. 괜찮겠니?”
“나는 괜찮아.”
“다만 이성을 잃으면 안 돼. 여기선 너의 폭주를 막아줄 슈바인이 없으니까. 터져나가기 직전에서 정신줄을 붙잡는 거야.”
“해보자. 이대로는 큰일이 날 거야.”
“그래.”
토니아의 날개가 전장의 숨결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린 구미호의 내면에 있는 파괴욕구를 겉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집중했다.
한 번 해방시키면 감당하기 어려운 짐승의 본능.
페어리 퀸인 토니아의 격조차 웃도는 구미호의 요력이 사슬을 집어 던지고 날아올랐다.
“내가 여기 있다!”
모든 분신을 해제한 뒤 캉이는 본체만을 남긴 채 포효했다.
가장 강력한 개체인 자신이 시선을 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효과는 주효했다.
용린병들이 캉이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수세에 몰리던 제르비어스가 그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마왕은 캉이가 폭주하던 모습을 최초로 목격했던 장본인으로서 그때의 광경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레나스의 부분들이 마왕을 향해 날아왔다.
촤차착!
비행 능력이 없는 제르비어스의 등에 부스터가, 그리고 어깨에 초전자포를 내뿜을 수 있는 포신이 장착되었다.
“캉이 관객님을 공중전으로 보조하겠습니다. 동의하시나요?”
마왕이 웃으며 날아올랐다.
“적어도 합체에 관해서라면 내게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
오토마타와 합체한 마왕이 두 개의 뿔로 용린병의 방패를 꿰뚫었다.